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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으나 높은 나무에

 

높으나 높은 나무에 날 권하여 올려놓고

이보오 벗님네야 흔들지나 말려므나

내려져 죽기는 섧지 않으나 임 못볼까 하노라

 

 높은 나무에 나를 올려 놓고는 여보소 사람들이여 제발 흔들지 마십시오. 떨어져 죽기는 섧지 않으나 임 못볼까 겁이 나오.

 

 위 시조는 선조 때 문신 이양원이 자기를 추천해 놓고는 뒤로는 중상모략을 하는 세태를 비꼬는 노래다. 떨어져 죽는 것은 서럽지 않으나 임(임금)을 다시 못볼까 겁이 난다는 노래다. 지은이는 이양원으로 선조 때의 문신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명나라에 간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의 이인임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던 것을 몇 십년을 두고 고치지 못하다가 이양원이 사신으로 가서 그것을 바로 잡았다. 그 공로로 상도 두둑히 받고 우의정까지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양원은 유도대장으로 수도의 수비를 맡았다. 이때 의주까지 피난 가 있던 선조가 요동으로 갔다는 (거짓) 소식을 듣고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다. 사가들의 말을 빌리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서울로 진격해오자 임금 선조는 싸울 생각은 전혀 않고 도망갈 궁리만 했다고 한다. 곁에서 신하들이 모두 극구 반대를 해도 듣지 않는 선조를 보고 유성룡이 참다 못해 “요동으로 도망가면 반드시 중국에서 죄를 물어 체포, 감금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나서야 선조는 국경을 넘어 도망갈 생각을 단념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싸움터에 나가 한판 승부의 싸울 생각은 않고 겁먹은 집개처럼 도망갈 생각에만 바쁜 선조가 얼마나 한심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겠는가.

 

 이양원은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갔다는(거짓)소식을 듣고 놀라기도 하고 분한 마음이 들어 자리에 눕고 그 길로 분에 못이겨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시조에서는 “떨어져 죽는 것은 섧지 않아도 임 다시 못보는 것이 서럽다”니 이런 충성스런 신하를 두고 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망만 가려는 임금은 얼마나 못난이인가?

 

엊그제 벤 솔이 낙락장송 아니던가

적은 덧 두던들 동량재(棟梁才) 되리려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나무가 버티랴

 

 얼마 전에 베어버린 소나무가 낙락장송이 아닌가. 잠시만 그대로 두었으면 큰 집의 대들보가 될텐데. 아 저렇게 좋은 낙락장송을 사정없이 베어 버리면 앞으로 나라가 기울면 어느 나무로 버틸 것인가.

 

 이 노래는 장성의 거유 하서(河西) 김인후의 작품이다. 하서는 21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퇴계 이황과 교분이 두터웠다. 중종이 죽고 인종 또한 재위 1년 만에 죽자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하서는 고향 장성에 내려갔다.

 

 여러번 벼슬에 붙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성리학에 전념, 술과 거문고로 세월을 보냈다. 하서는 인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인종이 죽은 뒤에는 인종이 동궁 시절에 하서를 찾아와 글을 묻고 묵죽을 그려주던 인연을 못잊어 매년 인종의 기일이 되면 산에 올라가 통곡하며 밤을 세우곤 했다 한다. 저서로는 ‘하서집’이 있다.

 

 위의 시조는 을사사화 때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아무 죄도 없는 임형수 같은 선비가 윤임의 일당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것을 슬퍼하는 시조다. 임형수는 퇴계 이황도 문무를 겸비한 장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선비로 하서와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양재역 벽서 사건이란 무엇인가? 을사사화 2년 뒤인 1547년에 윤원형 세력이 윤임 잔당과 사림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쟁점화했던 정치극이었다. 경기도 과천에 붙은 벽보(내용: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 한장이 발견되어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서 의도적으로 붙인 벽보라고 주장하며 윤임(인종의 외삼촌)과 그의 잔당 세력을 소탕하였다. 윤임, 임형수 외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들, 예를 들면 임형수, 송인수,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20여 명을 유배에 처했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확대한 사건이었다. 벽보는 윤원형 일파가 일부러 붙인 음모였다는 설이 세상에 널리 퍼졌었다.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연대 아니나 우리 님께 바칩니다

맛이야 긴치 않으나 다시 씹어 보소서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습니다. 다른 데가 아니고 우리 님께 보냅니다. 맛이야 별로지마는 다시 씹어 보시옵소서(그리고 나의 정성도 생각해 주옵소서).

 

 유희춘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호는 미암(眉巖)이다. 하서 김인후와는 사돈간이며 김안국의 문인이다. 25세에 문과에 급제, 수찬, 정언 등을 지냈으나 을사사화 때 파직 당했다. 이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제주도와 함경도에서 19년 유배를 살았다. 선조가 임금이 되자 풀려나서 대사성 이조참판을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미암 일기’ ‘미암집’ 등이 있다.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이

내 인사 이러함에 남의 시비 모르노라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노라

 

 남에게 들은 말도 바로 잊어버리고 조금 전에 본 것도 못 본 것처럼 시침을 떼야 하니-. 내가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데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가려서 무엇하겠는가. 다만 손이 성해서 술잔 잡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으니 술이나 마시며 세월을 보내야겠구나.

 

 위의 노래를 지은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암(?菴) 송인이다. 왕의 서녀와 결혼하여 여성위가 되었다. 사문에 능하였으며 퇴계, 율곡, 남명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였다. 저서로는 ‘이암유고’가 있다.

 

 위의 시조는 사화가 끊일 날이 없고 모리배들이 사회 구석구석을 설치고 다니던 시절,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작은 실수 한가지만 저질러도 과장, 날조되어 목이 달아나거나 신세를 망치는 어두운 세상이었다. 이런 시국에서는 그저 듣고도 못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바보 행세를 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위의 시조는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을 일러준 것이다.

 

태평천지간에 단표를 둘러메고

두 소매 늘이 펴고 우줄우줄 하는 것은

일세에 걸릴 일 없으니 그를 좋아 하노라

 

 태평성대에 도시락과 물 떠마실 작은 바가지(단표) 하나 어깨에 둘러메고 두 소래를 늘어뜨려 우줄우줄 흥겹게 걸어가는 것은 인간 세상에 걸릴 일이라고는 없으니 그것이 좋아서 그러네-.

 

 위의 시조를 지은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송천(松川) 양응정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좌당이 되었다. 그러나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파직을 당했다. 그 후 다시 복직하여 진주목사와 경주 부윤을 지냈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저서로는 ‘송천집’이 있다.

 

 위의 시조는 태평성대에 쓴 시조라기 보다는 태평성대를 꿈꾸며 썼다는 말이 더 맞을 게다. 송천 자신도 벼슬을 살면서 권신 윤형원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지 않았는가. 윤형원이 극성을 부리던 시국은 태평성대가 아니요, 중세 암흑기라고 해야 할 시국이 아닌가. (202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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