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 zebra is back home safe and sound after escaping from a zoo in Seoul on March 23, 2023. The male zebra named Sero wandered the busy streets for nearly three hours before police and emergency workers in the South Korean capital managed to hit the animal with a tranquilliser dart. An official from the Seoul Children's Grand Park said the zebra was in stable condition after Sero’s unexpected adventure, and the zoo is investigating how he managed to escape.
. A recent survey found most Canadians check their grocery store receipts & find mistakes.
. 광우스님의 재미 있고 알기쉬운 법문 이야기
. 우리에게감동과머리속에여운을 남기게 하는 수준 높은작품들을 소개 합니다
. 저는 80평생, 아름답고 생명력이 강한 무궁화를 좋아했습니다.세상 이곳 저곳에 곱게 핀 무궁화를 촬영하여, 여러분들께 보여 드립니다.
. 슬로바키아가 우크라이나에 약속했던 미그-29 전투기 13대 가운데 4대가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전달됐습니다
. North Korea claims to have tested a new nuclear-capable underwater attack drone. The state media said that the drone is capable of generating a radioactive tsunami. Pyongyang blamed the joint military drill by South Korea and the US for raising tensions in the region.
. . The ongoing depletion of Russian forces fighting for Bakhmut will allow Ukraine to go on the counteroffensive in the eastern city "very soon," a top Ukrainian general said in a Telegram post. CNN’S David McKenzie reports.
. 2년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되는 미동산 수목원내의 무궁화꽃 전시회입니다.
-평생 함께 갈 수 있다면 큰 행복 지난 일요일 오후 감명깊은 영화를 한편 보았다. ‘코다’(CODA)라는 제목의 가족 휴먼 드라마인데 시종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CODA는 Child of Deaf Adults의 약어로 ‘농아(聾啞)의 자녀’란 뜻이다. 즉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를 말한다. 영화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까지 온가족이 농아인데 막내인 주인공 딸만 정상인이다. 0…주인공 루비(에밀리아 존스 분)는 농인(聾人)어부(漁夫)인 부모.오빠와 함께 살면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고교생인 그녀는 가족의 생계인 고기잡는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그런데 평소 노래를 좋아하는 루비는 우연히 학교 합창단에서 음악의 기쁨을 알게 되고 합창지도 교사와의 소중한 만남을 통해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다. 그녀를 알아본 교사는 루비에게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버클리 음대 진학을 추천한다. 하지만 루비가 떠나면 가족은 세상과 소통이 단절된다. 루비가 없으면 곧 가족의 생계 길이 막히는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는 루비. 0…그녀는 버클리 음대에 합격하지만 가족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오빠의 적극적인 권유에 용기를 내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난다… 시종일관 진지하면서도 밝고 또한 힐링을 주는 영화다. 실제 농인 배우를 캐스팅한 것과 주연인 에밀리아 존스는 실제 루비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특히 수어(手語) 연기를 보여줬다. 루비가 버클리 음대 오디션에서 부른 음악이 가슴에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인생의 어느 한쪽만 보지 말고 양면을 다 보자. 그래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Well something's lost, but something's gained / In living every day / I've looked at life from both sides now / From win and lose and still somehow / It's life's illusions I recall / I really don't know life at all…’ (주디 콜린스의 ‘Both Sides Now’) 0…이 글의 주제가 영화는 아니다. 이런 따스한 영화를 감상하게 만들어준 분과, 또한 다함께 좋은 작품 앞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도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고 싶은 것이다. 이날 아홉 분이 모여 함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하신 분은 S선생. 그는 프로 영화평론가 못지 않은 해박한 영화지식을 갖고 계시다. 우리 부동산 신문에도 매주 영화칼럼을 쓰고 계시는데 열독자가 무척 많다. 이 분은 특히 수년 전 인격과 소양이 고매하신 분들이 함께 만나 담소와 식사를 나누는 모임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운이 좋게도 우리 부부도 자리에 끼게 됐다. 0…모임의 참석자 면면을 보면 우리가 왜 행운이라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대기업 사장을 지내시고 사학자 못지 않은 역사지식을 갖고 계신 원로 문인 부부, 전직 교수(지구물리학), 조각가, 영화칼럼니스트, 시인 등 두루 박식한 분들이다. 이날 모임에서도 영화감상에 앞서 지구물리학자 M교수님의 화산(火山) 특강이 있었다. 돈을 주고도 듣기 어려운 소중한 강의를 공짜로 듣다니, 얼마나 황공한 일인지. 0…이 분들은 지식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됨이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시다. 대화에서 남이 말을 할 때는 끝까지 경청하고 도중에 끼여들지 않으며 반박을 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되 주장을 고집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모임의 막내인지라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평소 각 분야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래서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언가 한아름 선물을 받고 오는 기분이다. 학식이 높다고 인격도 높은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격려하는 자세야말로 모임이 오래 가는 비결이라 생각한다. 0…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 인연을 쌓고 살아간다. 특히 외로운 이민생활 가운데 뜻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 교제할 수 있다면 행운이요, 행복이다. 다만 만남과 모임이 오래 가려면 몇가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고 본다. 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첫째, 타인을 배려하고 겸손할 것, 둘째,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말고 전체 분위기에 따를 것, 셋째,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경청할 것, 넷째, 상대의 자존심에 관한 말은 절대 삼갈 것. 다섯째, 궂은 일에 먼저 발벗고 나설 것. 0…‘사람은 원래 깨끗한 것이지만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른다. 저 종이는 향(香)을 가까이 하여 향기가 나고, 저 새끼줄은 생선을 꿰어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조금씩 물들어 그것을 익히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을 모를 뿐이다’. 법구경(法句經)의 이 말은 인연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준다. 세상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로 인해 형성되며, 누구를 만나고 가깝게 지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가능한 품성 좋은 사람과 교류해야 좋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오래토록 함께 갈 수 있다면 그 삶은 행복하다 하겠다. (사장)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2014년에 개봉된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The Monuments Men)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조지 클루니가 감독·주연하고 맷 데이먼, 빌 머레이, 존 굿맨, 장 뒤자르댕, 케이트 블란쳇 등 호화 캐스팅이었다. 줄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해 5백 만점 이상의 세기의 걸작을 잃을 절체절명의 위기 속, 미술 역사학자 프랭크(조지 클루니)는 이를 막기 위해 미술관 관장, 건축가, 조각가, 예술품 감정가, 미술품 거래상 등으로 구성된 예술품 전담부대인 이른바 '모뉴먼츠 맨' 결성을 주도한다. …자신의 목숨조차 지키기 어려운 상황과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 모뉴먼츠 맨은 도난 예술품의 은닉처를 찾아 최전선으로 향하는데…. 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반세기 전 '대열차 작전(The Train)'의 리메이크판이다. 1964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배급. 출연 버트 랭카스터, 폴 스코필드, 잔느 모로, 미셸 시몽 등. 비록 흑백영화이지만 이 작품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박력있고 스릴감이 있다. 감독은 '알카트라즈의 조류가(1962)' '만주인 지원병(1962)' '5월의 7일간(1964)' '세컨드(1966)' '그랑프리(1966)' '로닌(1998)' 'Reindeer Games(2000)' 등으로 유명한 존 프랑켄하이머(1930~2002). 음악감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닥터 지바고 (1965)' 등으로 유명한 모리스 자르(1924~2009). 러닝타임 133분. 이 영화는 미술사를 전공하고 파리의 죄 드 폼 국립미술관(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에서 큐레이터(임시 학예사)로 근무했던 로즈 발랑(Rose Valland, 1898~1980)이 쓴 실화인 '예술의 전선(戰線)'(Le Front de L'Art: Defense des Collections Francaises, 1939-1945)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로즈 발랑은 '제3 제국(The Third Reich)' 즉 나치 독일 시기인 193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5년까지 이 미술관은 물론 유대인 개인소장 예술품들의 목록을 꼼꼼히 기록하였다. 그녀는 이 기록에 의거하여 나치가 약탈, 독일로 반출하려는 수백만 점에 달하는 세기의 문화재를 레지스탕스와 협력하여 보호한 공로로 프랑스, 미국, 심지어 독일로부터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장면에 "이 영화를 훌륭한 정신과 용기를 보여준 프랑스 철도 종사자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뜬다. 당시 파리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은 기차로 프랑스의 미술품을 반출하려고 했으나 프랑스 철도 레지스탕스 전원이 목숨을 걸고 수호했기 때문이다. 배경은 1944년 8월2일 파리, 독일점령 1,511일째. [註: 그러니까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한지 4년여쯤 되고, 같은 해 8월19~25일 동안 지속된 '파리 해방 전투(Liberation de Paris)'가 발발하기 바로 직전 시점이다.] "죄 드 폼 박물관(Musee du Jeu de Paume)은 독일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독일어·프랑스어로 쓰인 안내판이 보이고 박물관 앞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독일군들의 경비가 삼엄하다. 한밤에 헤드라이트를 밝힌 두 대의 오토바이 에스코트를 받으며 리무진 한 대가 박물관 앞에 서고, 차에서 제3제국 독일장교가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와 코트와 군모를 벗는다. 독일군 대령 프란츠 폰 발트하임(폴 스코필드)이다. 실내는 그림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박물관 큐레이터인 빌라르(수잔느 플롱)가 나타나 "지난 4년 동안 멀리 보내질까봐 걱정했는데 걸작 미술품들을 이 박물관으로 모두 모아 간직하고 보호해 준 데 대해 감사하다."고 말한다. 대령은 "파리의 해방이 가까와지니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라며 "그럴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내가 감사드려야 할지도…"하고 대꾸한다. 빌라르가 "당신은 특별하니 이 그림들의 가치를 알죠."라고 치켜세우자 대령은 "통찰력이 있으시군요. …우리 독일은 바로 현금이 되는 것만 찾죠."라고 말하는 순간 부관인 슈미트 대위(쟝 부쇼)가 부하들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폰 발트하임 대령은 부관에게 내일 아침까지 기차에 실을 준비를 끝내도록 명령하는데…. 그리고 오픈 크레디트가 나오고 긴장감 넘치는 드럼, 심벌즈 소리와 행진곡 풍의 음악이 요란하게 흐르는 가운데, 독일병들이 그림 액자를 꼼꼼히 포장하여 나무상자에 화가별로 분류해 차곡차곡 넣는다. 짐 궤짝 위에 고갱, 르누아르, 반 고흐, 마네, 피카소, 드가, 미로, 세잔느, 마티스, 브라크, 쇠라, 위트릴로 등의 이름을 프린트 한다. 눈 뜨고도 속수무책인 빌라르 양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텅 빈 박물관 실내를 바라본다. 다음날 아침. 폰 발트하임 대령이 기차역에 도착했으나 배차 계획이 취소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화가 나 통제실로 온 대령에게 프랑스 국유철도회사 SNCF(National Society of French Railways) 소속의 인스펙터인 폴 라비쉬(버트 랭카스터)가 자기가 했다며, 특수 무장 기관차를 최우선적으로 준비하라는 서부전선 총사령관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명령 때문이라며 그 전문을 보여준다. [註: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1953)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 원수로 아돌프 히틀러와 장갑을 낀 채로 악수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1945년 3월 히틀러에 의해 면직 당할 때까지 은퇴와 복귀를 거듭하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전범자로 기소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1948년 석방되었고, 하노버에서 살다가 1953년에 78세로 사망했다.] (다음 호에 계속) ▲ '대열차 작전(The Train·1964)' 영화포스터 ▲ 한밤에 그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죄 드 폼 박물관에 들어오는 독일장교 폰 발트하임 대령(폴 스코필드). ▲ 박물관 큐레이터인 빌라르(수잔느 플롱)가 "당신은 특별하니 이 그림들의 가치를 알죠."라고 치켜세우는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폰 발트하임 대령(폴 스코필드)은 부관에게 내일 아침까지 기차에 실을 준비를 끝내도록 명령하는데…. ▲ 독일병들이 포장된 상자에 작가의 이름을 잉크로 프린트 하고 있다. ▲ 배차계획이 취소됐다는 보고를 받은 폰 발트하임 대령(폴 스코필드)은 화가 나 통제실로 가는데….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물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나와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 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지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합니다" - 1945년 11월23일, 김구. 1945년 11월23일, 중국 상해를 떠나 황해 바다를 건너 광복 강토로 돌아가는 하나의 정부가 있었다.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원 15명은 그날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귀국준비위원회 조차도 모르는, 아무런 환영도 없는 쓸쓸한 환국이며, 현실과 상상의 차이만큼 초라한 귀국이었다. 그리고 슬픈 조국의 운명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당시 중국 전구 연합군 사령관은 장개석 총통이었고 "웨드 마이어" 중장이 참모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본의 항복이 빨라서 점령지인 한국에 진주할 육군병력과 수송 능력이 없는 중국 전구는 태평양 전구로 이전되어 "맥아더” 장군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이 관할권 이완으로 종래의 계획이 변경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기다리던 귀국길은 3달이 지난 11월이 되어서야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보내준 비행기편으로 제1진이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임정의 영광스런 귀국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서의 환국이어야만 하였다. 그 1진에는 평민의 자격으로 입국하는 김구 주석이 있었다. 그때 이미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후반, 미국은 단독으로 일본제국과 대치할 계획이었으나 1944년 말 작전상 소련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나치 독일과 대적하던 서부전선인 유럽에 전념하던 스탈린의 소련은 늦게 일본과의 전쟁인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되었고, 그 참전 한 달도 되기 전에 1945년 8월15일 일본은 항복하게 된다. 어부지리로 승전국이 된 소련은 그때 이미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물론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까지 진격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몫으로 한반도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 세력의 팽창화와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이를 거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참전국으로서 그리고 승전국인 연합군의 입장에서 사상자와 부상자의 존재를 내세워 거듭 한반도 통치를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25일 북위 38선 한반도 분할 점령을 발표하고, 미국 또한 서둘러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결정한다. 1945년 9월8일, 하지 중장이 사령관인 24군단은 인천을 경유하여 해방군으로서 상륙하게 된다. 또한 하지 중장은 주한 미군 사령부와 군정장을 겸직하게 된다. 군인 하지 중장은 패튼 장군과 버금가는 용감한 군인으로서 1차 대전, 2차 대전을 모두 참전한 역전의 노병이었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전쟁의 수행능력에는 유능한 장군이었으나 국제정세와 국내정세가 민감하게 얽혀있는 남한의 정세를 파악하기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였다 한다. 당연히, 한국민족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음이 없이 독립국가를 형성해 왔을 뿐만 아니라 합병 당시도 오직 소수의 특수층만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혜택을 받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오랫동안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이해 하지도 못하였고 이해 하려 하지도 않았다. 페이스 북에 “미국 사는 한국인 그룹"이라는 사이트에 올라온 글 중에 코스코에서 피자 먹고 있는 92살인 한국전 참전 용사를 소개한 글이 있다. 이름이 그렌(Glenn)인 그 노병은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해군병원 배에서 1952년과 1953년 근무하였다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을 방문한적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가본적이 없다고 하여서 현재의 서울 사진을 보여주니까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의 인천은 완전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고아들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더욱 비참한 것은 미군 배에서 쓰레기를 버릴 때는 많은 사람들과 고아들이 쓰레기 안에 있는 것을 먹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한다. 육이오 전쟁 전 1949년 11월 정대위 박사는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귀국을 하고 있었다. 고베와 요코하마를 들려서 오게 됐는데 당시 그곳들은 황폐한 주검의 음산한 도시였다 한다. 그러나 부산항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건실하였으며 사람들의 표정도 일본사람들과는 다르게 밝고 명랑하였다 한다. 그러나 3년간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을 완전 폐허로 만든다. 반면 한국에서의 교훈을 거울삼아 일본의 적화 방지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며, "육이오"라는 전쟁의 특수 덕에 패전국이었던 일본으로 하여금 경제대국의 발판을 마련하여주게 된다. (본국과 지리상 먼 거리에 있던 미군의 식량 조달은 일본으로부터 공급받게 된다.) 역사는 한번 저지른 잘못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법이 없다. 태평양 전쟁의 승리는 미국의 힘이었지 소련의 도움은 거의 없었으나, 미국은 소련이 최대의 전쟁 피해국이라는 의견을 받아들여 결정적인 양보를 하게 된다. 국제사회에서의 명분 없는 양보는 자신도 모르게 적을 돕는 부도덕한 전례를 남기게 되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격전장이 된다. 총 한번 쏘지 않고 대한민국을 일본에 넘겨준 못난 조상들의 과오를 되새기며, 이국 땅에서 순국하신 모든 애국 지사들의 숭고한 뜻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 (2023년 3월19일) 에필로그: 하지 중장은 임정과 한국의 지식인들의 "신탁통치" 반대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재임기간 동안 김구 주석과 이승만 박사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게 된다. 이승만 박사로부터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비아냥의 소리까지 듣게 된다. 참고서적: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 정대위 박사: 한국 유네스코 대표, 건국 대학교 총장, 한국 신학대학 학장 역임.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루하고도 길었던 겨울이 지나면서 길거리 여기 저기 쌓였던 눈덩이들도 하나씩 녹아내리며 소금에 절어들고 눈속에 묻혀있던 흙덩이들이 길거리를 더럽히고 있는데, 어서 소나기라도 한번 쏟아져 깨끗한 도로와 푸른 잔디와 나무의 초록색 봉우리들을 보고 싶다. 새해의 첫날은 지난 1월 1일이 맞는데, 우린 언제나처럼 봄을 맞이할 때가 새해인 것만 같은 것은 아마도 봄이 올 때 우리 모두는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움직일 마음과 준비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팬데믹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던 우리들도 이제는 그런 몹쓸 전염병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빨리 끝나고, 우리를 괴롭히는 인플레이션이나 경제공황의 위험도 사라지고, 이제 그만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원한다면 욕심인가 아니면 망상일까? 미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은 그것이 욕심이든 망상이든 별로 달라지는 건 없지만, 우리는 많은 교육자들과 성직자들 아니면 조상의 가르침으로 삶에 대한 태도가 비관적이 아닌 낙관적으로 살라고 배워왔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하면서 살라는 말이며, 근심과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똑바른 판단이나 계획 없이 사는 것은 결국 인생을 망친다는 말이다. 특히나 이자율이 올라가면서 미국엔 벌써부터 은행들의 부도와 폐쇄 조짐이 확연한 시대에 말이다. 이렇게 두렵고 살벌한 생존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남은 삶에 대한, 또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 하고, 고민과 걱정도 해야 하며, 아무것도 방심해서는 안되며, 단 하루도 느긋할 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적당히 놀고 쉬면서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은 이미 옛말이며, 그런 삶은 아직도 문명과 과학이 못 미친 먼 나라 후진국들에서 가능한 일이고, 미국 또는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그렇게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예를 들어 이곳 캐나다에 살면서 몇 전문직종을 제외하고 일반 직장인들의 삶을 살펴본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해의 경험을 거쳐도 연봉이 십만불 내외이고, 부부가 번다 해도 이십만불 벌기가 쉽지 않고, 그나마 세금을 떼고 나면 부부가 집에 가져올 수 있는 돈은 매달 만불 정도일 것인데, 거기에다 주택 모기지나 부양 가족이 있다면 도저히 풍족한 삶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팬데믹을 지나면서 무서운 인플레가 다가왔고, 또 그것을 이용해 각 그로서리 마켓, 식당들의 폭리가 물가를 끌어올리며 웬만한 수입이 없으면 사치는 그만두고라도 그냥 평범하게 먹고 살기도 힘들어졌다. 이런 모든 악재들은 부동산 침체기를 초래했고 따라서 은행이나 부동산 변호사들,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 많은 일거리를 빼앗아 버렸다. 전에 필자가 팬데믹 시절에 재택근무가 유행하면서 출퇴근의 필요가 없어져 너도나도 비싼 416지역을 피해 집값이 저렴한 외곽 905 지역에서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성 글을 여러 번 게재했었는데, 지금의 현황을 보면 416지역보다 905지역의 집값이 훨씬 많이 내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당연한 것은 이제 팬데믹이 끝나면서 재택근무가 사라지고 다시 출퇴근 시대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란 없고 모든 것이 자주 바뀌고 변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한동안 부진했던 주택시장 역시 언젠가는 다시 바뀐다. 모든 것을 긍정적이고 편하게만 생각하고 사는 것도 좋을 수 있지만, 그래도 고민하고 연구하고 걱정하며 남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캐나다는 지난번에 이자율의 오름세를 일시 중단했지만 우리가 기대며 살고 있는 이웃나라 미국은 생각과 방향이 달라 결국 그 나라가 이자율을 올리면 이곳 캐나다는 물론 멀리 한국까지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매달 내는 모지지를 감당하며 살기가 지금보다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일 중에 하나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어느 중국인과 대화하던 중에 들은 이야기다. 그의 말인즉, “내 고향은 산동성에 있다. 그 지역에는 옛적부터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 우리는 그들을 거한巨漢이라고도 불렀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조선인의 체구가 대체로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말에서 한漢은 ‘사나이’ ‘놈’이란 뜻도 있다.”라고 했다. 조선 말엽, 일본을 거쳐 입국한 서양인들이 부산항에서 조선인을 본 인상기를 보자. “이들은 일본인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은 더 크고, 광대뼈가 발달했으며, 선한 인상이다. 음성은 일본인보다 한 옥타브 정도 낮아서, 대화할 때 긴장감이 훨씬 덜하다.” 또 “일본인과 다르고, 중국인과도 차이가 나는 조선인들이 대체 어디서 온 종족일까?. 아하! 이들의 특징을 보건대 코카시안 피를 받은 북방 계열의 인종이겠구나”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 고대사를 주체적으로 연구한 사학자 신채호, 신용하 등은 ‘단군왕검의 도읍지 아사달이 한반도가 아닌, 연燕나라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학설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순한 양처럼 길들고 심술궂은 중화주의에 기죽어 스스로 쪼그라든, 친일 관변 학자들의 의식구조를 돌아보게 한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금과옥조로 여긴 친일적 사학자들은 한국 역사를 2,300 년의 일본 역사 안에다 구겨 넣는 견강부회적 논리를 펼쳤다. 일본사 앞쪽에 많이 나오는 ‘무슨 가미[神], 무슨 가미…’ 따위의 신화들은 존중하여 일본사에 포함하면서, 중국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전하는 고조선 역사는 믿지 못할 설화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조상을 욕보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싶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신화를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연대기 속에 13명의 가공스러운 왕을 꾸며서 넣기도 했다는데 말이다. 식민사관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이런 사학자들이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은, 혹시 민족 수난기에 본인 또는 그의 조상이 받은 천황의 은혜에 감읍해서인가? 반민족 행위로 재미를 톡톡히 본 자들이 대를 이어 일본적인 것에 항상 머리를 조아리는 행태는 가증스럽다. “ ‘천황은 신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주장은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라는 일본 왕의 ‘인간 선언’(1946. 1. 1.)이 여러가지 뜻을 시사한다. 신채호 등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이 활동한 강역疆域이 황해를 가운데 두고 말발굽처럼 동쪽, 북쪽, 서쪽을 둘러싸는 160~170만 평방 킬로미터쯤 된다. 그곳에 부여족 홀로 살았을 리는 없다. 거란, 말갈, 몽골, 흉노, 선비, 돌궐, 숙신 등의 비슷비슷한 어족語族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론 피를 섞으며 살아온 역사였다. 산동성 주민들의 키가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통계를 보면, 산동 지역의 동이족은 중국이 중심 종족으로 여기는 화족華族과는, 혈연적 역사적 연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황해도 장연군에서 산동반도 웨이하이까지의 거리는 160km에 불과하다. 효녀 심청의 설화가 어린 ‘장산곶에서 중국의 닭 울음 소릴 듣는다.’라던 옛말이 그럴듯한 이유다. 통일신라 때는 산동성에 ‘신라방新羅坊’이란 특별구역을 조성했을 정도로 신라인이 많이 살았다. 아득한 날 알타이 산록의 서쪽에서 동으로 이동하여 몽골의 남쪽을 지났고, 그 동남방에 터를 잡아 활동한 우리 조상 부여족夫餘族의 주류는 남하하여 한반도를 오롯이 차지하였다. 그들이 만주 지역의 동쪽으로는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시라무랜 강을 건너 연燕나라(북경지역), 그리고 산동반도의 아래쪽에까지 남하해서 살았던 흔적들이 많다.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주민들은 고대부터 상호 이주가 빈번했다. 산동성과 절강성에선 한반도 스타일의 고인돌(BC1,000~400년경) 50여 기가 발견된다. 이는 부여족이 유사 이전부터 부족장으로 활동한 곳이란 물증이다. 산동성 일대는 고대엔 큰 섬이었고, 황하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운하가 지나는 회수淮水 일대는 초한지, 수호지에서 거론되는 늪지로서 일반인들이 살기를 꺼린 곳이다. 그곳의 서쪽 황하 유역은 화산華山 중심의 중원으로서 화족華族의 발원지요, 그 동편엔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동이족東夷族들이 섞여 살았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두고 다툰 ‘초한쟁패楚漢爭覇(BC 250~195년경) 때 제齊나라 주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다.’라는 중국측 사료도 보인다. 후일에 백제, 고구려, 발해계 유민들이 산동반도 일대에 대거 정착했으니, 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이 AD781년 제齊나라를 세운 기반이 된 것이다. 그의 통치 권역은 지금의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중국말과 우리말은 문법과 발성이 많이 달라도, 만주의 종족들과 우리의 언어구조엔 공통점이 많다. “나랏 말씀이 중국에 달아 (중국)문짜文字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 할 세…”’라며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 임금이 소리글의 음운체계를 개발하면서 성삼문, 신숙주 등을 청나라 심양에 열세 번이나 다녀오게 한 뜻도 거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DNA는 바뀌지 않듯이, 민족 고유의 말과 발성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말과 한글을 쓰지 못하게 탄압했고, 조선 전통 의복에 조선인 앞잡이를 시켜 먹물 총을 쏘게 했다. 조선의 풍습에까지 훼방을 놓아, 흔적도 없이 일본 족속에 녹아들기를 꾀했다. 조선인이란 엄연한 실체를 말살해 ‘일본인’에 보태려고 한 일제의 음모에 소름이 돋는다. 개인의 영달을 바라며 동포를 괴롭힌 역할은, 주로 조선인이 맡았다. 일제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술책을 쓴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 3년, 이승만 정권 12년을 일제 40년에 대한 청산도 참회도 하지 않은 채 흘려 보냈다. 민족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남았다. 결국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과 그 후예들은 온전히 보전되었다. 그들은 오늘도 정계, 법조계, 학계, 문화계에서 설치며, 민족의 자존심에 흙탕물을 씌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3. 1운동 정신을 왜곡시키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유린했다. 일본을 위해서 대법원판결까지 무시했으니, 민주정치의 근간인 삼권분립의 원칙도 깨뜨려졌다. 거꾸로 돌리는 세상에 기분이 섬찟하다. 이런 무지막지한 사태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한 성찰과 의견표명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대는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 (2023.3)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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