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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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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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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7
흔적을 찾아서(55)-고린도는 어떤 도시였나?

 

뿔이라는 뜻을 가진 고린도. “스파르타커스”의 본고장 또한 바로 이곳,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고린도와 이웃한 도시국가, “스파르타(Sparta)”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인구 3만명의 작은 시골이지만, 고대 고린도를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 중의 하나로 만든 참주(僭主) 페리안더(Periander)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업이 번성하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도시로 번영하다 보니 여러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동서 문화의 생활 습성과 또 여러 신들을 믿던 그네들의 종교가 서로 뒤엉켜 혼잡을 이루었던, 인구 60만명의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후서”를 써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던 로마 시대에는, 번창한 항구 도시가 다 그랬듯이 고린도 역시 심한 빈부의 차이와 부유층의 퇴폐적인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 되었지요.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 영어로는 Venus)”라는 여사제가 있어, 600피트나 되는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 부르는 산상에 신전을 지어 놓고는 무려 1,000명이나 되는 무녀들을 거느리며 고린도를 찾아온 뱃사람들을, 또 신들을 숭배한다는 미명 하에 사람들을 불러드려 온갖 음탕한 짓들을 다 자행하였기에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음탕한 풍습에 젖게 되어 “고린도 사람”은 “음탕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로 가자!”하는 말은 남자들 사이에서 “몸 풀러 가자!”라는 말의 은어처럼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전 호의 답이 되었나요? ㅎㅎㅎ)

 

시시포스(Sisyphus)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고 부르는 산에 전해오는 재미있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신이 신과 결혼을 하면 신을 낳고, 신이 인간과 결혼을 하면 영웅을 낳고, 신이 동물과 결혼을 하면 괴물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도 많았고, 켄타우로스 (Kentauros)처럼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괴물도 많이 등장을 합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는 시시포스(Sisyphus)가 바위를 굴려 올려야만 하는 산이 바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고대 코린토스 왕국에서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던 시시포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사람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입니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할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마뜩잖은 인간으로, 일찍이 신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하였습니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 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저녁에 강보를 빠져나가 이복 형인 아폴론의 소 떼를 훔쳤습니다. 그는 떡갈나무 껍질로 소의 발을 감싸고, 소의 꼬리에다가 싸리 빗자루를 매달아 땅바닥에 끌리게 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운 후,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하였답니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이리저리 찾아 다니자 시시포스가 범인은 바로 헤르메스라고 일러바쳤던 것이지요.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이 일로 시시포스는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 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도둑질이거나 말거나, 감히 신들의 일에 오지랖 넓게 끼어든 게 주제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시포스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의 신 아소포스는 딸을 찾아 사방을 헤매다가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시시포스가 다스리던 고린도에는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에 마르지 않는 샘을 만들어 주면 딸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자, 딸을 찾는 게 급했던 아소포스는 시시포스의 청을 들어주었고, 시시포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소포스는 곧 그곳으로 달려가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려던 찰라, 제우스가 던진 벼락에 맞아 새까맣게 타 죽었다지요.

자신의 떳떳하지 않은 비행을 엿보고 그것을 일러바친 자가 다름 아닌 시시포스임을 알아낸 제우스는 저승 신 하데스에게 당장 그 놈을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영웅이자 현명한 시시포스는 저승사자가 당도하자 되레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습니다. 명이 다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묶여 있으니 당연히 죽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 신 아레스를 보내 저승사자를 구출하게 하였습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싸우다가는 온 고린도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시포스는 순순히 항복했습니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면서 시시포스는 아내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부탁한 후, 저승에 당도한 시시포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척했습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 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에 다름 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어째 “별주부전(鼈主簿傳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요? ㅎㅎㅎ

시시포스의 꾀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 후 왕 노릇하며 오래 동안 잘 살았는데···. 그러나 아무리 영웅이라 한들 어찌 죽음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마침내 시시포스도 다시 저승사자의 손에 끌려 저승으로 갈수 밖에요. 저승에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데스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습니다. 시시포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져버렸습니다.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올리면 떨어지고, 또다시 올리면 또 떨어지고…. 그리하여 시시포스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음행의 원천지인 신전이 있는 산이 바로, 올리면 굴러 내리는 일을 평생 하여야 하도록 형벌을 받은 그 산이라니 흥미 있는 일이 아닌가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산 위로 힘겹게 오르려는 영겁의 형벌! "고린도로 가자!” 라는 말뜻을 다시한번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것만 같습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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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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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0
흔적을 찾아서(54)-고린도 운하(Corinth Canal)와 유적지

 

유럽 대륙의 남단, 지중해의 동북부로 삐죽 나온 땅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77km 떨어진 곳에는 사람의 몸으로 치면 꼭 맹장 같은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붙어 있습니다. 이 반도를 대륙에 붙여주고 있는 고린도 지협이 반도 서쪽의 이오니아 해와 동쪽의 에게 해를 가로 막고 있어, 실크로드를 타고 동양에서 비잔티움(현재의 이스탄불)까지 온 신기한 문물들을 로마로 운송해야 하는 뱃사람들과 이재에 밝은 상인들에게는 약 700km의 뱃길을 돌아가야 하는 시간과 또 풍랑의 위험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때에는 그리 크지 않은 배는 겐그레아 항구에서 땅 위로 올려, 올꼬스 네온(배를 견인하는 마차)를 이용하여 배를 지협의 서쪽 끝으로 끌고가 고린도만의 레헤온 항구에 다시 띄웠었습니다.

약 7km되는 거리에, 폭은 3~5.5m되는 Diolkos라 하는 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주로 선실이 없는 전함을 옮겼다고 하나, 상선일 경우에는 겐그레아 부두에서 선내의 짐을 하역하여 배를 가볍게 한 후 고린도만의 레헤온 항구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런 불편함이 있었으니 고대 고린도를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 중의 하나로 만든 참주(僭主) 페리안더(Periander)에 의해 최초로 이 지협을 파 운하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워낙 굳은 지반을 파내는 과업의 장대함으로 그 시대에는 실현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운하 계획을 가졌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가, AD 67년, 네로 황제 때 비로서 실제 작업에 들어가 6,000명의 유태인 노예와 죄수들을 동원하여 건설하기 시작하였으나 이 또한 갈리아 인들의 침입에 의해 중단된 후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가 마침내 1883~93에 프랑스 엔지니어회사에서 이 운하를 성공시킴으로써 세계 3대 운하 중의 하나를 만들어,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섬이 된 것입니다. 결국 2천 600여년 만에 처음의 계획이 이루어져 반도가 섬이 된 셈이지요.

이런 운하를 보기 위하여 신들의 도시, 철학의 도시, 민주주의의 모태인 아테네를 떠나서 고린도로 향하였습니다.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는 것이, 신탁도 받지 않고 떠나는 게 좀 언짢았나 봅니다. 그래도 우리는 "고린도로 가자!” 니까요. 이 말뜻의 속내를 눈치 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ㅋㅋ(다음 주에 소개 됩니다.)

가이드의 입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새에 벌써 1시간 남짓 달려온 모양입니다.

조금 앞에 보이는 다리로 가 보랍니다. 무엇이 보이는지…. 쇠로 만든 다리는 별 볼품이 없는데 막상 다리 위에 서니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동안 성경책 밑에 나오는 조그마한 사진으로만 보아 오던 고린도 운하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마치 두부를 반듯하게 자른 듯이 바위를 잘라 만든 고린도 운하로 때마침 배가 한 척 지나갑니다. 하늘이 개였더라면 조금 더 좋았을 것을…. 아쉬웠지만 그래도 눈으로 직접 보는 그 운하의 경관은 정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제가 서있는 다리에서부터 해수면까지의 깊이가 자그마치 86m나 되게 수직으로 깎아 내린 바윗돌이고, 해면으로부터 수심 깊이가 10m나 되며, 해수면의 폭이 22m요, 위로 올라오면서 점점 더 넓게 파여져서 크루즈도 다닐 수가 있다는 세계 3대 운하 중의 하나인 이 고린도 운하의 길이가 자그마치 6.8km라는데, 너무나 곧게 파여서인지 그 끝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양쪽의 수면 높이를 조절하기 위한 갑문도 보이지 않고, 그저 휑하니 뚫려 있는 물길이었습니다. 양쪽 끝 바다가 훤히 보이는 이 운하로 인해서 700km의 뱃길이 줄어들었으니 운하가 개통된 후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비가 절약되었는지 헤아리기가 힘겹습니다.

요즈음에는 젊은이들 사이에 Bungy Jumping 하기에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나서 배가 없을 때에는 이 곳에서 많이 뛰어내리기를 하기도 한답니다.

저~~~ 밑에 지나는 배 위에 탄, 조그마하게 보이는 사람이 더 작게 보이는 손을 흔들며 올려다 보기에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지요. 이제는 이 운하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으니까요.

 

고린도 유적지

운하를 지나서 옛 고린도 유적지로 향하였습니다. 고대 고린도가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 중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그리고 로마 시절에도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다는데 유적지가 아직 다 복원이 안되어서인지 Old Town에는 번듯한 유물도 유적도 별로 많지가 않았습니다.

고린도 전서를 통하여 나타난 그 시대의 퇴폐상은 그저 땅에 널려진 채 아직 복원이 안된, 부서진 돌 무더기를 보면서, 그리고 자그마한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을 보면서 유추해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원에는 목이 없는 많은 대리석상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목 없는 사열을 받게 하였습니다. 목이 없는 몸이라,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석신으로 사는 것이 편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2000년을 넘게 아직 서서 우리에게 사열을 베푸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일설에는 신상파괴운동이 휩쓸었던 서기 730년서부터 843년까지의 100년 동안에 목이 달아난 흔적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일설은 그 당시 이렇게 많은 몸통을 미리 만들어 놓은 후 구매자가 나타나 몸통을 고르면 그 위에 구매자의 두상을 만들어 붙여 주었다고도 하나 어느 게 진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진실을 이야기하여 줄 수 있는 입들이 지금은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실내 전시실로 들어서니 많은 조각들과 부서진 토기 그릇들이 진열되어 있는 중에 가장 눈을 끄는 것이 제법 잘 보존된 자그마한 스핑크스였습니다. 스핑크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이집트 기자의 대 스핑크스를 연상하며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으로 생각하나,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사악한 여성 괴물이었습니다. 상반신은 여자이고 하반신은 독수리 날개가 있는 사자로 모습은 비슷하나 그리스어 스핑크스(Σφ?γξ)는 ‘교살자’ 다시 말해 '목을 졸라 죽이는 자'라는 뜻이랍니다.

전설에 따르면 욕정 때문에 미소년을 범했던 그리스의 테베 왕 라이오스를 벌하기 위해 헤라가 이집트로부터 보낸 괴물이라고 합니다. 이 스핑크스는 길목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문제를 내는데, 맞추지 못 하면 잡아먹는 괴물로도 유명하였지요. (무슨 문제인지 모두들 잘 아실 것입니다. 네발, 두발, 세발)

이 스핑크스 때문에 이디프스 콤플렉스라는 말이 이 땅에 생겨나고, 이것이 아직도 건재하게 진열되고 있는 고린도이기에 고린도 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주의를 주도록 이 지역이 음행이 심했던 것일까요?

박물관을 나서니 뒤로 높게 솟은 산 위의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 터가 보였습니다. 산 위에는 남성을 유혹하는 여신들, 땅 아래에는 길목을 지키는 스핑크스!

어쩜 고린도와 잘 맞는 조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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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흔적을 찾아서(53)-아레오파고스(Areopagus)에 선 바울

 

파르테논을 둘러본 후 조금 내려오다가 만나는 좀 넓은 공터, 그 옛날 신들이 모여 변론하던 곳, 한참 뒤에는 바울이 변론하던 재판정, 아레오파고스에 들렸습니다.

지금은 그저 동판 하나가 큰 바위에 붙어있는 바위 언덕 위의 작은 공터에 불과하지만 그 옛날에는 바울의 생과 사가 결정지어 질 수도 있었던 그런 자리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이곳은 오늘날로 치면 대법원쯤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자신의 딸 알키페를 납치하려는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를 살해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포세이돈은 신들의 법정에 고발을 하고, 이에 신들은 아레스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아레오파고스(Areopagos)에 모였다고 합니다. 아레스는 이 곳에서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났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아레오파고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서 깊은 법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부터 디모데와 함께 시작된 사도 바울의 2차 여행에서 그들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할 때 이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고초를 겪은 후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 놓은 채 황망히 아덴으로 피신을 하여야만 하였었습니다.

아덴에서라고 가만이 있을 바울이 아니었지요.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는 내용이 사도행전 17:16-34까지 세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혈통으로 만드사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에 대하여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행 17:18~34)

이런 이유로 가이드는 사도행전 17장이 “아테네 서”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열심히 전도하던 그 때에 이렇게 따르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는데, 그렇다면 교회도 있었을 법한데 왜 그 교회 이야기는 성경에서 빠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감옥

언덕을 조금 더 내려오면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 이름 붙여진 바위가 있습니다.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깊이 파고 쇠 창살로 앞을 막은 것을 감옥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 못지 않게 달변에 웅변가였던, 그리고 요즈음 나훈아의 “테스형”으로 더 많이 뜨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좀 전에 들렸던 아레오파고스에서 재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 배심원 제도에 가까운 민중재판소가 운영되고 있었기에 극장에 모인 민중재판관들이 찬반 투표를 해서 투표수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리는 방식인데, 1차 변론에서 유죄, 무죄 사이의 표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소크라테스는 민중재판관들을 설득해 사형보다 가벼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이, 푼돈에 지나지 않는 금액을 벌금으로 내겠다면서 민중재판관들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것이 화근이 되어 사형 360표, 벌금형 140표란 압도적 차이로 사형을 확정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비하면 아레오파고스에서 변론한 바울은 훨씬 변론을 잘 한 것 같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한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을 하였다는 소크라테스.

죽으면서도 닭 한 마리 빚진 것을 갚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소크라테스.

그러면 그 빚진 닭을 갚아주는 사람에게 빚진 닭은 또 언제 어떻게 갚으려는지….

악처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고 전해지지만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크세노폰은 그의 저서에서 그녀의 기질이 불 같았다고 전하지만 그녀가 바가지 긁는 여자였다는 증거는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 말들이 전해졌을까요? 고등학교 때 들은 이야기 한 토막.

소크라테스에게 부인이 바가지를 한참 긁었다고 합니다. 하나 그저 못들은 체하며 문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부인이 물 바가지를 던졌다나요? 그러자 그가 “천둥이 치더니 드디어 소나기가 오는 구먼…”하고 나갔다고 합니다.

어찌나 재미있게 들었던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니 이 나이에 고착된 사고를 어찌하면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이행하기는 다 글렀지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법을 준수하라”는 말의 와전이었고, “너 자신을 알라”는 말 또한 그가 처음 지어낸 말이 아니라 아폴론 신전에 쓰여 있던 격언을 그가 자주 사용하였기에 그렇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 때의 “너”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니 결국 “나를 알라는 말” 이라고들 하네요.

그 옛날부터 아직까지 세상을 풍미(風靡)하는 두 사람의 선각자를 얼마 멀지 않은 자리에서 만나 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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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아크로폴리스 아테네(2) 부속 건축물들

 

에렉테이온( ?ρ?χθειον)

페리클레스가 세운 건설 계획 중 마지막 것으로, 독특한 구조로 지어진 이 신전은 아테나와 포세이돈, 그리고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인 에렉테우스를 함께 모시던 신전입니다. 특히 신전의 남쪽 벽면에 기둥 대신 서 있는 여섯 여인 석상의 아름다움 때문에 더욱 알려졌지요.

지금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상은 모두 모조품이며, 진품 중 다섯 개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마지막 하나는 영국 박물관에 있습니다.

올림포스의 두 신, 아테나와 포세이돈은 이 곳 아테네를 두고 아테네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을 주는 사람이 이 도시의 수호신이 되기로 서로 내기를 하였습니다.

아테나는 올리브 나무를,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은 우물을 주었는데, 그만 바닷물이 콸콸 나와서 결국 아테나의 승리였습니다. 그 때 심었다는 올리브 나무가 아직도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몇 안되는 언덕위의 나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바다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파했고, 해상 무역으로 먹고 살던 아테네 시민들이 포세이돈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었기에 두 신을 사이 좋게 에렉테이온에 같이 모셔졌다는 전설입니다.

 

 

 

 

아테나 니케 신전(Temple of Athena Nike)

아테나 니케 신전(Temple of Athena Nike)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승리의 여신 아테나를 모시던 신전이었습니다.

“니케(Nike)”는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주는 여신으로, 흔히 날개 달린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는 “아테나 니케”는 날개 달린 여신이 아니라 승리의 여신 역할을 하는 아데나를 가리키는 신이었기에 신전의 신상 안치실에 있었던 “아테나 니케”는 오른 손에는 다산의 상징인 석류 열매를, 왼손에는 전쟁의 상징인 투구가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신전을 만든 이유가 단지 승리에 대한 감사 뿐만이 아니라, 결실과 번영을 동시에 기원하기 위함 이었고, 그 승리와 번영이 영원히 아테네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날개를 달지 않았다는 설입니다.

18세기, 요새를 지을 석재를 구하려는 터키인들에 의해 허물어졌지만 나중에 파괴된 요새에서 돌을 가져와 다시 복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쓸 만한 사진도 찍어오지 못한 신전이 되었습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

파르테논 신전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아크로폴리스로 오르기 전 옆 길로 가면 BC161년에 세워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과, 거기서 조금 더 가면 기원전 4세기경에 지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려서 세운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습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은 원래 3층짜리 석조 벽과 목조지붕으로 이루어진, 수용인원 5,000명의 규모였으나, AD 267년에 전쟁으로 지붕은 없어지고 지금은 석조 벽 건물과, 원형으로 복원된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현존하는 고대 극장 중 가장 아름다운 극장으로 사랑받고 있는 곳입니다.

매년 여름 밤이면 이 곳에서 콘서트, 오페라, 그리스 고전극들이 공연이 되는데 출연자들이 대부분 세계적인 명사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휘자 정명훈과 성악가 조수미도 이 무대에서 공연을 하였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 극장

기원전 4세기경에 지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기려서 세운 디오니소스 극장.

이 유적은 1700년대에야 발견되어 19세기에 대부분 발굴되었으나 아직 복원이 되기는 요원한 것 같습니다. 객석 수용인원이 1만7000명이나 되는 큰 야외극장이나, 어느 거리에서나 완벽한 시야와 정확한 음향을 들을 수가 있게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후일, 로마의 유적지 여러 곳에서 보게 된 원형극장에서 보는 설계가 결국 그리스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활약하던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에 대한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그가 어느 날 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며 대장간 근처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늘 듣던 평범한 망치질 소리가 그날, 그의 귀에는 경이로운 수학적 질서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망치 무게의 비율이 2:1인 망치를 함께 두드리면 높이만 다른 동일한 소리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현재 옥타브라고 부르는 것이, 주파수가 두 배 차이가 나는 두 음 사이의 음정을 말하는 것처럼, 무게 사이의 특정한 정수비에 따라 소리들이 어울리는 정도가 달라지며, 듣기 좋은 소리가 있고, 귀를 막고 싶은 소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우리의 귀에 편안하게 들리는 소리를 우리는 협화음, 불편하게 들린다면 불협화음이라고 하는데, 이건 일종의 수학적 질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협화음을 만들어 내기 위해 진동하는 현의 길이를 2:1, 3:2, 4:3의 비로 맞추었는데, 마침 여기 사용되는 숫자들의 합이 10이다 보니 무언가 깔끔한 느낌을 주었기에 비율이 3:2이면 완전5도라는 음정으로, 같은 비율로 계속 쌓아 놓은 것을 ‘피타고라스 음률’이라고 부릅니다.

그 때에 벌써 소리가 전달되는 원리가 체계적으로 정립되면서, 야외극장의 설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학과 음악, 그리고 음향은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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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0
흔적을 찾아서(51)-아크로폴리스 아테네(Acropolis of Athens)(1)-파르테논

 

도시국가,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아크로폴리스.

그리스어 단어 ?κρον (아크론, "아주 높은, 최상의")과 π?λις (폴리스, "도시")에서 온 아크로폴리스에는 뒤에 도시 이름을 붙여 그 지역을 나타내었으나, 성채이자 건축학적, 미학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대 건축물들의 유적지가 있는 아테네가 가장 유명하여, 이제는 “아크로폴리스”하면 으레 유네스코(UNESCO)의 로고로 사용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아크로폴리스의 전체 면적은 170×350m로, 1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습니다마는 건축이나 고고학에, 그리고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년이 걸려도 부족할 만큼 무궁무진한 이야기거리들이 있는 156m 높이의 바위투성이 산, 정상인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믿는 신의 성령이 남긴 자취를 찾아 떠나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의 초입이 아테네이고 보니, 이네들의 신의 세계를 잠시 둘러보는 것도 필요한 일정일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이 곳에서 변론하였다는 기록도 있기에 점심 후 제일 먼저 찾아보았습니다.

국민학교 때, 아니 요즈음 말로 하면 초등학교라고 하여야 하나요? 공책 표지에서 보았던 멋있는 돌집의 그림을 보곤 막연히 동경하며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라고 바라던 곳이기도 하였었으니까요.

오늘날 그리스를 찾는 여행자들은 모두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사람들이 열지여 오르고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오르면 제일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웅장한 자태를 보수하기 위해 세워 놓은 철골에 싸인 채 우뚝 서 있는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입니다.

학설에 따르면, '파르테논'이란 이름은 "처녀 여신의 신전"을 뜻하며, 아테나 파르테노스 숭배 의식이 이 신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시 그 기원이 불명확한 '파르테노스'(παρθ?νος)란 별칭은 "처녀,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뜻하며, 특히 야생 동물과 사냥, 식물의 여신인 아르테미스, 전쟁, 수공예 그리고 실용적인 것의 여신인 아테나를 이를 때 쓰는 말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우리 식의 표현으로 아테나의 호(號)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결국 고대 아테나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신전입니다.

원래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은 기원전 3,000년 경인 미케네 시대에 만들어 졌으나 그때의 신전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것을 BC 447년, 델로스 동맹(페르시아의 재습격에 대비할 것을 명분으로 하여 BC 477년, 아테네를 맹주로 이오니아나 아이올리스 그리고 에게 해의 여러 섬에 있는 폴리스가 가맹하여 결성된 동맹으로 제1회 아테네 해상 동맹)의 위상이 가장 강성했을 때,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페리클리스(고대 그리스어: Περικλ?ς)에 의해 재건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괴롭히던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고 동맹까지 맺은 아테네는 그 어느 시대 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번성을 구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페리클리스는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던 피디아스(Phidias)를 시켜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에렉테이온” 프로펠러야” 아테나 니케 신전”등 많은 건축물을 이 언덕위에 세웠습니다.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BC 447~432년 사이에 만들어진 파르테논 신전은 웅장함 보다는 그 뛰어난 미술성과 또 고대의 건축술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된 것 같습니다.

시인 바이런은 "오! 파르테논이여, 세계의 자랑이여, 너의 발 밑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나라는 굴에 갇힌 사자처럼 누워있다"라고 파르테논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지만, 아마도 파르테논에 대한 관심없이, 무심코 신전을 찾는 사람들은 어쩌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복원을 하느라 철골에 둘러싸여 있는 몰골은 거저 부서진 건축물 중의 하나일 뿐이니까요.

도시의 수호신인 아테나 파르테노스(Athena Parthenos)에 바쳐진 이 신전은 도리아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로, 전체 크기는 가로 31m, 세로 70m이며, 기둥 하나의 높이가 10.433m에 달하는 46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건축은 익티누스( Ictinos)와 칼리크라테스(Calicrates)가 그리고 조각은 피디아스가 담당한 신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벽면 조각의 아름다움에 있었다고 합니다.

신전의 박공에는 신화에 나오는 반인 반수(켄타우로스족)의 괴물과 인간과의 싸움, 그리스인과 전설 속의 여전사들인 아마존인들과의 싸움, 트로이의 함락 등이 그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파손되었으며, 상당 부분은 대영박물관의 8전시실에 “엘긴 마블(Elgin Marbles)”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영국과 그리스의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이 소장품을 두고도 많은 일화들이 있지요.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는 피디아스에 의해 완성된 아테나 여신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청동으로 된 몸체에 팔과 얼굴은 상아로, 중앙에 스핑크스 상이 새겨진 헬멧과 의상, 그리고 손에 든 방패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은 당시 가장 아름다운 조각 중 하나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주 과학적으로 설계된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눈에서 발생하는 착시 현상을 보정하기 위해 기둥의 배흘림 처리를 비롯해 다양한 시각 조정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배흘림기둥은 원기둥 중 기둥의 허리부분을 가장 지름이 크게 하고 기둥 머리와 기둥 뿌리로 갈수록 줄인 항아리 모양의 기둥으로, 그리스 석조건축의 중요한 특징을 말합니다. 한국의 고려시대 건축물인 부석사의 무량수전의 기둥도 이 방식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서양권에선 엔타시스(entasis)라고 합니다.)

또한 기둥의 뒤가 외벽으로 막혀 있는 경우와 트여 있는 경우에 발생하는 기둥 간격의 착각을 고려하였다고 하니, 이들은 단순한 수치적 간격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착시 현상을 감안해서 균등한 간격을 느낄 수 있게 간격을 조절하였던 것입니다.

건물에 안정감을 주기 위해 양측 모서리 기둥을 약간씩 안쪽으로 기울이는 안쏠림 기법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둥이 서있는 구도도 곧은 수직이 아니라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해 안쪽으로 7cm정도 기울어져 있어, 기둥의 중심선을 연결해보면 4.5km의 상공에서 한 꼭지점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는 지붕의 무게와 바람의 세기와 지진을 견디기 위한 계산에 의해 설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그 당시의 기술입니까!

그래서 2000년을 넘게 자태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서 있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점령 시, 오스만 터키군의 화약고로 사용되던 중, 1687년 베네치아군의 직격탄에 맞아 폭파되는 바람에 크게 파손된 후, 수많은 조각들이 도난 당하고, 또 외국으로 반출된 후에야 경비를 강화한 후,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언제쯤 그 작업이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온전히 복원된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는지….

(피타고라스가 활약한 때는 기원전 6세기의 고대 그리스 시대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직각 삼각형의 성질을 비롯해 모든 것의 배후에 ‘수의 질서’가 숨어있다고 생각하고 ‘만물은 수’라고 주장하며 ‘수’를 숭배하는 종교로서 피타고라스 학파를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에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이미 발견해 사용했다고도 합니다. 수학과 과학이 응용된 옛 건축술이 놀랍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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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흔적을 찾아서(50)-신들의 도시 아테네

 

신약성경을 보면 4복음서에 이어 “사도행전”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본래 “누가복음”과 함께 두 권으로 된 하나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누가복음”이라고 하면 이 두 권을 모두 가리켰으나 AD 2세기에 이 두 권을 분리하여 독립된 책으로 구성하면서 후반부의 책을 그 내용에 따라 사도행전(The Acts of Apostles)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바울의 동료였던 누가가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해서 AD 61~62년 사이에 이 책을 기록했다고 전승되며, 이에 대한 이론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입니다.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오순절 성령 강림부터 사도들에 의한 교회(敎會, Church)의 태동 및 초기 발전사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며 남기신 약속에 따라 오순절 강림하신 성령의 역사에 힘입은 사도들에 의하여, 신약 교회가 태동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의 기록이기에 이름을 “성령행전”으로 하자는 이야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전반부의 몇 장은 다른 사람이 먼저 기록한 문서를 인용하였던지 아니면 바울로부터 들은 정보들을 참고하였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총 28장의 사도행전 중 제13-28장 사이의 후반부는 사도 바울의 도합 3회에 걸친 선교 여행(Missionary Journey) 및 로마 압송 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특히 16장에서부터는 사도 바울 한 사람의 이방 선교 사역 중심으로, 유대사람들이 배척한 복음을 이방인들이 받아들이는 과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일 바울이 로마서 15장 23절에서 밝힌 것을 보면, 그 당시의 땅 끝인 서바나로 선교를 떠나려 계획하였으나 사도행전 16장 9절에 기록된 대로 밤에 환상으로 보여준 유럽으로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서의 선교가 시작되며, 17장에서는 바울의 “아덴”에서의 일들이 기록되었기에 아테네를 보여주는 가이드들은 사도행전이 “아테네 서”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고 설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침 찾아 떠나는 “성령의 흔적들”의 시발점이 그리스의 아테네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신약 성경들”의 대부분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작하여 동쪽, 소 아시아에 이르는 지역들이니, 그 당시의 신들의 도시, “아덴”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해박한 지식에 성령의 은사까지 받은 달변가, 바울조차 “아덴”에서는 결국 교회를 세우지 못하였으니, 도대체 그네들이 믿는 신이 어떤 신인지를 피상적으로나마 살펴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성령의 흐름을 눈에 보이는 유적들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들을 찾아 나선 이 여로는 우리 모두에게 신약 성경의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그 당시의 오늘을 회상하면서,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믿음의 훈련 여정이 되리라 믿는 일행들이 함께 떠난 길인 것이기에,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Toronto에서 차고 온 시계는 한 밤중인 새벽 영시 30분인데, 불란서 파리의 넓은 비행장에는 햇빛이 찬란하였습니다. 벌써 신화 속으로 들어왔나 봅니다. 하기야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트로이의 왕자 이름을 따서 “파리스”라고 이름 지어진 도시이고 보면, 신화의 나라 속으로 한걸음 성큼 다가선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비행장에서 경유만 하면 되는데 입국 수속을 하라고 하네요. 하라면 해야 지요. 작년의 이스라엘처럼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많다 보니 다음 비행기 탈 시간이 급한데….

“우리를 남겨 놓고 떠나지는 않겠지” 라고 자위하며 긴 줄을 기다려 수속을 마치고 탑승할 개찰구로 가는데, 비행장은 왜 그리도 큰지요….

파리발 1시 30분, 에어버스 320에 자리를 잡으니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미로에서 탈출하는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처럼 그 신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하늘 높이 나르며, 반짝이는 은빛 날개는 다행히도 밀랍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햇빛 찬란한 새벽 5시, 비행기에서 내리니 지중해의 따사한 정오의 햇살이 우리들을 반겨 주었습니다.

그동안 시간이 벌써 두 번 바뀌어, 현지 시간으로는 아침 12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제대로 그 신화의 나라에 들어온 모양입니다.

벼르고 별러서 떠나 온 2차 순례여로의 시발점인 아테네. 공항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들어서는 도시, 아테네는 그 오랜 역사의 풍우 속에 고색창연한 것이 아니라 하얀 집들로 깨끗이 정돈된 산뜻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아테네의 역사는 전 유럽,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도시 중에서도 단연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에 하나이지요.

적어도 기원전 3,000년 전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는데, 기원전 천 년에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은 후 기원전 5세기에 이르도록 발달시킨 아테네의 문화 유산은 그 후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그 영토가 동쪽으로는 인도에까지 넓어 지며 헬레네문화를 펼쳐 놓았으나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 내용으로 그가 죽자 나라가 나뉘어지다가, BC 168년, 근 50년 동안 계속된 마케도니아 전쟁을 통해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제국에 완전 정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문화적으로는 로마를 정복해서, 그리스의 신화가 고스란히 로마의 신화로 계승 발전되며, 그 로마가 닦아 놓은 길을 통해 찬란한 헬레네의 문화를 온 세상에 전파한 그리스의 아테네!

이렇듯 역사가 길다 보니 고대의 사람들이 다 그러하였듯이 많은 신들을 섬기며 살아온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에도 그리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리스 신화”가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하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테네의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이요,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이 지금도 매 4년마다 한번씩 떠들썩하게 열리는 올림픽일 것입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남작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한 끝에 1894년 국제올림픽협회가 창립되었으며, 2년 후 1896년 4월 6일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제1회 현대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총 16개 국가가 참가하였으며, 전체 참가 선수는 295명이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회에 참가 등록된 국가는 202개국, 총 선수 10,500명과 비교해 본다면 약 110년 남짓 후의 올림픽의 규모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놀라게 됩니다.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커졌다는 증거이겠지요. 그래서 2004년에 아테네에서 열린 현대 올림픽은 이곳에서 개막할 수가 없어 새로 지은 올림픽 경기장에서 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양궁을 비롯한 몇 가지 종목이 열렸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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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6
흔적을 찾아서(49)-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어디였을까?

 

중동 국가이면서도 인접한 요르단과 마찬가지로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이스라엘!

그래서 한 때에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캐나다(Canada)로 가라는 말을 잘못 듣고 가나안으로 갔다는 부흥사들의 우스개 멘트도 유행하였었습니다마는, 2004년 5월 4일, 이스라엘 사상 최대 규모의 유전이 발견됐다고 현지 언론이 흥분하며 발표하였습니다. 현대 문명과 산업에서의 젖과 꿀은 바로 석유와 가스라고 할 수 있으니 늦게나마 틀린 예언은 아닌 셈이 되었지요.

한창 중동 전쟁으로 인한 오일쇼크 당시에는 이스라엘인 스스로도 “모세가 석유가 흐르는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라고 자조적인 농담을 했고, 이스라엘의 유명한 풍자 작가인 에프라임 키숀(Ephraim Kishon1924-2005)은 이름부터가 "모세야, 석유가 안 나오느냐?"라는 유모어 작품집을 출판하기도 하였었습니다.

사실 석유 이야기를 제외하고 구약 시대 기준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요충지이며 경제적으로 상당히 기름진 땅입니다.

민수기 13장에서 모세는 12지파에서 한 사람씩 선출하여 가나안 땅을 탐지하여 오라고 보냅니다.

그들은 에스겔 골짜기에 이르러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도 취한 후 돌아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기는 한데 그곳 사람들은 매우 강하고, 도시들은 성벽이 아주 높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요, 거인족 아낙 자손들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보고를 합니다.

이 보고를 보면 분명 그 때의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었나 봅니다. 그런데 왜 500년 즈음 전에 아브라함은 그 곳에 살다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돌아오고, 그의 후손들 또한 기근으로 애굽에 갔다가 400여년이나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을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디였었는가를 찾기 위한 노력은 오랫동안 많은 석학들에 의해서 진행 되었었습니다. 독일학자인 벤징거(Benzinger)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리스의 신화적인 배경에서 신들의 음식인 젖과 꿀의 땅’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벤징거는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이 믿던 신들의 땅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요 랍비인 모쉐 데이빗 카수토(Moshe David Cassuto)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광야에 살았던 유목민들이 가나안 땅을 가리켜 처음 사용했던 표현으로, 그 의미는 목축을 통해서는 젖을, 그리고 농업을 통한 각종 농작물로부터 벌의 꿀처럼 많은 실과를 거둘 수 있는 배경에서 이해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의 역사 지리학자인 데니스 발리(Denis Baly)는 이 표현을 광야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나안 땅이 꼭 비옥하다는 의미가 아닌 광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괜찮은 땅’이란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많은 학자들은 에덴동산이 어디였는가를 탐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에덴이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 ‘헤덴(Heden)’에서 유래한 히브리어로 ‘환희의 동산’, ‘태고의 정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수메르어의 에디누(edinu: 평지, 황무지)에서 유래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땅에 둘렸으며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0~14). 즉 네 줄기의 강(피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과 근처의 세 지역(하윌라, 에티오피아, 아시리아)을 언급하면서 에덴의 지리적 위치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한 곳으로 비옥한 토지를 가진 지경이었습니다.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유물들은 모두 이 지역, 사막의 모래 속에서 발굴되었는데…. 물이 귀한 사막에서 그런 유물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만큼 풍요로운 삶을 살 수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오랜 세월 전에는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의 지구 자전축은 공전 궤도면의 수직면에서 약 23.5도에서 기울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 4만 1,000년을 주기로 21.5도에서 24.5도 사이에서 변한다고 합니다. 자전축의 기울기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지요.

이렇게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는 것은 지구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른 행성 들도 자전축이 조금씩 기울어져 있는데, 천왕성의 경우에는 거의 90도나 기울어져 있다고 합니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이렇게 조금씩 기울어진 채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을 하며 또 자전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기울기에 따라서 기후의 혹심한 변화가 온다고 합니다.

석유는 탄수화물의 액체형 혼합물로서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까지 지질시대의 동식물이 퇴적하여 지압, 지열로 말미암아 변화했다고 하는 생물기원설이 가장 유력한 학설로 인정받고 있는 것을 대입하여 보면, 지금은 사막이 된 중동지방에서 석유가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이 그 어느 옛날에는 수목이 우거지고 수많은 동물들이 살던 지역이었다고 추론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최소한 노아의 시대 까지만 하여도 이 지방에는 수목이 울창하였었던 것 같습니다. 노아가 그 큰 방주를 나무로 만들고 가족 8명과 수많은 동물들을 태우고 40여일 지구를 덮은 바다 위를 유유히 유람(?) 할 수 있었으니까요.

요즈음 환경문제를 외치며 석유 연료에서 나오는 대기 오염이 세계 기후를 바꾼다는 학설을 주장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외치는 단체들이 과연 얼마만큼 진실인지, 아니면 진실로 위장된 음모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지축이 그 각도를 변하고 있다는 학설도 얼마만큼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도 많은 설들이니까요.

그러나 화석으로 본 지구의 과거에는 빙하기도 있었고 해빙기도 있었으며 그 사이에 수많은 지각변동과 또 동식물들의 삶에 변화가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기는 합니다.

어차피 지금은 찾을 수도 없고, 또 그러니 가볼 수도 없는 낙원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보면, 결국 그것을 잃어버리는 실낙원도, 또 그 곳을 찾을 수 있는 복락원도 결국은 다 100년도 못사는 우리들이 살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우리들 마음 속에, 마음먹기 나름이 아닐까요?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었으나 이제는 황량한 사막과 메마른 산들, 그리고 와디로 점철된 중동지방을 떠나서 지중해의 북동쪽, 사도 바울이 선교 여정을 다니며 그가 남긴 교회의 자취들을 둘러보러 떠날 때가 되었나 봅니다.

다른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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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흔적을 찾아서(48)-짠물 앞에 끊어진 단물의 수로

 

가이사랴 항구에서 조금 북상하여 올라가면 해변을 따라 끝이 안 보이도록 지어진 수로가 있습니다. 그 옛날, 로마가 이 지역을 관할하며 번영을 구가하던 시절에는 헬몬 산에서부터 이곳까지 물을 대어 주노라 마를 틈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말라 부서진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수로! 그 길이와 위용을 보니 입이 떡 벌어집니다.

어떻게 그 옛날에 이렇게 대단한 수로를 단지 경사만을 이용하여 그 먼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물을 보내오게 할 수가 있었을까요? (하긴…. 후일, 유럽을 다니다 보면 이 정도는 그리 놀랄만한 규모도 아니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서 삶을 영위하였고, 이 물을 이용하여 목욕문화 속에 향락을 누려 깊이 빠지다 보니 결국은 제국의 멸망에로 이르게 한 수로.

그 대단한 위용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느껴지는 아이러니! 바로 그 수로 옆에 그득히 찰랑대는 바닷물을 보면서도 먹을 수 있는 물을 위해 이렇게 큰 공사를 하여야만 하는 우리의 육신의 한계가 새삼스럽습니다.

로마 제국이 그 세력을 세계로 넓혀 가면서 제일 먼저 건설하는 것이 도로와 수로, 그리고 원형극장과 목욕탕이었습니다. 그들의 권력 승계는 대부분 권모술수와 음모, 암살과 투쟁이 커진 전쟁 후에 얻은 힘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정통성을 명분으로 국민들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벌써 그 때부터 3S로 국민들의 이목을 돌리는 방법을 잘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요즈음 민중의 이목을 돌리는 방법으로 "3S방법", 즉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라마다 프로 구단을 만들어서 국민들을 편을 갈라 열광케 하고, 저녁에 TV를 켜면 나오는 드라마는 수위를 넘나드는 불륜과 성애묘사, 그리고 두려우리만큼 잔인한 폭력으로 흥미를 끌다 보니, 사회가 불륜을 당연시하게 되고, 또 폭력이 지나치게 난폭해지는 사태에 이르게 되고, 호화 목욕탕과 유흥주점이 길가에 즐비하다 보니 스스로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수많은 졸부들의 등장 속에, 정부는 정부대로 자신들의 권력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법들을 만들어 놓는 악순환의 연속!

그러다가 또 새로 머리를 드는 세력에 꺾이는 것이 역사상 이어져 온 일들이었으니까요. 스크린이 없었던 옛날에는 Live Show를 하였다는 기록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더 자극적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 드는 관객이 5만여 명이나 되었다니까요!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부가 가이사랴에 있고 보니 이 곳에도 원형극장과 전차경기장, 목욕탕이 필요하였고, 그 많은 인구의 해갈을 위해서 수로 또한 필요하였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지척에서 출렁이는 파란 바닷물을 보며 목말라 하는 부서진 수로를 보는 아픔이 참 미묘하여 집니다. 물은 물이로되 먹을 수 있는 물과, 먹을 수 없는 물이 있음을 보면서 신은 신이로되 믿을 수 있는 신과 믿을 수 없는 신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살아가노라면 세상에는 신이라고 믿으며 그 권력에 복종하라고 강요하는, 믿을 수 없는 신이, 믿을 수 있는 신보다는 엄청 많이, 엄청 오랫동안 존재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습니다.

먹을 수 있는 단물을 얻기 위해서는 그 먼 헬몬 산에서 이곳까지 쉼 없이 흐르도록 수로를 건설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믿을 수 있는 신을 믿기 위해서도 이렇게 힘들여 수로를 건설해야 하듯, 쉼 없는 노력 또한 지극하여야 하리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잘라진 단면의 모습이 마치 누군가는 누구의 수고로 쉽게 입만 가져다 대면 쉬 마실 수 있는 물이라 하더라도, 그 물이 그 곳에 있게 하기 위하여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노력과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웅변하는 입 모양 같이만 느껴 졌습니다.

그 당시라고 왜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그냥 바닷물을 마시고 말지, 뭐하러 이렇게 힘들여 수로를 건설하는가?"라고요. 마치 요즈음 제 교회들에서 "거저 쉽게 편하게 믿고 말지, 왜 그렇게 힘들여 극성을 떨며 믿어야 하느냐? 하나님만이 신이 아닌데…"라고 유혹하듯이 말입니다.

기독교의 종주국이라고 하는 바티칸에서도 다원주의를 표방하며 다른 종교들과도 연합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보면 아무 지식도 없고 별 믿음도 없는 우리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야 할지를 점점 더 헷갈리게 하는 혼돈된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믿는 믿음이 틀렸다고 나무랄 만한 지식이나 신앙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에도 그 나름 대로의 경의를 가지고는 있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과 그들이 믿는 다른 신들을 혼합하려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려는 사람들을 흔드는 그 주장이 싫은 것입니다.

물이야 한 모금 마셔보고 뱉으면 기껏해야 설사 몇 번하고 말겠지만, 한번 밖에 없는 삶을 놓고도 “이 신도 좋고, 저 신도 좋고….” 이런 도박을 할 수가 있을까요?

아니면 어느 신이 진정한 신인지를 모르기에 이 신, 저 신, 보험을 드는 것일까요?

“나는 지금 어떤 물을 마시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마실 수 있는 물에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가 있다고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예수님은 지금쯤 어디에 와 계실까요?

다시 한 번 지중해의 바다와 지금은 말라버린 수로를 바라보며 버스에 올랐습니다. 이제 짠물의 땅을 떠날 때가 되었나 봅니다. 그동안 보아온 수많은 흔적들이 뇌리에 남긴 잔영을 오래오래 간직하며 반추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눈으로 보아온 많은 것들은 마치 성황당에 있는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것도 많았지만, 그 안에도 무언가 숨은 뜻이 분명 있을 것만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순례자들이 그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순례를 다녀갔고, 또 앞으로도 다녀갈 것입니다.

앞으로 찾아갈 신약 시대의 흔적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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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2
흔적을 찾아서(47)-짠물이 단물 되는 시발점 가이사랴(Caesarea Maritima) 항구

 

파란 지중해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포말을 이루고, 그 포말마다에 부서지는 찬란한 햇빛. 하늘과 바다와 땅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지중해변의 고도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도시 이름이 ‘가이사랴’인 것은 Caesarea, 즉 가이사(Caesar), ‘로마황제에게 바친 도시’라는 뜻으로, 바다 건너 저 편에 앉아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의 권력층에 상납하며 자신의 부귀영화를 보장받고자 했던 헤롯의 뇌물성 작품입니다.

그러니 잘 지어지고 정비된 항구 도시이자, 유대 지방을 관할하는 로마 총독부가 있었던 곳. 그래서 많은 교역이 이루어지고, 많은 여행객들을 더 큰 세상으로 옮겨 주던 항구 도시였기에 그 옛날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면서 배에 실렸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정립된 “여호와, 야훼”을 믿는 구약 세계, 유대 땅에서의 신앙에서, 사랑과 성령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며, 부활을 믿는 신약 세상의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세계를 향하여 땅 끝까지 나가는 시발점이 된 가이사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땅 끝은 지중해의 서쪽 끝에 서있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열고 있는 좁은 해협, 지브롤터로, 지중해가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곳에서 지중해 너머를 바라 보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가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었으나 결국 그 중간지점인 로마에서 그 여정을 마치게 되었던 것이지요. (롬 15:23)

그러나 그의 마지막 선교지로, 선교사가 아니라 죄수의 신분으로 떠나던 항구였지만 결국 그의 바램 대로 세계로 뻗어 있던 로마 제국의 길을 따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된 바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유대 땅을 떠나 머나먼 서쪽 땅, 바로 로마 제국의 속주인 이스파니아(현재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포교하려고 선교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자로 만든 사람의 수는 극히 적었다고 합니다. 이에 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후 헤롯왕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되어 최초로 순교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헤롯왕에 의해 처형된 야고보는 제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돌로 만든 배에 실려 스페인 북서쪽으로 향해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후 기독교도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자 이 전승을 통하여 성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 성자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당시 갈리시아는 레꽁끼스따(Reconquista; 718년부터 1492년까지,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을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 스페인어로 ‘재정복’이라는 말)의 열기가 고양되던 곳이어서, 성 야고보의 전설은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언제나 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9세기부터 가톨릭에서는 이슬람 침략에 대항하는 방법의 하나이자 북부 스페인 사람들이 이교도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순례를 장려했습니다. 이 길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는 스페인에서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산티아고(야고보) 순례길(El Camino de Santiago)인 된 것입니다. 야고보를 스페인어 권에서는 산티아고(Santiago)로 부르지요.

동방의 자그마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서방의 큰 나라에 와서 살면서 그 종교를 믿으며 살던 사람이 이제 그 서방전도의 시발점이 되었던 지중해변의 도시 가이사랴에 서서 저 멀리 큰 바다 너머에 있는 로마를 바라보며 폐허를 거니는 감회를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유대나라와 로마제국의 모든 영화는 이렇게 폐허가 되어 관광객을 부르고, 그 권력의 정점에 서서 "조금 더…"를 바라던 욕심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후세들의 이야깃거리 밖에는 안 되는데….

이럴 때 언어의 마술사가 되지 못함이 후회를 키우기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4-25)"

 

폐허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매년 이스라엘 음악제 등에 훌륭하게 사용되는 야외극장의 음향 전달은 대단하였습니다. 그 무대에 올라서서 아주 투명하도록 강렬한 태양의 조명을 받으며 노래를 하는 순례자들의 음향이 아주 청아하게 멀리 객석에까지 들려왔습니다. 바다가 조금 더 저 편에서 파도를 치는데도 파도 소리는 안 들리고·····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을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발에 차이는 것마다 다 유적이요 유물들입니다. 그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장인정신, 예술성!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혼은 살아서 우리를 부르며 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오늘의 우린 과연 앞으로 2000년 후의 우리 후손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발달된 문명의 이기들? 컴퓨터나 자동차들? 부서지고 녹슨 이런 것들의 잔해를 보면서 우리의 후손들은 무어라고 말 할까요? 그 옛날의 권력에 동원된 노예들의 삶이 불쌍하다고요? 글쎄요.

그네들에겐 이런 장인정신의 발휘가 생업이었을 테고, 오늘의 우리 또한 생업을 위해서 건설을 하는 것인데 그 근본이 뭐가 다르겠습니까!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십자군 전쟁의 상흔을 보면서 거니는 감회는 두고두고 나의 마음속에 남을 것 같았습니다.

종교와 예술과 전쟁의 승리와 패배 속에 교차되는 희열과 참담함. 그 모두가 결국은 조금 더 잘 살아보자는 살아생전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일진대, 그 유한한 삶의 후에 오는 영원한 삶은 과연 어떠할까요?

그 죽음 후에 있을 영원한 삶을 위해서 유한한 삶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삶의 투쟁! 승리하기 위한 노력을 위해서 끌어 들이는 수단이 어려서는 공부와 젊어서의 노력과 나이 들어 찾는 단물 같은 참 믿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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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흔적을 찾아서(46)-마가의 다락방(Cenacle 혹은 Upper Room)

 

오늘날 교회의 모체로 불리는 “마가의 다락방!”. 3년의 공생애 기간 중에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던 “마가의 다락방”은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하는 물음에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막 14: 12~16) 하신 예수의 말씀에 처음 등장하게 됩니다.

아직 한번도 거론된 적이 없던 그 집,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을 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앞서 떠나는 두 제자는 아마도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얼핏 아주 오래 전,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고 종을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나홀의 성으로 보내었을 때, 그 종이 “내 주인 아브라함에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제 이 성 사람들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제가 여기 우물 곁에 서 있다가 그 가운데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라’하고 말하겠사오니,(창 24:13~14)”라는 대목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아마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예표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예비된 큰 다락방”을 가진 주인이 “마가 요한”이라는 청소년의 어머니로, 구브로 섬에서 온 마리아인 것은 한참 뒤에야 알게 되는 일입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 기록된 것을 보면 “마가 요한”이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하였으니, 그 모친은 구브로 섬 출신의 자산가인 레위인, 바나바와 오누이 관계로,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상당한 재산가였기에 한꺼번에 어른 120명 이상이 들어가는 다락방이 있는 저택을 갖고 있을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 보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는 좀

특이한 기록이 나옵니다.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 만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경험은 당사자의 뇌리에는 평생 기억되는 일이겠지만, 만일 벗은 몸을 한 이 청년이 마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구지 이런 일을 복음서 가운데 삽입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베 홑이불은 세마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고가의 물품이었기에, 부유한 집이 아니고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비롯 일반 서민들이 이것을 이불로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기에 당시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부를 누렸던 청소년, 마가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의 큰 명절인 유월절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기 집 다락방에 들어, 아주 이상스러운 방법으로 유월절 만찬을 하는 모습을, 아마도 신기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청소년이었을 것입니다.

만찬 후 겟세마네동산으로 간다는 그네들을 호기심으로 베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뒤따라 갔었겠지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잡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놀란 나머지 홑이불을 던져 두고 뛰어 도망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마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인물이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후로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유추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차여차하여 예수님은 돌아 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었습니다. 예수의 부활(Resurrection of Jesus, 復活)은 안식일 전날(현재의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안식일 다음날(현재의 일요일)에 무덤에서 되살아 난 일을 말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신앙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인간이 죽음에서 되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 영생을 이루신 하느님이자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나아가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의 구원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곧바로 하늘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40일 동안 이 땅에 더 머물러 계시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 1:3)

성경에는 이 기간 동안 11번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후 감람산 정상에서 여러 제자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승천하시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

이 후 10일만에 한 분이셨던 몸으로 온 세상에 나타나실 수가 없기에 성령으로 다시 나타나심을 보여주신 일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시온 문으로 빠져나가 약 100m 쯤 걸어가면 2층 석조 건물이 나오는데, 1층에 있는 다윗왕의 가묘를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면 “마가의 다락방”을 보게 됩니다.

다윗왕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지가 않았기에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인, 1176년에 “다윗왕의 가묘(Tomb of King David)”를 아래층에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 묘는 기념 묘로서, 유태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이 문에 붙어있습니다.

AD 70년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도 이 건물은 피해를 입지 않았었다고 하는데, 614년에 페르시아군에 의해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1176년, 십자군에 의해 복원된 후 1333년부터 1552년까지 프란체스칸 수도회에서 관리하다가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통치할 시절에 건물 윗부분이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된 것이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마가의 다락방인 것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다시 로마 카톨릭의 소유로 돌아갔습니다.

로마네스크식 건축물인 다락방 내부는 방 가운데 3개의 기둥들이 주위 벽에 서 있는 기둥들과 곡선으로 연결되어 아취를 이루며 천정을 받치고 있습니다.

이태리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Santa Maria delle Grazie)” 식당 벽에 그린 명화 '최후의 만찬'은 이곳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모습을 상상하여 그렸지만, 예수님 당시의 풍습을 고증할 만한 위치에 있을 수가 없었으니, 중세 시대의 식탁 모양대로 테이블을 놓고 모델을 배열하면서 그리게 된 것 같습니다.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 서유럽 대가리 31번 할례 받지않은 다윗상을 참조하세요. https://blog.daum.net/chunchunhi-c/8544060?category=1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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