이완용 평전(윤덕한 지음)

 

 서론

우리가 잘 아는, 그래서 더는 알고 싶지 않은, 매국노 이완용 일대기이다. 그런데 그의 평론을 통해 그 당시 조선 말기 시대상황과 무엇보다 조선 망국의 상황을 생생히 엿볼 수 있어 읽어볼 만하다.

내용인즉,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인데, 조선말 혼돈의 시대에 한 인간이 자기보존 본능에 따라, 그 시대상황 속에서 생존에 몸부림치는 이야기이고, 자라면서 천자문이나 외우고, 손에 흙 묻혀 텃밭 하나 가꾸어보지 못한, 오로지 붓대 한 자루 잡고 자란 문인 정치가가 결국 매국노로 끝났다는 이야기이다.

평전의 저자는 "그러나, 그게 이완용뿐이냐"하고 항변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이완용은 1858년 6월, 지금의 판교 부근,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완용의 직계 (이씨)집안은 9대조 이래, 이렇다 할 벼슬자리를 한 사람이 없어 겨우 선비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왔다. 이런 사정으로 이씨 집안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가 출생하던 날 특이한 일화 하나가 일당서기에 소개되어 있다.

일당은 이씨의 호이다. 일당서기는 그의 생질이자 오랜 기간 비서였던 김명수가 이완용의 약력, 공직생활 자료를 모아 일어 책으로 냈다.

"그의 어머니가 산기 중 꿈을 꾸었는데, 꿈 중에 말을 탄 수백 명의 병사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꼬리는 모두 집 안으로, 머리는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꿈에서 깨어나자 곧 순산했다."

"이씨의 서모가 산모에게 줄 밥을 지으려 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변해, 비 바람, 번개, 뇌성이 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부엌에 들어가니 그릇이 모두 부서지고 온전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직 쌀을 담은 그릇만 그대로 있었다."

이 태몽과 하늘 이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씨가 6살 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워낙 총명해서 몇 달 만에 다 마치고, 이어 효경, 소학을 8살에 끝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한다.

 "대한에 학문있는 정치가가 몇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용씨가 외무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여,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 그 권리를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견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씨가 혼자 대한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당당히 말한 까닭에…, 리완용씨가 죽는 것을 두려워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째 아니 가는 재상이라…"

윗글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논설이다. 논설은 서재필씨가 도맡아 썼으니, 이 글도 그가 썼을 것이다. 독립신문에는 이씨에 대한 보도가 몇 차례 등장하는데 모두 그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무서워 아니하고 옳은 일을 한다던 그가, 그로부터 8년 후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함으로 만고의 매국노가 됨은 어인 일인가? 참으로 갑작스런 변신이다.

책의 저자는 이를 설명코자 평전을 쓰게 됐다고 한다.

 

 본론

이씨가 태어난 해는 조선말 철종 9년으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하고 있던 때였다. 나라는 당파싸움, 부정부패로 문란해지고, 서울 장안에는 도둑이 들끓어 포도청이 이를 막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등, 조선왕조 말기의 증상을 드러내고 있던 시기였다.

밖으로는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홍콩을 탈취하고, 이제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 됐다. 결국, 1860년 8월 북경이 점령되니 청 황제 함풍재는 열하로 도피하고, 이런 와중에 러시아는 청과 영불의 중재 대가로 만주 우수리강 동쪽을 차지해 조선과는 두만강을 사이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황제가 피난했다는 소문이 조선에 퍼졌다. 조정과 민심이 대혼란에 빠져, 청국이 그들의 발상지인 만주조차 부지 못 하게 되면 급기야 청 황제가 조선으로 몽진하게 될터인데…, 이런 생각에 일부 양반, 부자들은 보따리를 싸 들고 산중으로, 백성은 서양 오랑캐의 살육을 면해보고자 천주교라도 믿는 척 하려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러나 청과 영-불간에 화평교습이 성립되고 황제가 북경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씨가 10살 되던 해 먼 친척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간다. 가난한 시골에서 서울의 이름난 양반 부자동네, 안국동으로.

당시 이호준은 기생에서 서자 하나를(이윤용) 얻었을 뿐 자기 자식이 없었던 탓에 집안의 대를 잇고자 관례에 따라 양자를 들인 것이다. 공부 잘한다는 소문도 있고, 먼 친척이기도 하고.

이호준은 지금의 청와대 의전 수석비서관 격인 예방승지로 고종을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니 당대의 명문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선조는 조선후기 세력가인 노론계열의 중심에 속했고, 그의 처는 여흥 민씨로 민비와 같은 집안이고, 그의 서자 이용운을 대원군의 서녀와 혼인시켜, 대원군과는 오랜 친구이자 사돈 관계가 됐다.

이렇게 호랑이도 무서워할 인맥인데,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니 일약 금 호랑이 같은 실력자가 된다. 그러니, 이완용이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던 해는 바야흐로 이호준이 출세가도를 질주하던 시기였다.

이로서 남다른 총명에, 가문 배경까지 갖추어 이완용은 입신출세가 확실하게 보장된 금수저가 된다. 아쉽게도 결국 매국노가 되어 자신도, 양가 집안도 풍비박산이 되지만…, 조물주는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는가 보다.

이완용이 사망하고 사흘째 되던 날 동아일보 사설에는 "애당초 대가의 양자로 들어가지 않고 시골에서 땅이나 파다가 말았더라면 매국노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을…" 이라고 썼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태몽은 개 꿈이 아니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A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