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

 

 

      

(지난 호에 이어)


2. 자신에게 위로의 말로 격려하라- “정말 고생 많았네”


조금 쑥스럽기도 하겠지만 한번쯤 거울에 비쳐진 피곤한 자기 얼굴 어루만지며 스스로에게 위로 하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수고 많다”. 만일 이곳이 한국이라면 몇 번이라도 벗이나, 지인들과 만나 차나 술 마시며 쌓인 울분을 삭히는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어쩌면 한번도 진심을 담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시간과 상대도 없이 수 많은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외로이 홀로 가슴 안으로만 눈물 흘렸던 많은 날들은 마음 한구석 생채기로 남아, 혼자만의 가슴앓이로 살아가는 것이 이민자들의 실제 모습이 아닐는지… 
본의 아니게 힘든 이민자의 현실을 고백한 느낌이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인생 통틀어, 가장 외롭고 힘든 때가 언제였던가? 한국에 있을 때, 언제 그런 때가 있기라도 했던 것인가? 하고 생각 해보면, 군에서 혹독한 기합이나 훈련 받을 때, 밀려오는 설움 땜에 부모님의 따뜻한 그리움으로 눈물 글썽였던 기억이 나는데, 그와 비슷하거나 어쩜 더 외롭고 힘들게 느꼈던 시간이 이민 1-2년 차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모든 것이 낯설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하루 하루가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던 당시, 생각하면 아픈 기억이 참 많다. 특히 아이들이 행복하다면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겠는데, 초기 딸아이의 학교 생활 조차도 즐거움은 커녕 매일 눈물 얼룩져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먼저 떠올라 애타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젠 말 할 수 있다. 그토록 아픈 시련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인생이고 사람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이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초기 이민 생활의 절망감, 그렇게 힘든 상황을 겪고 수많은 난관을 헤쳐온 날들이 있었기에, 이처럼 큰 행복과 인생의 묘미를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잠긴다.

 

3. 지인 소개로 가능했던 “My first job, dishwasher”    


 우선 캐나다에서 직업을 얻으려면 이력서(Resume)를 제출해야 하는데, 취업 알선 센터에서 작성 요령을 도와줘 이력서를 몇 군데 제출해 보았다. 자동차 딜러삽 세일즈부터 미국 건축 자재회사 ‘홈 디포’와 대형 유통회사 ‘월 마트’ 등에도 이력서를 냈는데 한 곳도 인터뷰 요청이 없었다.
이민 초기라 절박하진 않았지만 아주 크게 실망했다. 어쨌던 한가롭게 영어만 배우며 시간 보내선 안되겠다는 위기 의식이 들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딸애가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선생님이 아빠께 전해달라 한다며 메모지를 주었다.
주인공은 딸애 학교, 불어 선생님과 친구인데, 우리 가족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소개했다. 자기는 경남 진해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다 막 오타와로 돌아왔는데, 무엇이든 돕고 싶다고 했고 마지막엔 “반갑습니다, 저는 셸리입니다”라고 한글 인사말을 남겨서 친근감이 더했다.
우선 전화를 걸어 인사 나누고 토요일 점심때, 집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처음 캐나다에서 손님을 맞게 되어, 아내는 불고기랑, 잡채 등으로 한국 음식을 준비했다. 약간의 부담도 있었지만, 그래도 셸리는 한국에서 2년 동안 지낸 경험이 있어 만나보니 너무도 반갑고 친숙했다.
특히나 부산과도 가까운 진해에서 근무해서 가끔 해운대, 광안리에 놀러 가기도 했다 하니 더욱 반가웠다. 식사 후엔 셸리가 선물이라며 뭔가를 가방에서 꺼냈는데 자칫 소리 내어 웃을 뻔 했다. 받아 든 것은 다름아닌 소주 반 병이었다.
많이 놀랐지만 애써 고마운 표정 지으며 감사하다고 전했다. 소주가 캐나다에서 비싸다는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소주 반 병의 선물은 순수한 감사함의 표현으로 받아 들였다. 당시 셸리는, 한국에서 돌아와 레스토랑 바텐드로 일하고 있는데 지금 “디시 워서”를 구하고 있어, 내가 원하면 추천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면전에서 바로 ‘No’ 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나를 어떻게 보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중에 연락 주기로 했다. 그런데 셸리를 보내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니, 지난 몇 주 동안 이력서를 보내 본 경험으로, 셀리의 제의를 그냥 흘려 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민 오기 전, ‘도착하면 무슨 일이던 시작하라’던 형님의 말씀도 생각났다. 그래서 고심 끝에 셸리에게 O.K 전화를 했고, 마침내 셸리가 매니저 한테 확답을 받았다고 연락을 해주어, 첫 정착 도시 오타와에서 “디쉬 와셔”를 첫 직업으로 하게 된 것이다.
전혀 실감나지 않는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딸애 불어 선생님 친구, 셸리가 한국에서 오타와로 돌아와 이렇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하여는 분명 감사해야 했었다. 어쩌면 그것은 억세게 운 좋은 인연이자 행운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의 소개 없이 혼자 취업하기는 정말 힘든 곳이 캐나다란 걸 나중에야 알았기에 “정말 고마웠어요, 셸리”라고 감사한 마음 전해 본다.

 

4. 나의 직장 동료는 아프리카 현직 외교관


첫 직장으로서 출근한 곳은 “론스타”라는 미국 체인 레스토랑 이었다. 첫 날  매니저랑 인사 나누고 내가 일할 곳으로 안내 해줬다. 즉 키친 라인의 디쉬와셔 부분이었는데 풀 타임으로 일하는 백인 친구랑, 다른 흑인 친구는 파트 타임으로 일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직업이 무엇인지 처음엔 묻지 않았지만 나중 알고 보니 대사관에서 일하는 현직 외교관이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이민 왔다고 하니, 대뜸 자기 나라가 한국전에 전투부대를 수 차례 보내줬다고 상세히 말하길래, 나도 아프리카 국가 중,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기억이 나 동의를 표하며 또한 감사하다는 인사도 나누었다.
곰곰 생각해 보면 나의 캐나다에서의 첫 직업, 디쉬와셔는 좋은 직장 동료를 만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캐나다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즉 캐나다의 대학 혹은 칼리지에서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이 부모로부터 일찍이 독립해서 스스로 렌트비 내고 심지어 학비까지 벌면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캐나다 젊은이의 삶의 방식이란 것을 알게 된 후, 한참 동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튼 그 곳에서 경험한 것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함께 일했던 외교관 친구 얘기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한국전 때, 아프리카에선 두 나라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했는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에티오피아였다.
그 중 전투부대를 파병해 주었던 국가가 에티오피아였다. 직장 동료 톰이 주캐나다에티오피아 외교관이었던 탓에 그런 풍부한 상식과 소양을 갖추었구나 싶었다. 역시 세상은 둥근 것이니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여하튼 첫 직장은 비록 3개월 만에 그만 두었지만 좋은 기억이 많다. 무엇보다 첫째의 즐거움은 식사 한끼를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직원들에게 주어진 것, 즉 집에서 싸간 김밥으로 먹고, 레스토랑 메뉴로 집에 가져오면, 아주 맛있게 먹는 아이들 모습에서 참 행복했던 기억이 있고, 둘째는 손님들과 직접 교류가 없는 디쉬와셔에게도, 작은 봉투에 담아 일부 팁을 나눠줘 참 감사했다. 이렇듯 몸으로 직접 부닥치며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5. 신중해야 할 석사학위 도전 - 낭비 혹은 투자?


많은 사람들이 캐나다에 이민 와서 큰 맘먹고 “공부를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특히 한국에 있을 때, “유학으로 진로 바꾸기”란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는 본인도, 솔직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이민 오기 전, 몇 번이나 당부했던 형님의 말씀과 여러 정황을 감안해 시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변의 몇몇 사람을 만나 보니, 대학원을 등록해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 이었다. 한편으론 ‘대단하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과 ‘부럽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는데, 막상 현실 경험을 들어보니, 여러 측면에서 “괜한 짓을 한 것 같다”며 다소 후회하고 있다는 인상을 내게 주었다.
그러나 본 경험치는 오타와에서 개인적으로 만난 몇 분의 경우이니, 큰 꿈을 안고 석, 박사 과정에 도전하시는 분과 혼동 되어선 안될 것이다. 본 글의 핵심은 40대에 이민을 와서, 취직을 하려 해도 직업이 쉽게 연결되지 않고 또 비즈니스를 시작하기도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망설임 끝에 택한 석사 학위 도전은 시간과 금전의 낭비가 되기 쉽다는 뜻이다. 
즉, 캐나다에서 대학을 마친 후, 석사 학위에 도전하는 젊은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실상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경우 나중에서야 비현실적 임을 깨닫고 나중에 비즈니스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는 빙빙 돌아 비즈니스로 돌아 왔을지언정, 조교 등을 하며 학비 보조도 받고, 짧은 기간 동안 대학원생 신분을 유지하며 한번쯤 학문의 길에 빠져본다는 것은, 졸업 여부를 떠나 캐나다에서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 가는데 보탬이 되리라 생각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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