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 knyoon

    윤경남의 기획 연재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 277
    •  
    • 555,491
    전체 글 목록

‘나의 비밀일기’(10)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 유니스 윤경남 옮김 

 

 

 

 

 

(지난 호에 이어)
옛날에 내가 학교의 먹글씨 책에서 배운 본보기를 가르치려는 듯이.

 


귀환, 3월19일


어떤 손이 내 배를 움켜쥐더니 비틀고 있다. 잠깐 쥐었던 손을 놓는가 했더니 다시 배를 쥐어짜며 비튼다. 바로 그 손이 12개월 전에 똑같은 고통을 내게 주었던 손이다. 내 입은 여전히 우유찌꺼기로 끈적이는 듯했고 거울 같은 접시 위에 떠있는 원형 속의 한 점 물방울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 책상엔 약상자와 약병과 눈금 있는 캡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음식을 약처럼 사용한다 해도 그 음식은 저울에 달아내야 한다. 이곳으로 두 명의 사병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큰 바스켓을 메고 정오에 맞추어 도착한다. 그들은 메고 온 바스켓을 내려 놓는다. 


사람들은 기뻐 소러치며 식탁 위에 늘어놓은 알루미늄 밥그릇이 채워지는 것을 넘겨다 보고 있다. 나로서는 시멘트를 삼키는 편이 나을 것만 같아 침낭 속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린다. 나의 서른 다섯 해 내 나이가 놀란 듯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눈물 흘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떤 사내가 낯익은 시골 먼지길을 배낭을 둘러메고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길을 따라 흐르는 도랑물 옆에 고사리가 가득 피어있다. 교회 종소리가 고요한 대기 속에 울려 퍼지고 수탉 한 마리가 울고 있다. 여기처럼 그곳도 정오가 되었을 것이다.


 그 사나이는 빗장 지른 문 앞에 발을 멈춘다. 어둡고 네모난 문간에 누가 제일 먼저 나타날는지? 그는 꼼짝 않고 서 있다. 닫혀있는 대문 그림자가 하얀 먼지 나는 길 위에 드리워졌는데, 그 사나이에겐 던져볼 그림자가 없다.


 또다시 울음이 터진다. 마치 나 자신과 내게 속해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기분이다. 누군가 대문에 나타나기를 나는 헛되이 기다린다. 나와 이 집안 사람 사이에 그리고 내 생명과 나의 유령 사이엔 눈물의 베일이 가려져 있다. 만사가 흘러가는 물 위에다 글씨를 쓰는 격이다.

 


어떤 포로의 봄


저들이 매일같이 던져주는 몇 알의 감자 속엔 지렁이 같이 길고 하얀 덩굴 순이 들어있다. 드디어 봄이 오고야 만 것이다.

 


 꿈


우리의 오직 한 가지 특권은 꿈꾸는 얼이다. 꿈을 꾼다는 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철조망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꿈에서가 아니면 그곳에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꿈을 통해서만 우리는 현실과의 유대를 가질 수 있고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저울로 달아 주는 소량의 음식과 담배꽁초로 무료한 며칠을 보낸 다음 날 꿈은 우리가 아는 현실적인 활동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꼭 꿈을 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꿈 속에서만 우리가 잊었던 가치관을 회복하고 전엔 몰랐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깨달으며 미래를 잠깐 들여 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막사 밖으로 나가 넓은 밤 하늘에 우리의 간절한 꿈을 계획해 보자. 맑은 머리와 크게 뜬 눈으로 꿈을 꾸자. 우리 마음대로 상상해서 만든 이야기에 줄거리를 세워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도 되고 배우도 되고 카메라맨도 되고 관객도 되어 보자.


나는 내가 어찌해서 이곳에 와 있는지 알지도 뭇하며 알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꿈은 정보가 달린 가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한 사나이가 배낭을 메고 군복 비슷한 것을 입고 내 고향 정거장안 빠르마(Parma) 역 앞의 광장에 서 있다는 사실 뿐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나이가 바로 나 라는 점이다. 나는 구릿빛 나는 두 미개인을 양편에 거느린 탐험가 빗도리오 보테고(Vittorio Bottego) 의 동상가운데에 있는 샘물 속에다 나를 반사해 보려고 몸을 기댔을 때에야 나 자신의 모습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 빛에 반사되어 온 도시의 윤곽이 보인다. 바로     앞에는 쥬세페 베르디 (Giuseppe Verdi-註: 이 기념비는 Anglo-American이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다. 일부는 못 쓰게 되었는데 새로 얻은 자유를 축하하는 데만 기여하고 있다.)의 굉장한 생일케익 기념비가 있다. 


그 작곡가는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조각되어 있는 중앙 제단에서 정거장 쪽을 향해 계속 초조하게 바라보고 서있는 품이, 마치 그의 양복과 모자를 꾸려 넣은 옷 가방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것만 같다. 


벌거벗은 몸에 넓은 월계수 화관을 머리에 쓰고 우화적인 인물 역할에 지쳐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남녀 오페라 가수들의 동상 역시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지멘(Ximen) 들이 건축해 놓은 주춧대 위에 확고부동한 자세로 지휘자의 신경질을 참아주고 있는 듯이 서 있다. 


나부꼬의 오페라, <히브리노예들의 합창> 소리만이,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 반원 속에 서 있는 외로운 신사인 내 귀에 속삭이는 듯 들려왔다. “태양이 지붕 위의 이슬들을 반짝이게 하니 대기 속에 황금의 먼지가 날으도다…” 그렇다. 늙은 느부갓네살 (Nebu chadne- zzar)이여, 그대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아, 내 고향의 부드러운 공기여…!”라고.

 

* * ** * ** * ** * *


나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 도시로 들어선다. 내버린 조약돌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에 기둥에 기대여 있던 표지판이 잠을 깬다. “보행자들은 보도로만 다닐 것.” 표지판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불평을 한다.


나는 그 표지판에게 애원했다. 햇빛 좀 쬐게 해달라고. 나는 오랫동안 햇빛이 내리 쪼이는 거리 한 가운데를 걷고 싶은 게 내 꿈이었으므로. 마침내 나는 이제 겨우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몸이 아닌가!


“그렇긴 하다만 너는 발로 걸어서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내가 알기로 너는 도보자이고 규칙을 따라야 할 것이다.”

 

* * ** * ** * ** * *        


나는 조용하고 삭막한 광장을 건너 전차길 한 가운데를 걸어가고 있다. 교외선 쪽으로 난 좁은 거리 입구로 걷고 있자니 누군가 소리친다.


“죠반니노! 당신의 옛날 단골 카페한테 인사도 안 하긴가? 등나무 의자를 하나 찾아서 앉아 있어 보게. 반 시간만 지나면 웨이터가 문을 열어주러 올 테니까. 그러고 나면 주인과 만나게 되고, 바의 여급, 금발의 경리 아가씨, 그리고 친구들도 보게 될 걸세. 기다릴 동안 잠시 얘기나 하세. 당신 친구들이 당신에게 한 얘기를 반만 들었어도…”

 

“그만하면 됐다, 이 늙은 카페야. 내가 걱정하는 건 우리 식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감옥에 갇히게 된 건 가족을 위해서였지 내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고. 내가 돌아온 것 역시 가족을 위해서거든.”


* * ** * ** * ** * *


나는 조용하고 그늘진 거리로 내려가 보았다. 쓸쓸한 조약돌들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가 옛날의 상가 밑에 깊이 잠들어 있던 메아리를 깨운다.


“타박, 타박, 타박… 거기 죠반니노가 아닌가? 난 당신 발자국 소리를 알고 있지. 당신의 두 발이 푹푹 파묻히는 모래 위를 너무 오랫동안 걸었기 때문에 당신의 유별난 형태를 가진 발자국을 잊었다오. 그러나 지금 그 발자국은 그 때와 똑같네, 당신이 인쇄소에서 야근하고 새벽에 집에 돌아갈 때처럼 말일세. 나는 벽 틈에다 당신 발자국을 새겨두었다오. 타박…타박…타박…들리지요? ”


시가지 끝에 오자, 나는 햇빛이 널리 내리 쪼이는 가로수 길로 나섰다.


“잠깐만, 죠반니노!” 하고 마로니에 나무가 속삭이듯이 나를 불렀다.


“당신이 애인을 기다릴 때면 내게 기대서곤 했지. 기억나오?”


“죠반니노, 난 당신의 의자라오.” 오래 묵은 돌 의자가 중얼거렸다.


“여기 앉아서 당신 얘기, 그 여자 얘기 모두 해보게. 나도 자네들 두 사람에게 할 이야기가…”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넓은 들을 가로질러 3마일은 더 가야 한다. 그러니 쉬었다 갈순 없다고 나는 대답한다.


“잘 있거라, 내 청춘아! 안녕…”


이쪽엔 하얀 먼지가 일어나는 신작로가 있고 전봇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대기 속에서 축제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