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2)

 

(지난 호에 이어)

  1. 어린 시절

이완용이 양자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양모 민씨는 그를 데리고 어느 세도가 잔치 집에 갔다. 집에 돌아온 양모는 울음을 터뜨리며 이완용을 꾸짖는다.

"그 집 아이는 벌써 어린 티를 벗어나 자태가 의젓해, 사람들이 모두 장래 대신 감이라 칭찬 하더라, 그런데 너에게는 미천한 인물이라 손가락질을 하면서 험담을 했다. 너는 이 말을 듣고도 분하지도 않느냐"

이완용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빌었다 한다. 그 후 말수가 줄고, 차츰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한다.

친부모 밑에 한참 응석을 부릴 어린 나이(10살)에 시골에서 왔으니 양가집 아이들 속에서 주눅들고 양부모 눈치 살피느라(속으로야 어디 두고 보자 했겠지만), 그리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완용은 성인이 된 후에도 과묵하고 사려 깊으며 과단성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씨는 입양 다음해부터 과거준비에 들어간다. 13살 되던 해 한 살 위인 양주 조씨 딸과 결혼한다. 25세 되던 해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다. 당시 급제 평균연령이 35세 이었으므로 매우 빠른 편이다.

별시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실시하는 과거인데, 당시 임오군란으로 피신했던 민비가 무사히 환궁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급제 증서를 수여하던 날, 고종이 직접 인정전에 나와 수여식을 거행하고 특별히 이씨 집에 궁중 악공을 보내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한다. 흔한 일이 아니다.

 

 3) 임오군란

민비가 정권을 장악한지 9년이 되자 국고가 거덜났다. 두살배기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 이홍장에게 뇌물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가 하면, 책봉 후에는 금강산 1만2천봉에 봉마다 돈 1만2천량을 바치고 세자의 무명장수를 빌었다. 궁중에는 매일 무당, 점쟁이를 불러들여 굿판을 벌였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5년 이상 봉급 구경을 못하고 군대 졸병들은 한 달에 쌀 6말 반에 불과한 급료를 13개월이나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고관들이야 봉급이 없어도 백성을 등쳐 먹을 수 있으나 군졸들은 당장 생계가 어려웠다.

 

이들 불만이 심상치 않자 한달치 봉급을 주었는데, 모래가 섞이고, 물에 불린 쌀 이었다. 이에 일어난 난이 임오군란이다. 민비는 충청도로 피하고, 청군을 불러 진압한다. 이에 일본도 공사관 경비 구실로 병력을 배치한다

이것이 한반도가 청일간 세력다툼의 장이 되는 시작이고, 조선 패망의 서곡이다.

청군 진주 사흘 만에 대원군은 중국으로 잡혀간다.

 

 3) 벼슬길

이완용은 급제 4년 만에 관직을 얻는다. 비어있는 자리가 없어 기다린 것이다. 그래도 가문 덕에 한성내 (규장각 대교) 자리를 얻는다.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변했다.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 회오리처럼 지나가고, 청국으로 끌려갔던 대원군이 돌아온다.

그간 민비는 청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었고 청은 이를 눈치채고, 견제코자 민비와 원수지간이 된 그녀의 시아버지 대원군을 귀국시킨 것이다.

그리고 조선 정가는 대원군과 함께 입국한 원세개의 휘둘림을 받는다. 이 시절 이씨가 벼슬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1년, 이씨는 세자(순종)의 교육을 맞는 사서가 된다. (이렇게 빠른 시기에 그런 직책을 받았음은 유의할 만하다) 틈틈이 고종으로부터 상도 받는다(어린 말)

 

 4) 신식교육

이씨가 관직에 나온지 6개월, 조정에서 신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육영공원에 입학한다. 그는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점 긴요해져, 육영공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무릇 천도에 춘하추동이 있는 것 같이 인사에도 그러하여 때에 따라 변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라 했다.

이 두 마디 말은 일견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지만, 한편 기회주의적인, 간단히 말해 세상 변하면 인간도 변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것이 그의 인생관인 듯하다. 또 10회로 예정된 이 칼럼이 끝나면 알게 되겠지만 그는 과단성도 있고, 실천력도 있다.)

다음해 그는 새로 개설되는 미국주재 조선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 받는다. 이는 전권공사 다음의 두 번째 서열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 후 친미파인 정동파의 대표로서 그가 1898년 독립협회에서 제명당 할 때까지 12년 동안 그의 삶을 규정하는 전기가 된다.

 

 5) 보빙사

이씨가 처음으로 영어, 수학, 지리를 배운 육영공원은 미국이 공사, 푸드를 파견하자 이에 대한 답례로 8명의 사절단(보빙사)을 미국에 파견하고, 그들이 돌아와 "어학교육의 시급함"을 건의하여 설립되었다.

이들 8명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서구문명을 접한 인물이며, 그 중 3명은 미 대통령 아서의 호의로10개월간 거의 세계일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이 보고 느낀 것을 펴보지도 못하고, 글로 후세에 전하지도 아니하고(평생을 글만 본 사람들인데, 왜 글을 한마디 안 남겼는지?), 수구파에 밀려 사나운 운명을 맞이하는데…

보빙사 단장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일 난자 당하고, 홍영식은 그의 건의에 따라 우정국(미국식 우편제도)을 세우나 우정궁은 잿더미가 되고 그도 죽는다. 그 외 주역들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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