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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순자 수필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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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표정 더듬기(하)

 

(지난 호에 이어)
우리가 이민을 오게 되면서 관리하기가 좀 수월할까 싶어 부동산을 처분하면서 지방에 임야와 대지를 샀다. 남편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믿는 구석이 있어 이곳에서 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곳에서 살다 보니 돈 벌기가 쉽지도 않고, 돈을 벌어 아끼고 저축이라고 하다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 싶었고, 언젠가는 땅이 팔리면 조그만 집 하나 장만해서 노후에 연금 받으면 살 수 있겠지 싶었다.


 내 이런 생각은 남편이나 딸들에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니 굳이 물질에 연연해서 심적으로 궁핍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난 일은 하고 있으니 즐겁게 일하자 싶었고, 내가 버는 돈에서 다달이 백 불 정도 따로 떼어 놓아 그 돈이 2, 3천불 될 때면 책을 내리라고 서울엘 나갔다. 그러니 그런 마누라, 그런 엄마가 어찌 밉지 않았을까. 새삼 돌아보니 딸들보다 남편에게 참 미안하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남편의 얼굴, 표정이 있다. 파산선고를 하고 콘도를 팔아 콘도용 아파트에 렌트로 이사를 가서였다. 앞으로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너무도 막막한 상황인데 장모까지 와 계시니, 그나마 집에서도 마음 편히 고민도 할 수 없겠네 싶은 고뇌에 찬 얼굴을 하고 소파에 망연히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남편이 "지금 꼭 이런 상황에서 장모님을 모셔 와야 했느냐"고 언짢은 표정, 어투로 말한 게 다였다.


 그 후 남편은 공장, 남의 가게에서 일을 하기는 해도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한 번도 어깨 펴고 편한 얼굴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즈음 가끔은 드라이브라도 나가자고 졸라서 나가 봐도 역시 기분전환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급기야 갖고 있던 땅의 일부가 팔려 2000년도에 역이민을 하겠다고 나갔다. 캐나다 땅에 짐을 풀고 살아보려 했다가 이건 아니네 싶어 8년 만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뭔가 새롭게 해 보겠다는 의욕은 있었으나 그 사이 많이 변하기도, 그렇게 어설피 준비해서 될 사업이 아니었다. 


 사업이네 증권이네 한다고 하다가 몇 달 만에 그곳에서도 살 수가 없겠다 싶어지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나 역시도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어 야반도주하듯 남편 몰래 캐나다 행 비행기에 오르고 말았다.


 그때 상황은 악몽 같아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다시 살아 보겠다고 나간 모국에서의 좌절과 실패로 나 역시도 무서워 도망치듯 캐나다로 들어왔으나, 딸들은 내게 아빠 혼자 두고 또 ‘혼자만 살겠다’고 들어 왔느냐며 냉정하게 퍼 부어 대며 내일이라도 당장 나가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 다음 날로 나가라는 딸들 말에 나 꼭 죽을 것만 같으니 며칠 쉬었다가 다시 나가겠다고 나야말로 딸들한테 사정하듯 했다. 1주일을 있다가 다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부분 지나 놓고 나중에 보면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왜 그랬었지’ 하며 아쉬워하기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겼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 될 줄 미리 알았다 해도, 그 당시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마음으로 치닫기도 하니 그래서도 인생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요, 미완성이란 말도 나오지 않겠나 싶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 남편을 혼자 두고, 몰래 서울을 떠나 와야 했던 내 심정도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라도 그 현실에서 벗어나야 숨이라도 돌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 남편은 안 좋은 일을 가지고 잔소리하거나 반복해서 되뇌며 나를 괴롭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잘못될지도 모르는 자기를 혼자 두고 떠나왔던 것에 대해 만 정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


 다시 돌아봐도 참 미안하고 안 됐네 싶어도 그때 공항에 나온 남편은 몰골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몸은 바짝 마르고 이마는 깨져서 약을 발라 번들거리는 얼굴에 삶에 지쳐 이젠 살아갈 기력도 없어 보이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결국엔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다시 캐나다로 들어왔다. 그 때는 이미 대학생이 된 딸들이 그런 저런 엄마 아빠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 싶기도, 다른 도시에 있는 대학을 가면 두 집 살림을 해야 되겠다 싶기도, 그리 되면 생활이 더 어렵겠다 싶었는지 딸들 둘이 토론토에 있는 대학으로 가 집에서 다녔다.


 우린 부모라야 자식에게 뭘 해준 게 있나 싶다. 등록금을 대준 것도 아니고 용돈 한 번을 제대로 줘본 것 같지 않다. 밥 해주는 거 외에 난 뭘 했을까? 그 후 몇 번을 작은 딸이 집을 사든지 가게를 알아보든지 하라고 채근하듯 해서 가게를 하는 게 우선이겠다 싶어 가게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야무지고 성실한 딸들이 있었기에 남편이 가게를 하다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가게를 할 때는, 공장을 다닐 때나 남의 가게로 일하러 다닐 때의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으며, 한국에서 대리점을 하며 자신만만하고 패기 넘치고 여유 있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으나 삶을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으로는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던 그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살면서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대학 3학년 때 찍은 환하게 웃던 모습이 다가온다. 그렇게 한 생(生)을 살다가 갔는가 싶은데 그것은 마치도 현실을 모르고 살던 얼굴과 현실, 삶이란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 때가 그렇게 다른 것이었나 회상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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