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천하성 안보칼럼

chonhs
B53688CA-2FB6-494F-920B-83E3EE6F0FBE
58561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23
,
전체: 4,238
해군사관학교졸(1967)
1990년 이민, 캐나다 한의학교졸(침술과정),
현재은퇴생활
289-597-1185
메뉴 열기
chonhs
천하성
62890
10273
2018-01-13
국가는 왜 실패하나(13)-무적함대(하)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영국 하워드 사령관은 드레이크가 부사령관으로서 예하 함대를 인솔해야 하는 임무를 이탈, 예하 함정이 부사령관의 위치를 몰라 진형이 분산되는 혼선이 잦자 해임시킨다.


덕분에 일찍 런던에 입항한 드레이크는 당시 넉넉지 못한 재정에 동원된 많은 선박에 지불할 사용료가 없어 걱정하는 여왕의 고민을 해결해주어, 여왕의 신임을 듬뿍 받게 된다. 나포된 배는 스페인 해군 봉급 운반선이었다.


시도니아 경이 이끄는 무적함대가 칼레항에 도착, 닻을 내리고 파르마 공작 예하의 지상군을 기다리게 된다.


마침 강한 바람이 스페인 함대 쪽으로 불고 있어, 하워드 제독은 야음을 틈타 화공을 계획한다. 8척의 배에 기름과 가연물질을 가득 실어 불을 붙인 후 스페인 함대 속으로 돌진시킨다.


 당시 함선은 나무 선체의 방수를 위해 송진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불에 취약했다. 스페인 함대는 불꽃이 튈까 봐 황급히 닻줄을 끊고 회피한다. 이로서 화재의 위험은 피했으나 함대의 진형이 흐트러졌다.


다음날 동이 트자 영 함대가 흩어진 스페인 함대를 공격, 3척을 격침시킨다. 그 다음날 스페인 함대는 진열을 정비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영은 맹렬한 태풍 때문에 공격을 멈추고 기다렸다.


무적함대는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초승달 대형을 유지, 적을 맞이하여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스페인 함대는 바람과 해류로 계속 해안 쪽으로 밀려, 좌초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더욱이 닻이 없는 함선들은 잠시도 편히 안전 위치를 지키기가 불가했다.


이런 조건 속에 마치 모든 것이 이렇게 끝날 것 같았는데 돌연 바람 방향이 바뀌어, 함대는 북으로 밀리면서 탁 트인 바다에 이르게 되었다. 시도니아 공작은 칼레로 돌아가 지상군을 기다리자니 이미 항구는 영 함대에 봉쇄되었고, 배는 여전히 북으로 밀려가는 상황에 도리가 없다고 판단, 임무를 포기하고 귀국하기로 결정한다.


영 해군도 탄약이 떨어져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해전은 이렇게 끝났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침몰된 배는 많지 않았으나, 많은 손상을 입은 함대로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식량도 부족했고, 물통이 샜기 때문에 물도 귀한 상태였다.


더욱이 아일랜드 북서 연안을 돌면서, 심한 태풍을 만났는데, 이 태풍이 2주간 계속되어 피폐한 배에 피해가 계속 되었다. 그간 전투에서 살아남은 23척의 배가 해안에 좌초되고 침몰된다.


출항 4개월 만에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는 리스본을 떠난 전함 60척 중 반이 사라진 후였다. 이로서 무적함대는 사라지고, 해상통제권을 장악한 영은 제1 강국으로 성장한다.

 

 결론


무적함대가 사라지는 세계사의 전환에서, 해전의 결과는 드레이크보다 태풍의 위력에 의해 결정되었으나, 우리의 주의를 끄는 점은 역사의 순간에 여왕이 보여준 지도력이다.


조선에도 이순신이 있었고, 신라에는 장보고가 있었으나 이들은 감옥에 보내지거나 살해된다. 중국 명나라도 6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을 지나 아프리카 연안까지 원정했던 정화가 있었으나, 그가 죽자 어인 일인지 명은 스스로 함대를 파괴한다.


영국은 해적 드레이크를 키워, 일등국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2812
10273
2018-01-04
국가는 왜 실패하나(12)-무적함대(상)

 

 서론


"결혼 합시다" 스페인 국왕 팔레프 2세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청혼한다. 대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짐은 영국과 결혼 했노라".


16세기, 세계 제일의 강국은 스페인이었다. 영국 인구는 300만 명, 스페인은 1500만 명 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남미 여러 곳에서 약탈한 금과 은을 본국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고, 영 해적들은 이를 오래 전부터 약탈하고 있었다. 그들이 원조 캐리비안의 해적들이다.


 이에 ‘용’이라는 별명의 해적 드레이크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곤 했으나, 엘리자베스는 오히려 그에게 작위를 부여하고 해군 제독의 지위를 준다.


당시 별볼일 없었던 영국으로서는 어쨌든 많은 재화를 갖고 오는 이를 마다할 수 없었고, 더욱 스페인이 영 침공을 공고하자, 해적 드레이크는 단지 해적이 아니라 영의 국운을 짊어져야 했다.


팔레프 왕은 신교(성공회)로 돌아선 영을 다시 구교 국으로 만든다는 종교적 신념도 갖고 있던 터였다. 달리 방법이 없자, 영을 침공, 여왕의 항복을 받아낼 심사를 굳힌다.


당시 영은 유럽 중심에서 떨어져있는 작은 섬나라여서 육군도, 해안 방어시설도 대단치 않았으나, 스페인은 무적의 명성을 이미 얻고 있는 해상력에 더하여 당시 유럽 제1의 지상군을 보유하고 있던 터여서, 영 원정계획은 별 걱정할 일이 아닌 듯 보였다.


팔레프 1세는 당시 네덜란드 독립운동을 저지 차 원정중인 파르마 장군 예하의 지상군 3만 명과 본토의 1만6000명을 영국에 상륙시킨다는 계획을 공포한다. 이의 호송은 무적함대가 담당한다.

 

 본론


이에 영국은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막 돌아온 드레이크를 불러 작위를 수여하고, 무적함대 격침을 명한다. (1581년). 드레이크는 기다릴 것 없이 먼저 공격하자는 의견이어서 함대(23척)를 이끌고 스페인으로 향한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정면대결은 피해서 해전은 없었으나, 대신 여러 해안을 침공해 함선들을 불태운다(37척). 더욱 함정 식수통용 목재를 빼놓지 않고 태워버리는데, 당시 식수와 식품을 담아두는 통은 나무판자를 1년 이상 건조, 방부효과를 높이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들이 모두 불탄 것이다. 그 결과, 칼레 전투 중 식수와 식품이 부패, 스페인 해군은 설사, 이질로 고생한다. 


1588년 5월, 130여 척의 무적함대가 리스본항을 출항한다. 도버 해협을 지나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경에 위치한 칼레항에서 지상군을 탑승시켜 런던 입구에 상륙시킬 계획이다.


함대는 지상군이 사용할 군마, 대포 등 군수품과 1만6000명의 상륙군을 태운 수송선이 포함됐고, 따라서 함대는 수송선의 속력에 맞추어 서서히 항진했다. 2달 후 영 연안에 접근했고, 기다리고 있던 영 함대가 이를 추격한다.


스페인 함대는 초승달 전형으로 수송선을 가운데 두고, 외곽 양끝에 강력한 전함을 배치해 수송선을 보호했다. 적선이 접근 시 이를 포위해 백병전(boarding)을 전개할 태세였다. 


영 함대는 스페인 함대가 레판토 해전에서 사용한 이 포위작전을 이미 아는 터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함포공격을 위주로 하며, 결코 포위당할 만큼 접근하지 않는다는 작전이었다.


영 함대는 선체가 낮고, 기동성이 좋을 뿐 아니라, 사정거리가 먼 포를 장착하고 있어 이 이점을 잘 살릴 계획이었다.


스페인 함대도 영 함대 격파가 일차 목표가 아닌 까닭에 적극적인 공격이 없이, 피차간 결정적인 전투는 없고 함포전만 계속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스페인 함대가 칼레항을 향하고, 영 함대가 이를 추격하고 있는 가운데 드레이크는 해적 특유의 장기를 발휘, 금과 은을 많이 실은 배와 탄약 운반선을 야간에 나포한다. 오랜 해적 생활로 보물선을 보는 안목이 길러진 듯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2302
10273
2017-12-03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11)-일본의 행운(하)

 
 

(지난 호에 이어)
대부분의 번주들은 매해 거두어 들이는 세금은 일정한데, 동경을 오가는 연례행사와 동경과 고향의 2중 생활 등으로 지출이 늘어나자, 이를 줄이고자 무사의 봉급을 삭감하거나, 새로이 부자가 된 상공인에게 무사의 특권인 칼을 차는 권리를 판다거나 돈을 빌리는 일이 빈번해졌다.


 생활이 안 되는 하급무사들은 자신의 재주를 살려 서예나 무술 교습소를 운영하거나, 우산, 부채를 만드는 등, 종전에 가장 천시됐던 상인의 일을 했고, 따라서 주위의 존경이 차츰 줄어드는 참기 힘든 상황에 처한다.


그들의 불만은 자연히 위로 향했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막부의 지도력 부족을 탓하게 된다. 특히 멀리 변두리 번은 현실 정치에 참여치 못하는 불만도 겹쳐 규수, 사스마, 도사번에서 불만이 심했다.


3) 유신 전야


페리가 다녀가고 다음해, 군함 7척을 거느리고 다시 오자, 조약이 체결된다(1854 미일 친화 조약). 하지만 치외법권 등 불평등 조약 내용이 문제가 되어, 개국파와 쇄국파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러던 중 청이 다시 2차 아편전쟁으로 수모를 당하자, 미는 이 틈에 추가적인 항구개방을 요구한다(1858 미일 수호 통상 조약). 불평등한 조약이 또 조인되자, 일은 발칵 뒤집혔다. 쇄국파는 무능한 막부 때문에 일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만의 소리는 사스마, 조슈번에서 특히 심했다. 이들은 막부와 왕으로 나누어진 통치권을 왕에 통합하고, 외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존왕양이). 이 주장은 막부를 추방하자는 의견이어서, 막부와 번의 대결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사스마 무사가, 일본식 예의를 모르고 무사 앞을 지나가는 영국인을 '무례하다’고 살해한 일이 발생(1862), 영은 7척의 군함을 끌고 와 사스마를 응징한다. 


또 같은 시기에 시모노세기를 지나는 미 상선을 조슈번이 공격, 미-영-불-네덜란드 연합함대 17척이 시모노세기를 응징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서구의 힘을 새로이 깨닫고, 쇄국에 앞장섰던 번들이 개국으로 급선회한다. 이로서 막부와 번은 화해에 이르고, 이어 막부는 통치권을 왕에 반납한다(대정봉환, 1867).
이로서 700년간 일을 지배하던 무사의 막부정권은 막을 내리고, 새로운 메이지정부는 개혁을 시행할 여건이 됐다.


4) 근대화


새로이 정부는 들어 섰으나 서양 같은 선진국을 건설하는 데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또 다른 고민거리였다. 그간 들은 바는 있으나 직접 가서 봐야 한다는 생각에 정부는 젊은 무사와 고위관료 100명을 선발, 미국, 유럽 등 12개국을 순방토록 한다(22개월).


우리가 잘 아는 개국공신 오쿠보, 이등박문도 젊은 무사로 합류했다. 그들은 “서양을 보고 놀라고, 기필코 그 수준에 도달하겠다”는 다짐을 품고 돌아온다. 사절단은 서구 중 독일을 성장모델로 한다. 이미 선진국에 들어선 영, 불보다 한발 늦었지만 독일의 압축성장 모습이 일의 모델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일은 오랜 세월 스승이었던 중을 떠나, 유럽에서 새로운 스승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다른 길을 간다.


결론


옆 나라 일본은 어찌하여 성공할 수 있었는가? 무엇이 가능케 했을까? 


덕천 막부 시작부터 250년, 참근교대는 일의 초보적 산업혁명을 촉발시켰고, 이로 인해 부농, 호상이 출현하면서 지배계급, 무사들의 위상이 취약해졌다.


이는 막부 통치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어서,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체제를 찾는 시점에 페리함대가 등장, 하급무사가 중심이 되어 막부를 몰아내고 신제도,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며 일본은 변혁의 길을 간다.


이러한 신속한 개혁은 일본 무사들의 추진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무사(인구의 6%)는, 무기라고는 만져본 일이 없는 양반이나 선비에게서는 찾기 힘든 일의 큰 자산이었다. 바로 그때, 그 시절 일본에 큰 행운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끝)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2221
10273
2017-11-25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10)-일본의 행운(상)

 

서론


일본에서 풍신수길의 뒤를 이은 덕천가강의 250년 세월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1853년 미국 페리함대가 동경만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한다. 청 나라가 영국의 원정대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도 이미 들었고, 미 함대가 두 차례(1846, 1849) 일에 접근해 통상을 요구한 바도 있었고, 더욱이 페리 제독은 이번에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란 자세여서, 막부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마치고 제국주의 후발 주자로서, 중국에 지출하고 싶었다. 아직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해술에 이르지 못해, 중국을 향하는 항로는 미 서부-캐나다 연안-베링해-일본-중국에 이르는 연안항로를 택하고 있어, 중국에 가는 도중에 연료공급이나 조난 시 구조를 위해 일본과 외교를 터야 하는 입장이었다.


페리함대의 일 방문도, 미 동부-대서양 횡단-아프리카 남단-인도양-싱가포르-중국-일본에 이르는 8개월의 긴 항해여서 항해거리를 반 이상 줄일 수 있는 태평양 항로의 개척이 필요했다.


 일본은 ‘중요한 일이니 1년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하여 페리가 순순히 철수했고, 약속대로 다음해에 다시 온 페리와 개항을 합의한다(미일 수호조약).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유신을 단행해 아시아에서 최초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


그러나 한 나라가 수세기 유지해온 체제를 바꾸는 일이 결코 쉬운 일(조선은 실패함)이 아닌데, 일은 어떻게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했는지, 또 국가 사에는 행운도 따라야 하는데, 어떤 행운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본론


1)일의 산업 혁명


현재의 동경이 위치한 간도평야는 덕천가강이 처음 자리를 잡을 당시(1590)에는 늪 지대로 둘러싸인 조그만 어촌이었다. 풍신수길의 입장에서는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덕천을 막부의 본거지인 교도에서 멀리 늪지대로 쫓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정비, 개간하고 나니, 간도평야는 비옥한 곡창 지대가 되었다. 70% 이상이 산지인 일에서 이는 예기치 않은 덕천의 행운이었다. 한국의 강원도 만한 간도평야는 당시 조선 전체의 쌀 생산량에 버금가는 수확을 안겨 주었다. 일본 내 힘의 균형이 덕천에 기울어져 천하를 통일하고 쇼군이 된다(1603).


그리고 덕천은 국내 안정을 위해, 250여 모든 번주를 격년제로 동경에 거주시키고, 가족 일부를 동경에 상주시켜, 혹시 있을 반란을 예방했다. 가족을 인질로 잡아놓은 격이었다. 더하여, 먼 길을 오가는 번주가 자기 통치 지역을 떠나있어, 모반을 도모할 틈을 주지 않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일 서남단 규수 지방의 번주는 4000리를 여행하여 동경에 도착, 1년 간 하릴없이 동경성 근처에서 소일하다 가곤 하였다. 이 참근교대는 경비가 많이 드는 일이어서 번의 재정에 부담이 됐다. 당연히 돈이 없으면 모반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시 동경은 인구 100만의 대도시가 되어(조선 한양은 20만), 이들 도시 소비생활을 뒷받침하는 각종 생필품, 사치품이 전국에서 공급되어야 했다. 이로 인해 경제발전을 자극, 일본 내 초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페리가 일을 방문할 당시, 일은 유럽의 산업혁명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전 단계의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통적인 작은 작업장, 또는 기술자의 집에서 가족노동으로 도기, 칠기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수준이었다.


2)사무라이의 역경


풍신 이후 일은 매우 엄격한 계급사회였는데, 상업에 종사하여 국민 생활을 이롭게는 하나 직접 생산하는 것은 없으면서 이득을 취하는 상인을 최하급으로, 물건을 만들어 국민생활을 돕는 공인을 그 위에, 국민을 먹여 살리는 농민을 그 위에, 그리고 자신의 이득 취함이 없이 이들을 다스리는 사족(무사)을 최상위에 놓아 사, 농, 공, 상 신분 이동을 금지하고 세습했다.


4계급 중 무사만이 칼을 차고 다닐 수 있었으며, 상급무사가 지날 때는 하급무사나 평민은 길을 비켜 엎드려 절을 하였고, 무례한 평민의 목을 벨 수도 있었다. 한편, 평민이 노름을 하다가 적발되면 가벼이 처벌 했으나, 무사는 같은 경우 품위를 손상시켰다 하여 엄히 다스렸다.


그리고 농민이 내는 세금으로 무사는 봉급을 받고, 전시에는 군인으로, 평시에는 번 내 행정관리로서 일을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2018
10273
2017-11-11
국가는 왜 실패하나(8)-서로 다른 길을 간 중과 일

 

 

서론


중국의 남서 해안도시 광주에 아편 근절을 위해 파견된 관리인 임칙서는 압수한 아편 2만 상자를 불태워 버린다. 이에 영국의 파아머스턴 내각은 중과 개전을 결정하고, 4000명을 태운 군함 20척의 원정군(1만 명의 증원군이 합류한다)을 보내 청의 항복을 받아낸다.


한-중-일 역사는 이 아편전쟁을 근대사의 기점으로 본다. 그리고 반세기 후 일은 근대화에 성공했고, 청은 실패했다고 알려진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을까?


 본론


1867년 가을, 일본 사쓰마 번(현재의 가고시마 현)의 막료였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오늘의 도교에 해당하는 수도 에도를 떠나 야마구치 현으로 향했다. 조수 번주(영주)를 만나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에도로 쳐들어가 쇼군(영주의 우두머리)을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이미 몇 개의 번주가 진영에 참여해 있었다.


1868년 일은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였다. 1600년 이래 일을 장악한 것은 도쿠가와 가문으로, 그 시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천왕으로부터 쇼군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천왕은 이름 뿐인 왕으로 뒷전에 밀려나고 실권은 쇼군에 있었다. 쇼국 예하의 각 번은 자신의 영역에서 세금도 거두고, 봉건영주로서 통치했다. 직업의 귀천도 엄격했고, 사, 농, 공, 상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은 무거운 세금에 거주지 이전도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었다.


쇼군은 수도 에도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외국인은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정치, 경제 제도가 모두 착취적이어서, 당시 동서의 대부분 나라와 같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쇼군이 명목상 전국의 통치자로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전국을 장악하지 못해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번에는 힘이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중앙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으나 남부에 위치한 사쓰마 번의 경우 외국과 통상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근대 국가를 수립하고 싶다는 개혁의지는 지방에서부터 싹텄다. 이들은 외세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천왕과 쇼군으로 나누어져 있는 국가 권력을 왕 중심으로 일원화 해야 한다고 보았다.


도사 번에서는 잘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 같은 걸출한 인물도 합세했다. 1868년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무사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통치권을 왕에 반납하기로 하고 메이지유신을 선포한다. 


이후 봉건제도가 철폐되고, 모든 영지(300여 개)가 정부로 환수됐다. 각 번은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다스렸다. 정부는 근대식 관료정부로 대체됐고, 세금도 중앙정부가 관리했다.


법 앞에 모든 계층이 평등하다는 이념도 도입되고, 국내 이주와 직업선택에 대한 규제도 철폐되었다. 1890년 아시아 최초로 헌법을 채택해 의원을 선출하고, 독립적인 사법부도 설립해 입헌군주제를 시행했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가 일을 근대적으로 바꿔, 서구 산업혁명의 혜택을 쉽게 받아들이는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중반에만 해도 중과 일은 똑같이 절대주의 정권아래 허덕이는 가난한 나라였고, 두 나라 모두 변화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두 국가간에는 주목할 만한 정치적, 사회적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절대권력을 틀어쥔 황제가 다스리는 강력한 관료제국이었고, 그만큼 변화가 힘들었다. 더욱이 국내 혼란(태평천국의 난)으로 남부 전체가 만신창이가 되었다.


 반면, 일본의 정치제도는 달랐다. 도구가와 막부가 천왕을 밀어 냈지만 그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못했고,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여러 번들은 독립을 유지하고 해외 무역도 할 수 있었다.


아편전쟁 후 미국 페리 함대가 도교만에 등장하자(4척) 위협을 느꼈다. 중이 무너지고 다음이 일이라는 소문에 긴장했고, 군사적 낙후를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며, 이는 제도적 개혁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인식에 따라 구 기득권 세력인 쇼군을 무너트리고, 구 지배체제 막부를 종식시키게 된다. 


메이지유신이 선포되자 정치, 경제뿐 아니라 모든 사회제도를 바꾸면서 탈 아시아를 기치로 매진한다. 


중국도 상황은 비슷했지만 애초에 정치제도가 달랐고, 체제를 바꾸기가 한층 어려웠다. 아편전쟁이 있고 반세기 이상이 흐른 1911년, 손문의 신해혁명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당시 중은 국가 개조에 대서는 생각도 없고, 근대무기를 도입해 서구에 맞서면 된다고 보았다. 인식의 차이로서 두 국가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결론


개혁의 길을 택한 일은 그 후 고속성장의 길로 들어섰지만, 중은 구 제도가 그대로 존속한 가운데 모택동 시대를 맞게 된다. 다음 호에 두 나라와 그리고 조선이 걸은 길에 대해 좀더 깊이 들여다 본다. (다음 호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1893
10273
2017-11-04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7)-청의 해체 징조

 

서론


중국의 당나라(618-907)는 지구의 반대쪽에 로마라는 나라가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 서와 동은 서로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고 송, 명, 청 시대에 이르렀고, 명 시대(1368-1644)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선이 연안에 출몰, 소규모의 물물거래가 이뤄진다.


이러던 중 서와 동의 만남은 유감스럽게도 잔인하게 변화되었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과잉 생산되고 있던 면직물의 해외시장을 찾게 됐고, 이것이 열병같이 약탈적 제국주의로 이어진다.


먼저, 청은 건국 후 백여 년의 평온한 세월을 보냈으나, 그 후 국가 운영에 실패하여 각종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누적, 국가 해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이 접근한다.


당시 청은 16, 17세기, 대외적으로는 조선, 오키나와, 월남, 버마, 타이왕조와 종속의 관계를 맺고, 종주국으로 군림하며 대제국으로 품위를 지키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한 청이 어찌하여 실패한 국가로 되어 가는지, 비극과 희극 같은 과정을 들여다본다.


 본론


청 제국을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인구의 90% 이상을 점하고 있는 소작농 이었다. 그들은 지주의 땅을 경작하고 50% 정도의 지대를 지주에 납부하고, 지주는 토지세를 정부에 지불했다.


 이들 소작농은 십여 호 내지 수십 호로 이루어진 자연촌락에서 그런대로 조용한 농촌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외부와 교류가 필요 없는 자급자족 경제였다.


농민을 지배하는 관료는 중앙에서 파견되었지만 그들은 임기가 끝나면 떠남으로 인해 자연히 현지와 연결이 약했고, 그런 관계로 향신이라 불리는 지주출신(대개 과거 급제자) 지방 세도가가 징세, 재판 등 농민의 일상을 지배했다. 


농민들은 농한기에는 가내수공업이나, 행상 등 다양한 부업을 영위해 지대나 토지세를 겨우 내며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농촌사회에 18세기 들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우선, 인구가 증가 하였다(1749년 1억8천만. 1833년 4억).


이로 인해 좁은 경작지에서 기존의 농업, 부업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 이농 인구가 증가하고, 지방도시가 생기고, 이곳을 중심으로 소규모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초기 단계이나 산업이 생겨나자 화폐유통이 늘고 전당포, 고리대금 같은 사유금융이 나타나는 등, 오랜 세월 이어왔던 사회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흔히 변화는 혼란을 수반하는데 청의 구제도는 이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이 나타난 부자들이 불우한 농민들이 내놓은 경작지를 사들이기 시작, 경작지는 돈을 가진 부류에게 집결되기 시작했다. 또한 지주와 소농민간의 신분 예속관계가 느슨해져, 점차 그들간에 대립이 증가되면서 특히 흉작 시기에 지대감면요구 등으로 갈등이 증폭됐다.


정부는 국가재정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토지세를 어떻게든 거두어야 했기에 소농민의 저항을 탄압하여 주었다. 이틈에 악덕 지주는 자의적으로 높은 지대를 징수(농민빈곤화)하는 등 청 말기 착취적 제도가 고착화 되어갔다.


또 이들은 지방 세력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으로부터 과거급제 자를 배출하려 어려운 한문 공부에 매진했고, 여의치 못하면 정부에 돈을 주고 벼슬을 샀다.


청 말기엔 지배세력의 착취가 한층 심해, 살 길을 찾아 농지를 떠나는 농민이 증가했다. 이들은 도시 빈민 또는 불법집단에 모여들었다. 이런 여러 불법집단의 발흥은 청 왕조의 평화와 안정의 시대가 끝나고 국가 해체가 시작됐다는 예보였다.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약점 이용에 빈틈없는 영이 압력을 시작, 내우외환을 겪는다. 영은 청으로부터 차, 비단을 수입하고 면직물을 팔았는데, 차 마시는 습관이 보편화 되면서 수입은 증가일로이나 면직물은 전연 팔리지 않아 영의 적자가 누적되었다(당시 청은 각 가정마다 옷감 짜는 틀이 있어, 옷감을 자급자족했다).


영은 이를 해결코자 인도의 아편을 청에 밀수출했다. 청은 침체된 사회분위기 속에 아편 소모가 급격히 증가, 정부에서 금지령을 내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부패한 관료가 밀수를 눈감아주고, 뇌물을 수수했고, 그렇다고 처벌받는 관료도 없었다.


아편을 둘러싸고, 수입자유화를 요구하는 영과 이를 반대하는 청이 대결하니 이것이 아편전쟁인데 청은 패한다. 이후 청은 고달픈 해체의 길을 걷는다. 


 결론


아편전쟁은 조선의 헌종 때이다. 조선 또한 비슷한 길을 걷는데, 왕조의 실정으로 일어난 임오군란, 동학란을 스스로 해결치 못해, 이틈에 개입한 청과 일이 한반도에서 대결한다.
이렇게 해서 조선 또한 해체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1797
10273
2017-10-27
국가는 왜 실패하나(7)-한반도의 안보(하)

 

(지난 호에 이어)
재차 언급하건대 다음 전쟁은 남한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선 미 자신과 더 나아가 지구를 위한 결단(핵확산 방지)이기에, 일부의 이런 뜻(평화애호?)은 결심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해 의미 없다.


한미동맹은 상호방위동맹, 즉 한-미가 서로 돕는다는 약속인데, 미가 전쟁에 돌입하면, 남이 돕는다는 뜻도 있는 것이다. 70년 동맹을 이제 필요한 시점에서 등을 돌리자는 의견이다. 그럴 수도 없겠지만 동맹이 파기되면 당연히 미는 남에 의무가 없어진다(북이 바라는 첫째 항목이다).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60년 이상 북을 봤으면서 배운 것이 없단 말인가?  


(3)뉴욕 등 미 본토의 핵 위협을 감수하며, 미국이 한국을 돕겠는가? (미 본토 위협론), 또는 북이 서울을 인질로 잡고 있는데 이를 무릅쓰고 미가 전쟁을 하겠느냐? (서울 인질론), 이런 의견이 전부터 있어왔다.


미국이 서울과 뉴욕의 위협을 받으면서, 앉아서 북의 미사일을 기다릴 것이란 말인가? 미 역사에 그런 예는 없었다. 이에 대한 답은 이미 미 국방장관이 “서울의 위험을 최소화한 군사옵션이 있다”고 밝혔다.

 


 (미래)


비록 한-미의 선제타격으로 시작된다 할지라도, 전쟁을 했다 하면 이의 원인을 제공한 북은 응징되어야 당연하다. 북은 그간 빈약한 국가 재정에도 핵을 개발하느라 재래전력은 정체상태에 있다. 핵과 주 전력을 섬멸(한미연합)한 후, 북진(남 단독)해야 한다.


한국이 세계최강의 국가와 동맹인 것도, 북의 핵 보유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동맹국과 함께하고 있는 것도 행운이다. 그러나 중국은 지난 한국전에서와 같이, 지금도 국경에 미와 대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난 한국전의 경험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38선 이북 작전은 남한 단독이어야 하며, 압록강까지도 안 된다. 과거 주장 방식의 북진통일도 안 된다. 평양 바로 위와 원산을 잇는 선에서 점령을 멈추어야 한다. 이것은 통일의 초석을 놓는 길이다. 여기까지가 현실적으로 최선이다.

 


결론


국가행위도 개인행위와 같이 신뢰를 잃으면 설 자리가 없다. 왔다 갔다 하다가 고종과 민비는 비극을 맞았고, 나라를 잃었다. 
위기의 순간 군사적으로 굳건해야 하고, 외교적으론 유연해야 한다. 이런 모든 과정에 한미동맹은 확고해야 한다. 


외교적 경제제재를 하던지, 선제공격을 하던지, 동맹과 호흡을 맞추어 남북분단 이후 찾아온 북핵 해결과 통일의 초석 놓기 기회를 잘 살려 비핵화를 실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한미동맹의 파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매국적 착각이다. 국가도 개인도 도리가 있고, 신뢰를 잃으면 설 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익에도 반한다. 


찾아 온 호기 앞에 국가가 유약하면, 이 또한 국가실패로 가는 길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1642
10273
2017-10-24
국가는 왜 실패하나(6)-한반도의 안보(상)

 

서론


한반도의 요즘 상황을 유엔사무총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쿠바 사태 이후, 핵전쟁에 가장 접근해 있다”.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언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현 상황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과거 예는 없는가? 등을 개관해 보자.


본론


(과거)
강화도 조약(1876)으로 일에 문호를 개방한 고종은, “왜구를 견제하기 위해 왜구를 이용하자”는 청의 제안에 따라 한반도에 영국, 미국을 불러(수교), 일본을 견제해 보려 한다.


당시 영은 자타가 공인하는 강국이었고, 미는 영토에 야심이 없다고 공언하던 참이어서 고종이 보기에 협조를 구할 만 했다.


당시 구미 제국이 조선에 갖고 있는 관심은 사실 전무에 가까웠다. 그들은 청을 분할 지배하고 거기서 경제이득을 탐하는 것으로도 바빴다. 이에 비해 조선은 보잘것없었다.


영은 이미 일, 청이 지배하고 있는 조선에 들어올 일이 없었으나, 단지 부동항을 찾는 러시아가 조선에 항구를 선점할 것이 우려돼 수교는 한다(1882). 그러나 앞서 말 한대로 조선에는 주청공사가 주한공사를 겸임하는 등 조선에 별 관심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일의 기득권도 인정한다.


이와 달리, 미는 푸트 장군을 조선에 초대 주한전권공사로 임명(1883)해 부임하니 고종은 기뻤다. 기대에 대한 응답인 듯 생각됐다. 그러나 미 또한 몇 곳의 금광채굴권을 획득한 이상의 관심이 없어서 공사를 외교경험도 없는 현역 해군중위로 격하 대치한다.


이에 고종은 실망했다. 미는 매사에 중립을 표명하고, 도움은커녕 3명의 군사훈련관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응답하는데 5년이 걸렸다.


이러한 배경에 러시아만이 부동항에 관심이 있어 꾸준히 접근하니,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있는 일은 불원간 러와 충돌하리라 상정하고 있었다.


고종은 강대국에 도움을 청해보고 신식 군대도 만들어보려 하였으나, 외교력도 국방력도 허약하여 민비는 살해되고, 아관파천에 한일합방까지, 이것이 과거 어느 시점의 한반도 안보상황이었다(1896-1910).


(현재)


현 한반도의 안보는? (1)우선 외교 옵션이 별효과 없이 소진되고, 북의 위협이 상존한다면, 미 유엔대사 말대로 이후 조치는 유엔 안보리에서 미 국방부로 넘어가게 된다.


이미 위협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가해지고 있고(봉남통미), 이는 미의 전쟁이 되어 주체할 수 없다. 더욱 큰 고민은 행동을 포기할 시, 세계 최강인 미가 면목을 잃게 돼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버티기는 벼랑 끝까지 갈 터이고, 거기서 협상테이블에 앉던지, 방아쇠를 당기던지 할 텐데, 그 벼랑 끝이 어디일까(?). 답은 북이 미에 도달할 수 있는 유효 핵폭탄을 확보하고, 위협을 멈추지 않을 때이다. 


그럼, 전쟁을 할까?. 무릇 세상사의 모든 일과 같이 전쟁 또한 이를 통해 얻는 이득이 있어야 하는데, 북으로서는 전쟁을 감행하여 득이 없고, 더욱이 이를 지속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북은 비정규전으로 끌고가 이러 저러한 위협으로 자기목적(적화통일)을 달성하려 하고, 그간 준비도 많이 했다. 전쟁을 피하려 결국 협상에 임하리라는 예측이다. 


(2)이런 시점에 요즘 “한미동맹을 파기해서라도, 전쟁은 안 된다”라는 평화애호(?) 발언이 있다. 한국이 세계최강의 나라와 동맹관계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은 큰 행운이다.


이전 어느 시기, 예를 들어 60년대 혹은 70년대에 한미동맹이 파기됐다면 지금 한국 안보가 온전 했을까?


북이 벼랑을 넘어 군사행동으로 가는 순간에 한미동맹을 파기하고, 전쟁을 막자는 주장은 참으로 교묘한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1512
10273
2017-10-11
국가는 왜 실패하나(5)-호주의 행운

 

서론


호주는 근대사에서 영국의 중범죄자들의 유배지였다. 18세기 영국은 범죄자를 다루는 방법이 간단했다. 해외 고도로 보내서 안 보면 그만이었다.

미국이 독립되기 전에는 미국으로 보냈으나, 이후 달가워하지 않아 아프리카로 보냈는데,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이 심해, 아무리 죄수라지만 자국민을 그리로 보낼 수 없어 호주가 선정됐다.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발견한 호주는 태평양 가운데 외진 섬으로 죄수를 보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다음은 그때 이야기이다.

 


 본론


1788년, 필립선장 지휘아래 죄수를 가득 태운 11척의 배가 지금의 시드니 항에 도착했다. 그날이 호주의 건국기념일이었다.

그 중 한 배에 헨리와 수산나라 불리는 죄수 부부가 타고 있었다. 수산나는 절도죄로 사형을 언도 받고,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송될 예정이었으나 미국이 독립하자 계획이 바뀌어 호주로 가게 됐다.

그녀는 같은 재소자로 사랑에 빠진 헨리와 헤어질 처지였는데 다행히 어느 자선가의 도움으로 이들은 갓 태어난 아들과 동행해서 호주로 이송됐다.

자선가는 이들에게 20파운드와 적지 않은 선물을 마련해 이를 선장에게 맡기고, 호주에 닿으면 이 죄수에게 주도록 부탁했다.


 막상 호주에 도착하니 선장의 마음이 달라졌다. 원래 영국 법에는 죄수가 재산을 소유할 수 없어 그곳이 영국이라면 그냥 끝나는 일이었다. 선장도 이를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호주 법무관은 달리 판결했다. 선장은 패했고 배상을 명령 받았다. 호주에서 치러진 첫 민사사건이었다.

애초 이곳에는 죄수와 이를 감시하는 간수만 살았는데, 간수는 대부분이 군인 이었다.

죄수는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했는데, 물론 임금은 없고 죄수가 생산한 것은 간수가 차지했다. 죄수가 받는 것은 식량뿐이었다.

간수는 수입을 올릴 생각에 매질도 하고, 더 외딴섬으로 추방도 했으나 별 효과가 없자, 생각을 바꾸어 죄수가 주어진 노동을 한 후에 남는 시간은 자신을 위해 일하고 그 때 생긴 생산품은 죄수의 소유로 했다.

이렇게 하니 죄수도 간수도 이익을 보게 됐고, 죄수들의 노동생산성이 높아졌다. 당시 술(럼주) 제조가 인기였는데 이런 식으로 간수는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1796년, 간수로 호주에 왔던 맥아더는 호주의 광활한 초원을 보고 목축 사업을 시작, 양모 수출을 크게 키웠다. 양들에게는 이곳에 맹수가 없어 천국이었다. 맥아더는 큰 부자가 되었다.
죄수도 일한만큼 돈을 벌어 사업을 벌이는 게 허용됐고, 이들 또한 다른 죄수를 고용하면서 양모사업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더욱이 형기를 마친 죄수에게는 복권해 주고 땅도 주었다. 이렇게 포용적인 정책을 쓰니 부가 대중에게 퍼졌다.
이에 다양한 사업이 일어났다. 배를 사서 물개 가죽 무역을 하기도 하고, 호텔, 농장 등도 융성했다.


당시 대개의 유럽 국가들은 특정 귀족이나 권력자가 돈이 될만한 산업을 독점하고, 자기 가족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 정책을 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처음부터 귀족이라는 착취 신분이 없고, 죄수와 간수가 건국의 아버지가 된 것이 행운이었다. 이렇게 포용적 경제제도가 정착하니, 이어 포용적 정치제도가 뿌리를 내려, 1856년 세계 최초로 비밀투표가 실시되었다. 죄수가 발을 디딘 후 68년만이다.
호주는 이렇게 경제적, 정치적으로 더불어 잘사는 포용적 제도를 채택하고, 때마침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받아들여 성공한 나라다. 


 결론


호주의 첫 민사사건을 다룬 법무관의 신의 한 수 같은 판결을 한 1788년은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의 영조 때였다. (1725-1799).
그때, 조선에서라면 어떠했을까? “죄수 처지에 고얀놈, 곤장을 쳐라”가 답이 아니었을까? 양반(선장)과 노비(죄수)간의 신분질서 유지가 당시 봉건 절대왕조 정치제도하에서 체제유지를 위한 통치수단 이었으니 아마도 ‘돈 잃고, 곤장 맞고’했을 듯하다. 


 1856년 호주에서 비밀투표로 자신들의 대표를 뽑을 때는 조선 순조 때이다. 호주의 역사를 보며, 조선은 왜 실패한 국가가 됐나 하는 복잡한 심정이 든다. 


한편, 국가가 잘 되려면 행운도 따라야 하는 것 같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honhs
천하성
61422
10273
2017-10-08
국가는 왜 실패하나(4)-노예무역

 

 서론


 옛 시절, 노예는 어느 문화권에나 있었던 일이다. 징기스칸도 많은 포로를 잡아가 노예로 쓰곤 했다. 포로를 각 가정마다 몇 명씩 선물, 그들의 가축 등을 돌보게 했다.


 근대에 이르러 산업혁명과 면직생산이 늘면서 목화농장이나 사탕수수밭 등의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1807년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금지 시키고, 미국에서는 남북전쟁도 했지만(1861-1865), 노예제도가 사라진 것은 기계가 농사에 투입되면서 부터였다.


 본론


 근대초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동남아시아에서 향료무역으로 재미를 보고 있던 시기, 아프리카에서는 사뭇 다른 형태의 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다. 바로 노예무역이다. 


 사실 노예제도는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었다. 고대 로마는 로마시 인구200만에 노예가 500만이나 됐다.

부모가 로마 시민의 가정에서 불 때는 일을 했으면 그의 자손도 부엌에서 태어나 불때는 일을 하며 생을 살아가야 했다.


 로마시절에는 흑해주변의 슬라브족, 서아시아, 북유럽에서 노예를 공급 받았다. 하지만 1400년 무렵부터, 유럽인은 더 이상 서로를 노예로 쓰지 않았다. 


 17세기 초엔 카리브해 지역의 식민지에서 사탕수수 대농장이 발달하면서 아프리카(콩고, 앙골라 등)에서 노예를 데려왔다. 특히 포르투갈인에 의해 공급되었다.


 18세기로 접어들면 대서양을 건너는 노예 수가 600만을 넘었고, 많은 수가 아메리카 목화밭으로 향했다.


 이들은 대부분 내전에서 포로로 잡혀 팔려간 사람이다. 이 돈 되는 장사 때문에 부족간 전쟁은 끝이지 않았다.
 번 돈은 무기 수입에 사용, 당시(1750-1800년대 초)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수출하는 총만 해도 년 30만정이 넘었다.


 영국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됐고, 1807년 노예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이 통과됐다. 영국은 노예무역을 뿌리 뽑고자 대서양에 함대를 배치하는 등 적극적이었으나 이런 조치가 실효를 거두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무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권이 수두룩한데, 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시켰으니 팔지 못하는 노예를 어찌할 것인가. 다행히(?) 유럽, 북아메리카의 산업혁명 확산으로 고무, 상아, 땅콩, 팜유 등 새로운 물품 수요가 증가되자, 팔지 못하는 노예를 이런 새로운 품목을 생산하는데 투입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가나에서는 1807년까지만 해도 노예사냥과 수출이 주 수입원이었다. 붙잡은 노예를 해안으로 끌고 가, 거대한 노예시장에 팔아 넘겼는데, 이들은 대농장 일꾼으로 넘겨졌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바퀴달린 운송수단이 없어 모든 화물은 노예의 피땀으로 운송했다. 따라서 노예무역 폐지는 노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노예가 팔려가는 지역만 바뀐 것이었다.


 그 결과 19세기 아프리카 노예제도는 위축은커녕 오히려 확대됐다.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노예제도는 한참 지난 20세기 초까지 살아남았다. 시에라리온에서는 1928년 돼서야 폐지됐다. 그곳 수도는 미 대륙에서 돌아온 노예들의 안식처로 이름이 자유시(free town) 였다. 노예제도 퇴치 임무를 띤 영국함대의 본거지 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시에라리온 노예제도는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폐지된 후 100년 이상이나 더 존속 되었다.


 리베리아 역시 1840년대 노예해방을 위해 붙여졌다. 리베리아(liberia)는 자유(liberty)를, 수도 이름 몬로비아(monrovia)는 노예해방을 주도한 미국 대통령 몬로(James monroe)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이곳에서도 노예제도는 20세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결론


 자기 국민을 노예로 잡아 팔고 있는 국가에서 실패니, 성공이니 언급할 처지도 못된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는 세계 최빈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필자가 군 생활 중 사무실에 필자와 같은 해 미 육사를 졸업한 친구와 책상을 맞대고 있던 적이 있다.


 이 친구는 대학원에서 한국을 전공하고, 어느 사단의 civil affairs officer로 근무한 바 있어, 이런 저런 음지의 이야기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화가 나면 “--나라는 100년 전만 해도 반이 slave 였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 시절엔 노예제도가 별난 제도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다면 문제지만. 우리 이웃, 북한은 아직 그런 예가 아닐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