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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67)-에베소(6) '마리아 기념교회와 에베소 종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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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산으로 가려져 있지만 그 옛날에는 항구에까지 이어졌던 대로를 바라보며 조금 외떨어진 마리아의 교회로 갔습니다.

이 교회는 “테오토코스 성당”이라고도 부르는데, “테오토코스 (Θεοτ?κος)”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테오(Θε?ς)는 "신"과 토코스(τ?κος)는 "출산, 분만”을 의미하는 두 단어의 조합으로 "신을 운반하는 자", 즉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또는 “신의 운반자”라는 뜻이라고 하니 아마도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 쉽게 마리아 기념교회”로 소개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62회에서 누가복음의 수신자로 표현된 “데오빌로”를 데오스와 필로스의 합성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이 교회는 4세기경에 세워진 대형 교회였다고 하는데, 첫번째 성당 옆에 두번째 성당이 세워졌기 때문에 이중 교회라고도 부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431년 제 3차 에베소 공의회가 열리었고, 이 회의에서 마리아가 신성시되어 아직까지도 천주교회에서는 예수님과 같이, 아니 어떤 때에는 예수님 보다도 더 숭상하는 신으로의 기초가 결정된 곳이건만, 지금은 무너지다 남은 벽 하나와 몇 개의 기둥이 서있을 뿐입니다.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이곳을 방문한 후 성지로 선포하였기에 요즈음에도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에베소에 “마리아 기념교회”가 있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옆에 있던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9: 26~27)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그 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다가 AD 66년, 유대인 봉기가 진압당하던 유대-로마 전쟁의 혼란 속에 마리아를 모시고 그 당시 디모데가 교회를 돌보던 에베소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AD 80년, 디모데도 “5월 아데미 축제” 때 열광하는 군중을 향해 “여신은 우상에 불과하다”며 말씀을 선포하다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디모데에 이어 에베소 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AD 95년경 황제 숭배를 거부하며 예수의 도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섬으로 유배 되었다가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 석방돼 96년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계시록을 집필하는 등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에는 “요한 기념 교회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주에 소개 됩니다.)

또한 에베소에는 마리아가 살았던 집이라는 곳도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마는 우리 일행은 그 곳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의견들을 간추리며 최선의 의견으로 집약하기 위하여 회의를 하게 됩니다.

회의를 하다 보면 서로 다른 의견들로 토론이 되고, 그 토론이 격렬하여지게 되면 언쟁이 되고, 언쟁은 싸움으로 번지다가 급기야 서로 갈라서서 다른 세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양상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인 수장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몇 개의 중요한 종교회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가 최초의 공의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마는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제1차는 325년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터키의 이스탄불) 근교의 니케아(Nicaea)에서 열린 종교 회의로써, 그 당시 교회 내의 분열과 분쟁을 끝내고자 소집했던 최초의 종교 회의였습니다.

이 종교회의에서는 예수님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 곧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지닌 참 하나님”이라는 니케아 신조를 제정했습니다.

이 밖에도 부활절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제정하며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불씨를 남겨 놓았습니다.

제2차는 381년 데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소집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로서 기존의 니케아 신조에 성령(聖?)에 대한 내용을 첨가하는 등의 확대가 이루어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채택함으로써, 아리우스파나 네스토리안주의, 가현설, 사베리우스주의, 아폴리나리스주의 및 호모이우시오스 주의자를 배척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세가 점점 커지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들의 입장이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키릴루스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논쟁으로 커지면서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431년 6월 7일, 오늘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소집한, 제3차 에베소 종교 회의였습니다.

논쟁의 쟁점은 “예수가 신성을 지닌 채 태어났다는 주장에 따라 '신성을 지닌 탄생'인 테오토코스(Theotoskos)를 주장하며, 신성을 지니고 태어난 예수로 인해 신성을 지닌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거룩한 어머니, 성모(聖母)라 부를 수 있다.”며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키릴루스와는 달리,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와, 예수는 인간의 영혼을 가지지 않고 신의 영혼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아포리나리우스주의에 따라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휘포스타시스(자립존재)가 병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크리스토토코스' 즉 '그리스도의 탄생'이라 불러야 합당하다”는 주장의 대립이었습니다.

서로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의 주장으로 회의 기간동안 혼란이 지속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들이 올 때까지 회의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주교들은 뜻하지 않은 문제로 회의 참석이 늦어졌고, 그 틈을 타서 먼저 에베소에 도착한 키릴루스가 자신을 지지하는 주교들과 함께 공의회를 주도하게 되자, 공의회는 키릴루스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며 네스토리우스 학파는 교리 논쟁에서 패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배척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하네스와 그 지지자들이 키릴루스 일파를 탄핵하고, 다시 로마에서 교황 첼레스티노 1세가 보내온 사절이 요하네스 일파를 파문하는 등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다양한 간섭으로 공의회는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마는 결국 이 회의에서 ‘마리아는 신의 어머니 ‘Theotokos’ 이시다’는 것을 채택함으로 또 하나의 불씨를 남기고 끝난 회의가 되었습니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433년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가 네스토리우스의 파문을 받아들이고 합동 신조를 발표하면서 키릴루스 일파와의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네스토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추방당했고, 451년 수도원에서 한을 풀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신학을 따르는 선교 활동은 중동을 포함한 동방 지역에서부터 멀리 중국에까지 전해져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성행하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이, 새롭게 형성되는 신학과 정치 세력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되면서 기독교의 핵심이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되다 보니, 마치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동성끼리의 결혼도 인정하자”는 각 교단에서의 종교회의도 언제인가 먼 후일에 “동성연애를 합법화하고, 동성끼리의 결혼을 인정한 어디어디의 종교회의” 라고 명명되는 하나의 종교회의로 기록이 되어지겠지요?

신앙 속에 신학이 있는지, 신학 속에 신앙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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