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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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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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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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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2
2018-01-18
새로운 것이 더 좋아(4)

 

 (지난 호에 이어)
 어떤 이는 이민 갈 당시 광화문에 빌딩을 그때 시가로 몇 억도 잘 받았다고 하며 떠났는데, 지금은 그 자리 평당 가격만 해도 얼마라며 한탄을 하는 식의 사례는 여기저기서 보도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부동산 값이 올라가고 하니 물질이 우선인 것처럼 사회 풍조가 그리 돌아가고 있음은 선진국으로 가고 있는 과도기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치관이 바로 정립되어야

 


 지난번 역이민을 시도하려 서울을 나갔더니 친구가 하는 얘기가 서울에선 돈이 사람이요, 돈이 없으면 사람대접도 받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런 사실, 그런 현상을 왜 모르겠나. 너도 나도 잘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 함은 변변한 직장이 없든지, 돈 버는 재주가 없든지, 정보에 어둡고 민감하지 못했다 해도 그 또한 무능한 사람 중에 하나일터이니 가진 것이 없고 적은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물질만능시대의 풍조 속에서 살다 보니 돈에 관한 가치관이 무엇이냐, 물질이 무엇이냐 생각도 해보게 된다. 사람의 욕심, 욕망은 끝이 없어서 자칫 그 욕망의 노예,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물질만을 쫓다가 인생이 끝나버리기 십상이다. 


 하긴 사람이 산다는 것은 명예 욕구든 지식 욕구든 아닌 게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구든 무엇엔가 살아가는 '희망이나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래야만 살아가는 맛이 나고 삶이 시들하지 않고 살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명예 욕구나 지식 욕구를 채우는 사람이 아닌 경우는 물질, 즉 돈을 쫓아 살아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물질이 왜 다가 아닌지, 그렇게 물질만을 쫓을 필요가 없음을 차제에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한다. 


 오래 전 중국을 관광하게 되었다. 관광지 몇 군데 중에 늘 머릿속을 파고드는 생각이 있다. 중국의 황후 서태후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장랑을 거닐며, 인공으로 파놓은 호수를 바라보며, 또 한 끼 식사하는데 120가지나 되는 반찬을 놓고 먹으며, 먹다 남긴 음식은 다른 사람도 먹지 못하고 버려야 하는 허황된 생활을 하면서 과연 얼마만큼 행복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그 의구심이, 회의가 바로 오늘날 물질만능의 사회풍조가 어떻게 바로 잡아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나 나름의 생각이다. 


 사람은 하루에 세 끼, 또는 그보다 적게, 또는 그보다 많다 해도 먹을 수 있는 양이 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한들 잘 먹고, 많이 먹고 싶어도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는 자신이 더 잘 알 수가 있다. 본인이 먹을 수 있는 양에서 조금씩만 더 먹는다 해도 소화불량에, 비만은 물론 배탈이 나기도 하고, 위에 부담이 가중되다 보면 위에 병이 생기기도, 심하면 위암까지 가기도 한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위암환자가 1위라 함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가 보통 먹는 양보다 조금만 많아도 다 먹을 수가 없는데, 120가지나 되는 반찬을 놓고 먹었다 함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조차도 볼 수 없다. 거기다가 장랑을 거닐며 바라볼 수 있는 호수를 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이 되었겠나 상상도 되지 않는데, 그 호수를 바라보며 얼마나 행복했으며 그 행복 자체에서 끝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위를 향해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건 반드시 더 많은 재물을 모으기 위함도 아니고, 더 잘 살려는 욕구도 아니다. 그건 바로 인간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떤 한 가지를 생각하고 계획해서 그것이 달성이 된 다음엔, 다시 또 무언가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되어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서태후가 그렇게 상식 이상의 행동을 했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의 끝없음’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또 서태후가 얼마나 이 세상을 살다가 갔는가 하는데 우리가 다시금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사안이 된다. 거기에 바로 ‘생명의 유한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아무리 길다 해도 100년을 넘기기 어렵다. 설령 100세 이상을 산다 해도 그건 차라리 삶이 아니라 욕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질병이 없을 때엔 천만다행이지만 건강하지도 못하면서 갖은 질병을 갖고 산다면 사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싶다.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본다 해도, 그나마 인간답게 살아볼 수 있는 연령이라야 길게 잡아 90에서 100으로 보면 족하다. 그럼에도 한 평생 재물 모으기에 급급하다면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보니 어차피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인간끼리 어우러져 살아가게 마련이며, 그렇게 살 때만이 살아가는 맛을 더 느끼게도 된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ansoonja
한순자
62892
9202
2018-01-10
새로운 것이 더 좋아(3)

 

 (지난 호에 이어)
 그 후 얼마 지나 고종 사촌 언니가 집을 팔고 사면서 그 차익을 보니, 주택가 보다는 길가 쪽이 오르는 폭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른 전에 부동산에 관해 그만큼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해도 그 후로는 투자 가치도 좋지만 내 형편에서 얼마만큼 쾌적한 환경을 누리고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크게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칫 투자적인 측면만을 중시하다 보면 내가 사는 공간은 다른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한 예가 내가 강북의 주택을 전세를 주고 강남의 아파트로 가고자 할 때 한 친구가 강남의 아파트보다 상가 건물을 사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내 의중을 묻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이미 상가 건물에 살고 있으면서 가게 세 군데서 월세가 들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안채 살림집을 쓰고 있었으니 경제적인 여유는 있을망정 살림집은 조금 협소했다.


 난 그 방법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투자적인 측면을 중시하다 보면 내가 쓸 수 있는 공간은 그만 못하다는 결론이었다. 나중에 돈을 더 벌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 동안의 세월은 그렇게 가버리고 말 것이니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는 셈이었다. 


 그 후 언젠가 한국을 나가고 보니 그 친구는 그 상가 건물은 아직도 가지고 있으면서 이미 아파트에서 부족함 없이 살고 있었다. 그 동안 친구는 무던해서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꽤나 안정이 되어 있음을 보고 나를 한 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고, 나 같은 경우는 같은 환경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다 보니 지금 비록 가진 것은 별로 없어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하고 내가 내린 결정의 결과이니만큼 어쩔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늘 새로운 환경을 찾는 나로서는 내가 살아가는 삶으로 만족한다. 


 내가 집을 팔고 사며 일 가구 일 주택만을 고정화시켰음은 나와 남편의 경제를 일으키는 안목이 그 정도밖에 되지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엔 아파트는 남편 명의로, 공릉동 집은 동생 명의로 되었고, 건대 직원 아파트는 당연히 남의 명의를 빌었기에 나중에 팔면서 그 명의를 빌린 값으로 얼마간의 수수료만 주고 말았으니 우리는 우리가 들어간 돈의 몇 곱인가 남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부동산이란 그 이전부터 묻어 두면 돈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터득한 지혜였음에도 나도 잘 활용했다고는 볼 수 없다. 김일 선수도 한창 돈 잘 벌 때에 동산과 부동산을 적절하게 운용을 했더라면 말년에 그런 경제적인 고통은 받지 않았을 것임에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안타까웠다. 


 그 즈음 부동산에 관해 속속 보도가 되던 중 아파트를 몇 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등의 얘기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보고 싶다. 그때 아파트를 38채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여자야말로 월급 받고 돈이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 명의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사고 또 사고해서 그렇게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니 차츰 부동산 값이 올라간 것에 비하면 세금이야 아이들 껌 값도 되지 않으니 그 여자야말로 팔자에 땅 복을 타고났다고 함이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아파트 값, 부동산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니 너나 할 것 없이 제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정상이 아닐 지경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살면서 남편이 제대로 된 직장, 여자까지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세 끼고 융자 좀 받고 해서 어느 만큼의 재산 증식은 누워서 떡 먹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만나면 증권이나 부동산 얘기야 심심치 않게 하는 거여서 아닌 게 아니라 친구 따라 강남을 갔어도, 재산 증식은 더 했을 것이요, 친구 통해 정보를 얻어 그 방면으로 투자를 했어도 어느 만큼 그 덕을 보게도 되는 거였다. 


 좁은 땅덩이 속에서 경제가 성장하다 보니 부동산 값이 급등하게 됨은 극히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기에 돈이 돈을 벌고 웬만큼 있는 사람들이 더 벌고자 혈안이 되지 않는다 해도 먹고 쓰고 남는 돈을 무엇 하겠는가. 


또 조금씩 모아서 부동산을 하나 사고 또 사고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꼭 재산을 늘리고자 돈을 더 벌고자 하지 않아도 있는 돈을 은행에 좀 예금을 시켜둔다고 해도 조금씩 모이는 돈과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사람에게야 더더욱 당연한 결과다. 


 그런 식으로 부동산 값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니 부동산을 팔고 이민을 갔던 사람들이나 외국을 왔다 갔다 했던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됨을 후회해서 다시 역이민을 시도하는 사람도 생겨나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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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62820
9202
2018-01-04
새로운 것이 더 좋아(2)

 

 

 (지난 호에 이어)
지금 사는 집에서 조금만 보태면 살던 집은 전세를 주고, 다시 방 몇 개를 전세를 주면, 어디쯤으로 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미치다 보면 끝을 봐야 조금 마음 적으로 쉬게 된다. 그렇게 해서 살던 집이 공릉동 집이었다. 


 먼저 살던 집을 전세를 주고 공릉동에 2층 방 4개와 아래층 방 하나를 세를 주고, 우리가 안채 방 3개를 쓰면서 사는 지 몇 년 지나면서 다시 또 스멀스멀 싫증이 나던 즈음에 강북에서 강남으로 학군 따라 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지만 아무리 가고 싶어도 형편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어찌 갈 수가 있더란 말인가. 그 당시 친구들이 한두 명 강남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으니 내 머릿속은 또 강남으로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끄떡도 않고 있어 매일매일 먹어도 소화도 안 되고 머리만 지끈지끈 아팠다. 그때 주택청약예금 통장 400만 원짜리 하나를 갖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살고 있는 집을 전세를 주고 조금만 보태면 강남의 아파트로 이사를 갈 수 있겠다 싶은데, 남편이 강남엔 다 부자만 사는 줄 알고 지레 겁을 먹는지 강북 쪽으로, 그 주변의 아파트만 들먹이는 거였다.


 난 강북의 다른 곳으로 가면 안 갈 것이니 혼자 가려면 가보라고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그때는 일구월심 강남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으니 다른 생각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언제부터인지 대학 친구 세 집이 해마다 피서여행을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 해 여름에도 훈이네, 형이네와 단양 상선암으로 피서를 갔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고 우리 어른들은 평상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내 잔뜩 꼬인 심사를 얘기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대뜸 훈이 엄마가, "혜민 아빠,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느냐?"며 우리보고 강남에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라며 자기네도 강남으로 이사를 가려고 아파트를 내놓았는데 팔리지 않아 못 간다고 하는 것이었다. 난 그때서야 체증이 조금 뚫리는 듯 마치도 천군만마라도 만난 듯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피서를 다녀온 지 며칠 지나 "집 보러 가자"하는 것이었다. 난 어디로 몇 평쯤으로 갈 수 있느냐 물을 필요도 없었다. 마음 변하기 전에 몰아붙여 빨리빨리 끝내야 하는 판이었다. 


 나는 그날 강남의 아파트 몇 군데를 보고 오면서 차에서 먹은 것이 다 올라올 지경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속이 메슥메슥하니 토할 것처럼 식은땀까지 났다. 이는 몇 달 동안을 속으로 삭이며 참느라고 가슴 속 밑바닥까지 쌓였던 것들이 일시에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늘 지나 놓고 보면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면 그때 그렇게 하기를 너무 잘했던 거야 하는 생각을 갖게 됨은, 그 일을 결정하고 난 후에 벌어지게 되는 결과를 놓고 깨닫게 됨은 당연한 얘기가 된다. 


그때 우리의 강남 행은 너무도 잘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릉동 집은 전세를 주었으니 상관없다 해도 그 전에 살던 묵동 집이 마침 팔려 그 돈으로 강남의 아파트 하나를 더 살 수가 있었는데, 일 가구 일 주택만을 주장하다 보니 묵동 집을 팔아서 채권을 사는 바람에 돌이켜 보면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 


 내가 이처럼 부동산에 관해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봄은 한국의 경제성장과 함께 부동산의 성장 과정도 내 경우를 빌어 한 번 되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언젠가 신문 기사 중에 레슬링 선수 김일이 무슨 병으로 병원에서 투병 중이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것은 김일 선수가 재산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의견까지 언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닌 게 아니라 80년대를 전후해서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돈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그 하나가 동산이요, 두 번째가 부동산이 되는 것이니 돈을 벌어 금방 쓸 수 있는 현찰로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땅에 묻어 두느냐, 아니면 금붙이, 즉 패물로 사 두느냐는 각자의 재산관리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 관리를 적절하게 활용을 잘 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 될 것이요, 그런 관리능력도 갖지 못한 사람은 같은 돈을 번다 해도 관리를 잘 하는 사람에 비해서 뒤지게 됨은 말해서 무엇 할 것인가. 


 내가 부동산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됨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돈이 되면 논이나 밭을 사시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면서 아버지가 왕십리에 집을 사게 되었다. 그때 친구 분인 삼거리 아저씨와 상의 하셨던 결과 아이들이 공부하기에는 길가 주변보다는 조용한 주택가가 낫겠다고 결정을 하시어 주택가 안쪽으로 새로 지은 한옥을 사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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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62577
9202
2017-12-31
새로운 것이 더 좋아(1)

 

 술과 친구는 묵을수록 좋고 물건은 새것이 좋다고 한다. 술이 묵을수록 좋은 것은 숙성이 잘 되어 맛이 순하고, 향기가 은은하며, 마시고 난 다음 뒤끝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된 친구가 좋다 함은 이미 친구를 오래 사귈 정도가 되면 서로 마음이 맞고 통해서 서로의 성격이나 취향도 알고 있어 얘기하기 편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그만큼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물건이 새 것이 좋다 함은 물건 자체가 새 것이니 좋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새 것을 쓸 때 마음이 새롭기 때문이다. 마음, 기분이 새롭다 함은 마치 집안 공기가 답답하다 싶을 때 창문을 열면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시원하고 단 공기를 마실 때와 다르지 않다. 그 단맛 또한 창문을 살짝 열었을 때 들어오는 공기의 맛과 문 전체를 열었을 때 들어오는 공기와 아예 밖으로 나가서 마시는 공기의 느낌도 다를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가을걷이를 끝내고 들판에 서있을 때 느껴지는 황량함이나, 모를 심고 나서 바라보는 기분과, 벼가 무럭무럭 자랄 때, 곡식이 익어갈 때, 추수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 각기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런 비유를 들자면 수도 없겠지만 물건을 새 것을 쓸 때는 우선 그 마음, 느낌이 물건에 따라 다르며 그 새로운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예쁜 분홍색 이불을 새로 장만해 놓고 덮지를 않아 나는 며칠을 뜸을 들이다가 내가 그 이불을 덮으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선뜻 내어 주시어 폭신하고 따뜻하게 덮고 자며 며칠 지나 엄마가 도로 달라고 할까 봐 조마조마 했던 적이 있었다. 


 대학교 때는 방에 가구들을 수시로 바꾸며 새로운 기분에 살려고 변덕쟁이가 되기도 하였다.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바꾸기는 쉽지 않고, 나는 나 필요한대로 살림을 장만했던 터여서 심심하고 새로운 것이 없으면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방안 분위기라도 바꾸어 볼까 하는 마음이 일기 시작하면 밤 몇 시가 되든 상관 않고 살림을 이리 저리 놓아 보며 극성을 부리기도 하였다. 


 내 방엔 살림이 꽤나 많아 책상 책장 화장대 전축 반닫이 등나무 의자 두 개와 탁자, 여름이면 돗자리까지. 안방을 나 혼자 쓰기도 했지만 겉치레보다 내면의 멋이나, 안에서의 여자다움, 생활 속에서 새록새록 피어나는 즐거움을 찾느라 그랬을 것이다. 


 언니와 동생은 겉모양은 꽤나 신경을 써도 집안의 살림이나 청소는 별로 하지 않았다. 난 그런 언니와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똑 같은 분위기 속에서는 너무 따분하다 싶으면, 방의 가구 바꾸는 것으로 싫증이 나면 안방과 마루까지 도배를 나 혼자 하기도 하였다. 


 오죽해야 낮잠을 자더라도 방을 깨끗이 치우고 요를 다시 깔고 공주처럼 자곤 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갔다 올 시간이면 마루에 햇살이 가득 들어온다. 그러면 그 시간에 낮잠도 자고 싶기도, 그 시간을 그렇게 흘려버리기 아까워 한복을 입고 밥상을 내다 놓고 책을 보다가 엎드려 잠을 자곤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뉘엿뉘엿 기울면 그제야 한복을 벗고 하루 해가 기울어짐을 아쉬워하며 저녁을 맞곤 했다. 


 가을이면 새빨간 홍옥을 까만 턱이 있는 도자기처럼 생긴 그릇에 수북하게 담아 놓고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와서 누구라도 내 방에 들어왔다가 나간 흔적이라도 보이면 난리 법석을 부리곤 하였으니 그 별난 성격은 고모들까지도 유난스럽다고 입을 모으시기도, 나를 나 하는 대로 인정을 해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별스러웠기에 지금도 미안한 추억이 한 가지 있다. 


 고종 사촌 오빠가 결혼을 해서 살림을 났는데 짐을 풀고 며칠 지나지 않아 고모 두 분과 엄마 나 이렇게 그 집에 모이게 되었다. 고모님들이 “너 이런 거 잘 하지? 언니 찻장 좀 정리해 줘라”하시는 거였다. 그 즈음엔 결혼을 하려면 대부분 장롱과 화장대 차단스는 기본이어서 그 차단스 안에 그릇들을 나보고 예쁘게 넣어보라는 것이었다.


 올케언니가 나중에 바꾸기야 했겠지만 언니가 워낙 무던한 사람이어서 그렇지 따지기 좋아하고 까다로운 여자 같았으면 언짢은 기색이라도 보였으련만 웃으면서 나보고 예쁘게 정리 좀 해달라고 하던 언니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 후 결혼을 해서 살면서 살림을 이리 저리 옮기다 시큰둥해지면 작은 부엌살림 하나라도 사야 마음이 시들지 않고 새로운 기분에 젖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살림 정도 사는 것 가지고 양이 차지를 않고 마음속에서 바글바글 올라오는 욕망을 채울 길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 주기가 4, 5년은 되지 싶다. 그러면 다시 또 새 집이나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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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62503
9202
2017-12-19
보고픔이 그리움 되네

 

 
 작년 크리스마스 날 식구들이 큰 딸네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음식을 몇 가지 준비해서 큰 딸네 집으로 갔다. 현관을 들어서는데 애완견 금동이와 짱아가 먼저 나와서 반겼다. “금동아, 짱아야 잘 있었느냐”며 그들을 한 번씩 쓰다듬는 순간, 벼락이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다. 


 딸과 같이 상차림을 하는 동안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음식을 먹는데 금동이와 짱아가 곁에 와서 올려다보는 그 눈을 보는 순간, 다시 또 왈칵 그 자리에 벼락이가 없음이, 보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거였네 실감케 했다. 


 그것은 내가 딸네 집을 방문할 때면 개 세 마리가 식탁 옆에, 밑에 앉아 먹을 것 좀 달라는 간절한 눈빛, 선명한 눈망울이 거기에 그냥 있었다. 그 순간 와락 벼락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왔다.


 그래서 “서진아(손녀), 벼락이 보고 싶지, 보고 싶지 않아?” 하며 독백이기도 한 그 말이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벼락이가 보고 싶었다. 그랬더니 남편이 옆에 있다가 왜 애한테 그런 걸 묻느냐며 내 말을 제어하듯 했다. 


 그 순간 손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큰딸은 이미 눈가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우연하게 남편과 같이 큰딸 벼락이와 같이 드라이브를 갔다 오던 그 길을 지나게 되었다. 다시 또 그 순간 벼락이가 참 보고 싶어졌다. 


그 날은 벼락이가 ‘췌장암’이란 사실을 알고, 딸이 벼락이가 갈 날이 멀지 않았겠지 싶어 곁을 비우지 않음은 물론이요, 췌장암에 좋다는 음식까지 찾아서 해 먹이며 정성을 다하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딸도 그렇지만 벼락이 기분전환 겸 드라이브라도 시켜주자고 우리 셋이서 드라이브를 다녀오던 그 길이었다. 


 그 날 벼락이는 차에서 앉지도 않고 서서 편안하고 즐거운 표정이 역력했는데 그 모습이 가슴 시리도록 보고 싶었다. 벼락이는 그렇게 즐거운 나들이를 하고 돌아와 그날 밤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는 그 길인데, 우연찮게 남편과 같이 그 길을 지나게 된 거였다. 


 난생 처음 추억 어린 자리, 그것도 아름답고 그리움이 묻어있는, 벼락이의 살아있던 날의 마지막 모습이, 보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 먹먹할 만큼 밀려왔다. 


 그 후 며칠 지나 큰딸과 같이 밖에서 밥을 먹으며 벼락이 얘기가 나왔다. 내가 벼락이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보다 딸은 한층 더하리란 것을 난 안다. 벼락이는 딸아이가 어릴 때부터, 한국에서 데려다 키웠으니 16년이 넘는다. 그러니 벼락이의 부재가 때론 가슴 저리도록 보고 싶을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더더욱 알 수 있음은, 서진이가 아침에 데이케어에 가며 금동, 짱아한테 갔다 오겠다고 인사를 한다고 한다. 그런 손녀에게 벼락이한테도 인사말을 하라고 한단다. 그런 말을 들으니 딸아이가 아직도 벼락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물며 그리운 사람, 그리운 얼굴은 비록 세상을 떠났다 해도 단지 볼 수 없다는 것뿐 항상 곁에, 가슴 속에 있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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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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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9
무슨 사연이 있기에

 

 먼저 살던 아파트에서는 각종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곤 했다. 그러고 보니 새 이름을 아는 것도 몇 되지 않는데 게다가 새 울음까지 알고 있는 것은 더더욱 몇 안 된다. 가슴을 휘감는 듯한 울음이라면 소쩍새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 울음보다 더 아릿하게 ‘꺾꺾’ 우는 것처럼 들리는 새소리를 들으니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그 애의 울음이 그러려나 먼 옛날로 돌아가 생각에 젖는다.


 아마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여름방학이 되어 매일 집에만 있다 보니 친구들도 만날 수 없어 심심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가슴속을 차지하기 시작한 반 아이를 볼 수가 없어 그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아침이면 혹시 까치가 울지 않으려나 은근히 기다려졌다. 그것은 아침에 까치소리를 들으면 반가운 소식, 사람을 만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즈음 화투로 하루 운세를 떼어 보는 것을 배워서는 아침을 먹고 나서 화투로 ‘점괘’를 보기도 했는데, 어느 날 대문에서 뭔가 ‘툭’ 하는 소리가 나서 급하게 나가보니 항공봉투가 떨어져 있었다.


 겉봉에 그 애 이름이 쓰여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적막하기만 하던 날 한 통의 편지는 은근히 기다린 만큼이나 어떤 내용일까 두렵기도 했다. 항공봉투, 그때는 대부분 흰 봉투를 썼지 항공봉투도 그 때 처음 보았다. 봉투 안에는 공책 장에 짤막하게 편지라기보다 메모형식의 편지 한 통을 받게 되었다.


 내용인 즉은 ‘나는 너를 좋아해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애’ 이었다. 연애편지라 할 것도 없는 단문의 편지를 받고는 그 해 여름은 얼마나 달콤했던가. 지금 새삼 돌아봐도 가슴속에만 뭔가 모를 그리움으로 가득했건만 정작 서로 눈이라도 마주 치고 응시했던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우리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각각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애는 입학한 고등학교가 양에 차지 않아 재수를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만나는 건 고사하고 연락이나 겨우 들으며 지냈는가 싶었는데, 그 다음 해에 그 애는 모 고등학교 톱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으나 정작 고등학교 시절엔 언제 만났었나 만났던 장소도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 애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도 잘 했으니 반장이나 회장은 도맡아 놓고 했다. 그런 결과는 공부를 잘 하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책임감이나 통솔력이 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인물이 뒷받침 되었던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애는 고3 올라가는 겨울 방학이었다. 우린 그 애가 살고 있던 동네에 있던 스케이트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스케이트를 타고 있던 몇몇의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오듯 해서는 우리한테 인사를 했다. 그 애는 전교 학생회장을 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얼굴이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기도 해서 내게 장문의 편지도, 좋아한다 눈을 쳐다보며 말하지 못해도, 공부를 잘 하고, 전교생이 알아볼 만큼의 인물이니 장차 뭘 해도 확실하게 해낼 것이란 기대감이 있어 과연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 애일까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도 했었다.


 그러니 내 마음이 스르륵 풀어지는 것 같을 때면 스케이트장에서 몇몇의 남학생들이 몰려오듯 인사하던 그 순간, 그 애 역시 어깨에 적당히 힘까지 들어가 있었으니 그렇게 듬직해 보일 수가 없어 그 때를 상기해 보곤 했다. 


 그런데 난 대학을 들어가고 그 애는 취업을 하게 되면서 점차 사이가 소원해지더니 대학 3학년 때 내가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우린 저절로 멀어졌다. 그야말로 우리 그만 만나자, 도 아니었고 연락을 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길로 접어들었던 거다. 우리에겐 서로 ‘첫사랑’이기도 했건만 순수하고 여린 가슴에 설레던 핑크빛 감정은 그렇게 서서히 멀어졌다. 


 그 이후 우리는 각자 결혼을 해서 난 딸을 둘 낳고 그 애는 아들 둘에 딸을 하나 낳았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몇 년 지나는 사이 어느 날 그의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가 서른 세 살인지 그랬는데 달랑 아이들만 남겨놓고 교통사고로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새벽에 친척 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단다. 그러니 그 아내는 얼마나 정신 없이 무당집, 점집, 경찰서, 병원 등 안 찾아 다닌 곳 없이 한 달 이상을 다니다가 죽기 전에 잠깐 의식이 돌아와 집으로 연락을 해서 가족을 찾았다고 한다. 


만약 그가 끝내 의식도 찾지 못하고 타계하고 말았다면 아마도 신원 미확인자로 처리되고 말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너무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들리는 소리로는 그의 엄마가 청상으로 살며 그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차마 떼어 놓을 수 없어 이미 유명을 달리한 그의 엄마가 미리 데려갔다는 말도 들렸다.


그건 어디까지나 너무 애석해서 하는 말이지 손주 셋이 있는데 모성을 생각한대도 그럴 수 없고 진정 사랑했던 아들이었기에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명에 간 것도 모자라 한 밤중에 뺑소니 차량에 그리 되었으니 그 애통함이야 말해 무엇 할까. 


 나는 그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정녕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것이 무슨 업보인가, 왜 그의 아이들이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 너무 가슴이 아파오면서 얼핏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고3 여름방학에 2주 동안 우리시골의 절에 가서 있었던 적이 있다. 난 그때 스님한테 나와 그 남자의 사주를 넣고 물어봤다. 그런데 스님은 아무 말씀도 없었다. 난 순간 우리가 너무 어린 나이여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 스님이 사주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닐까 의아스러웠다.


 훗날 그가 요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이 떠올랐다. 스님은 그 애가 그렇게 일찍 갈 것을 알고 계셨기에 아무 얘기도 없었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인간에겐 분명 타고난 운명, 명운도 있다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그의 관계를 알고 있던 어떤 친구는 그와 결혼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가 나와 결혼을 했더라면 그렇게 일찍 비명횡사 하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 그만큼 그의 이른 죽음은 동창들에게도 너무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이따금씩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얘기를 하곤 했는데 난 전혀 이해도 되지 않았고 무슨 얘기인가 덤덤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엄마와 둘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왔을 그가 어린 아이들만 셋을 남기고 떠나고 말았으니 그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살아야 할 그의 아내까지도 애처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동안 내 삶, 나 살기도 바빴기에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는데 아침마다 그 새소리, 울음소리 중에 울다울다 지쳐 목이 쉰 듯한 새가 있어,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쩌면 그렇게 새의 울음소리도 다양할까 싶어 새삼 놀라곤 한다. 


아마도 그의 혼령이 있다면 그가 그 동안 아버지 없이 살면서 겪었을 삶의 ‘애환’을 이젠 그의 아이들이 셋씩이나 그 삶을 견디며 살아야 할 것을 알기에 그런 ‘처절’한 울음이 나오지 않겠나, 그 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면 무심해지지가 않는다. 


 그런 울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새는 도대체 어떤 ‘사연’을 가지고 태어난 새 이려나, 아름답고 예쁘고 귀여운 소리도 많은데 어찌하여 그런 소리밖에 낼 수가 없는지 마음이 참 무겁게 아파오는데 어디선가 ‘길 잃은 철새’ 유행가가 들려오는 듯하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
 돌아가지 않는 길 잃은 철새 밤은 깊어서 
 낙엽은 쌓이는데 밤은 깊어서 낙엽은 쌓이는데
 흐느끼는 소리만 흐느끼는 소리만 

 

 아마도 그의 혼령이 있다면 길 잃은 철새의 심정이 아닐까 꼭, 그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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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노추(老醜) (3)

 

(지난 호에 이어)
 한 번은 대학교 3학년 때 편입을 해서 남편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1학년 신입생 중에 남편을 노골적으로 따라다니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 우리 과 여학생이 내게 그냥 두고 볼 것이냐면서 따끔하게 충고 한 마디쯤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못마땅하고 불안하게 보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난 그 여학생에게 한 마디 말도 한 적이 없고 지금 생각해도 질투 같은 것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그 여학생이 나보다 더 예쁘다, 못하다 하는 그런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경우 선택권, 결정권은 남자한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대가 현실적으로 눈앞에 있는 두 명의 여자, 혹은 대학 내에서 볼 수 있는 여자들을 물망에 올린다 해도 그것은 남편의 권한이요, 남편 자신도 마음 가는 대로 할 수밖에 없겠다고 보았다. 내가 옆에서 나선다고 해봐야 그 남자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없기에 쓸 데 없는데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언젠가도 난 친구와 도서관을 올라가고 있었고 그들은 나오다가, 남편과 그 아이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친구도 옆에 있는데 남편의 팔짱을 끼는 것을 보기도 하였으나 시샘하는 질투 같은 감정도 일지 않았던 것 같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남편이 야구장을 간 것을 알고는 그 여학생이 야구장까지 남편을 찾아가기도, 밤늦게 전화를 해서 불러내기도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도 과연 남자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흐를까 볼만하기도 하겠네 하는 생각은 했었다. 


 그 후 몇 번 그 아이의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남편도 더 이상 그 애에 관해 언급도 나 역시 물어본 것 같지 않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나도 옷 꽤나 차려 입고 미니스커트도 뒤지지 않게 입었다 싶었는데, 그녀와 난 거의 2, 3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음에도 확실히 나이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예쁘지도 않은 얼굴이다 싶었어도 나보다 치마 길이가 더 짧기 때문이었는지 그 애가 더 생기발랄해 보였다. 또한 난 내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다 싶었는데 그 애는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난 한 번도 남편에게 그 애에 대한 감정이나 어느 만큼의 사이였느냐고 물어 본 것 같지도 않다. 마음을 졸이고 끓이며 그리했던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내 감정의 소관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즈음이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여배우와 감독 사이에 신인 젊은 여배우의 염문설이 끼어 들었다. 끝내는 그 젊은 배우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는 소문이 현실로 받아들여질 즈음 나이든 여배우의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엔 그토록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보이던 그 배우도 나이가 들었음을 영화 화면을 통해 보고 느끼며 아무리 절세미인이라 해도 ‘세월’ 앞에는 누가 따를 수 있겠나 싶어, 내가 남자라 해도 그 젊은 여배우한테 ‘마음’까지 빼앗길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이제야 이만큼 살고 보니 어찌 보면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기도, 신은 더더욱 공평한 것이 아닌가 싶어, 가는 세월대로 마음을 비우고 순리대로 살아감이 현명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 젊은 여배우가 다른 여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가정을 깨도, 자식까지 낳고 사니 잠시나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득의만만 함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도 나이를 먹게 되고, 평생 가슴 한 켠의 죄의식은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자식들 또한 적자들이 갖게 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정이 아니라, 소실의 자식이라는 조금은 떳떳하지 못한 감정도 평생을 잠재의식 속에라도 남아 있을 것이다.


 남자 역시도 그 젊은 여자와의 불 같은 사랑이 영원할 것 같았겠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사랑한다는 감정도 점점 퇴색되어 감을 알고, 느끼게 될 것이다. 세월이 한참 지나 제정신이 돌아 와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볼 때 그 동안 처자식한테 어떻게 했었는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처의 가슴도 식을 대로 식어 냉랭하기만 한 상태이니 본처한테 돌아간다 해도 환영 받지 못할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그때는 이미 남자 나이도 꽤나 들었을 테니 그때는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기도 하니 자승자박이요, 자업자득,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할 수 있게 된다.


 세월은 그렇게 저렇게 흘러 너도 가고 나도 가게 된다. 사랑도 미움도 시들해지고 빈 가슴만 남아 있는 것 같은 허전하고 스산한 감정이 감돌 때가 더 많아진다. 과연 한 세상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스친다.


 그래도 다행이고 고마운 것은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고 세상 헛 살았다는 허무한 중얼거림을 하지 않아도 됨은 다시 왕룽의 마지막 순간을 보면서 하게 된다. 


 왕룽이가 죽어서는 ‘본부인’ 곁에 묻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것은 왕룽, 자신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 온 여자이기 때문이요, 자식을 낳아 주었음이요, 자신이 소실을 들였음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있어 그리하지 않았겠나 싶다. 


‘노추’, 어쨌거나 남자로 태어나 늙어감보다 여자로 태어나 늙어감이 더 서글프고 아릿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모두가 자연의 이치이지 싶으니 마음이 그냥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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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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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6
노추(老醜) (2)

 

(지난 호에 이어)
 난 삼순이와 럭키를 보는 마음이 펄벅 여사가 쓴 ‘대지’에서 왕룽이가 기생 연화를 사랑할 때 본 부인이 지금 삼순이 마음이나 모습일 것이요, 젊은 여자에게 향하는 마음이 지금 내가 럭키에게 느끼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대지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본 부인이, 남편이 기생 연화를 사랑하게 된 것은 자신의 못난 입술 때문이라고 자신의 입을 쥐어뜯는 대목이 나온다. 


 난 그 대목을 보면서 왕룽이가 본 부인이 못났기 때문이 아니고 아무리 절세미인 양귀비 같은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 해도 나이가 들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여긴다. 아무리 잘난 미인이라 해도 나이가 든 사람과 적당히 예쁘긴 해도 젊다면 그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은 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보고 싶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정이나 느낌을 접어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시대가 많이 변하기도 해서 이젠 오히려 좋은 감정을 가슴에 담고 묻어두기 보다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서슴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도 오래 가지를 않기 때문이다. 


 지는 꽃과 피는 꽃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우리가 결혼을 해서 딸을 둘 낳고 어렵사리 대리점을 하게 될 때였다. 그 즈음 마침 캐나다에서 사시던 어머님께서 서울에 나와 계실 때였다. 그런데 남편이 대리점을 하게 되면서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친척 조카 애를 데리고 왔다.


 그 조카 애는 작은 아버님 큰 아들 맏딸이었는데, 시골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마침 남편이 사업을 하게 되며 경리도 필요하니 그 애가 와서 남편과 나를 도와주며 점차 서울에서 자리잡고 시집을 갈 수 있었으면 했던가 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조카 애는 인물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건강한 몸매에 긴 생머리가 유난히 돋보였다. 얼마 지나는 동안 이건 아니다 싶어 고심하던 끝에 나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그 아이를 도로 시골로 내려 보내기로. 


 며칠 지나는 사이 가만히 보니, 그 아이가 남편과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지만 오히려 내가 그 아이 시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그 아이와 남편이 아침에 같이 출근을 해서 밤이 되어서야 들어오게 되니 시간적으로 나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남편과 그 아이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난 그 동안 밥을 해서 남편과 그 아이에게 차려 주고, 옆에서 앉아 있기도 뭣해서 난 아이를 업고 밖을 서성이게 되었다. 


 그때가 마침 겨울이어서 밖에서 떨다가 온 사람들에게 아랫목에 깔았던 이불까지 걷어주며 따뜻한 자리를 내주고 밥상까지 갖다 바치고는, 추운 겨울 아이를 업고 밖을 서성이던 난, 내 꼴이 무엇인가 싶어 스스로 초라한 생각이 들었다. 


 난 결혼을 해서 집에만 묻혀 있으면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고 보니 이미 시어가는 파김치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그 아이는 이제 파릇파릇 솟아나는 풀잎 같은 생각이 들곤 하니 나 자신이 더 비감한 생각만 들었다. 아마 지금 기억으로는 한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그 아이는 시골로 그냥 내려가야 했다.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오고 며칠 지나는 사이 가만히 보니 난 이미 지는 꽃이요, 시들해지며 생기를 잃어간다 싶었으니, 나 자신이 초라한 생각만 들어 첫째는 그것이 견디기 어려웠고, 둘째는 아침에 남편과 같이 출근을 했다가 저녁에 같이 들어오는 그 아이가 나를 도와 줄 일은 없고, 오히려 내가 그 아이 시중을 들어야 하니 내 입장에서는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에게 캐나다에 들어가시기 전에 그 아이를 시골로 내려 보내도록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방을 세를 줘야 하겠기에 방이 여유가 없어 안 되겠다고 시골로 전화를 하시게 되었다. 그 아이는 졸업식에 참석을 한다고 내려가서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는 올라오지를 않았다. 


 그 이후 남편은 또 가게에서 일할 사람을 시골에서 데려 오겠다고 하기에 내가 완강하게 거절을 했다. 시골에서 누가 오면 내가 집에서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 난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서울에서 출퇴근 할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그래서 그 후로 더 이상은 그런 일로 해서 군식구를 내게 붙이는 일은 없었다. 


 주변에서 남자들이 데리고 있던 여직원, 경리나 비서를 좋아하게 되거나 바람이 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보기도 한다. 그렇게 잠시 바람으로 끝이나고 마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본처와 헤어지고 새로 눈이 맞은 여자를 안주인으로 맞아들이는 경우도 더러는 있다. 


 남편이 평소에 하던 말대로라면 경리 애가 인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 지론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 가정이 이만큼이라도 유지되어 오기 위한 운명이었는지 대리점을 하게 되면서 두 번째로 오게 된 경리 미스 리가 만 10년은 되었다. 미스 리의 인물은 여자다움은 별로 없었지만 정직하고 성실했기에 대리점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미스 리의 공도 적지 않았다고 본다. 


 남편과 미스 리의 감정이야 그들만의 것이었을 것이지만, 주변에서 둘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을 듣기도 하였으나 난 그런 사적인 감정까지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내가 나서서 좌지우지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는 내가 옆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경우지만 그와 유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 몇 번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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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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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2
2017-11-16
노추(老醜) (1)

 

 개 세 마리를 키울 때 얘기다. 한 마리는 다섯 살 되는 말티푸 종류의 암놈인 삼순이, 한 마리는 2살 반 되는 사냥개 종류인 수놈을 중성 수술 시킨 벼락이, 다른 한 마리는 한 살 된 말티즈 순종의 수놈 럭키다. 


 한 마리만 키우기 시작했는데 벼락이는 큰딸이 서울에 나가 있는 동안 키우다가 두고 올 수가 없어 데려와 한 식구가 되었다. 또 럭키는 작은 딸의 친구들이 키웠는데 그들이 키울 수가 없어 데려와 그야말로 덤으로 한 마리 더 키우게 되었다. 원래 세 마리씩은 키우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아졌다. 


 난 개들을 보면서 어쩌면 사람과 그렇게도 똑같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사람이나 동식물까지도 나이 들고 늙어감이 눈에 보이는 듯 제일 나이가 많은 삼순 이를 볼 때면 처연한 생각이 든다. 


 삼순이는 요즈음 털이 많이 길어 더 나이 들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한 살배기 럭키에 비하면 다섯 살이나 되었으니 어느새 몸도 무거운가 보다. 


 럭키는 수놈이고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 말 그대로 ‘팔딱팔딱’한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이 방 저 방 침대 위로 팔짝 뛰어올라 왔다가 또 팔짝 뛰어 내려간다. 삼순이 같으면 사뿐 올라오고 사뿐 내려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런데, 럭키는 오르고 내리는데 몸에서부터 생동감이 실린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노라면 어느 사이 또르르 따라서 내려온다. 그렇게 또르르 소리가 나도록 마치도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잘도 따라 다닌다. 따라서 내려오다가는 나보다 조금 빨리 내려간다 싶으면 그 자리에 멈칫 섰다가 올라가려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게다가 아침에 대소변을 보이기 위해 나갈 때면 쉬가 급하기 때문인지 바깥에 나가는 줄 알고 좋아서 그리 하는지 팔짝팔짝 내 허리까지 뛰어 오른다. 그런 럭키에 비하면 벼락이나 삼순이는 점잖다고 해야 할 만큼 조용하다. 


 벼락이보다 삼순이를 보는 마음은 마치도 남편이 새파랗게 젊은 씨앗을 들였을 때 여자의 시선, 모습, 마음이 그러할까. 젊은 여자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런 모습이 보여 삼순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그것은 그 동안은 삼순이만 예뻐하다가 럭키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내가 럭키를 더 예뻐해 하는 것 같으니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거나, 나와 럭키가 삼순이 시선에서 벗어나면 둘이 어디 있나 찾는 모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런 경우 내가 남자라 해도 이미 젊은 여자한테 몸과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데, 아내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면 마음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젊은 여자, 애인, 씨앗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말이나 행동이 보이면 마음은 더더욱 멀어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럭키가 우리 집에 오기 전엔 삼순이가 나이 들었다, 둔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예쁘기만 했는데, 지금은 럭키와 삼순이를 보면서 ‘젊음과 나이 듦’의 차이가 확연하게 눈에 보인다. 그 예쁘기만 하던 삼순이보다 럭키는 어찌 그렇게 우습게 생겼나 싶은데도 삼순이보다 더 예쁘니 어쩌랴. 


 삼순이가 옆에 있으니 럭키를 마냥 예뻐만 할 수도 없어 삼순이가 없을 때 한 번 더 안아주곤 한다. 삼순이 한테는 이러면 안 되지 싶어 억지로 가는 손길이기에 살갑지가 않다. 그러나 럭키는 그냥 보기만 해도 예쁘고 좋아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와 쓰다듬는 손길이다. 


 그것은 마치도 젊은 씨앗을 들인 남자가 본 부인 모르게 씨앗이 예뻐 못 견디는 심정이 그러 했을까 싶기도 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이 그리 흘러가니 아내한테 미안해서도 내키지는 않지만 다정한 척 말도 건네고 선물도 준비해 보지만, 마음은 이미 젊은 여자한테 가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어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그런 정경이 느껴진다. 


 럭키가 예뻐 한 번 더 안아 주려면 삼순이는 옆에서 시샘하는 서글픈 눈빛, 게다가 때로는 엄마가 럭키를 더 예뻐해 주나 감시하는 듯한 눈초리도 보이니 그런 눈빛도 싫은 마음이 든다. 


 럭키는 잠을 잘 때면 큰딸과 같이 자는데 삼순이는 식구들이 다 거실에 있어도 내가 방으로 들어오면 으레 따라 들어온다. 요즈음은 침대에도 빨리 올라오지를 못하고 낑낑거릴 때가 있어 그것 또한 보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려버리고 만다. 


 럭키가 오기 전엔 삼순이를 꼭 안고 자다시피 했는데, 이젠 옆으로 파고드는 삼순이가 다시 또 달갑지도 않은 마음이 들어 애써 한 번 더 쓰다듬어 주며 남자의 마음이 이럴까 싶은 생각이 스친다. 


 그런대로 금슬이 좋았던 부부가 마음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성과는 상관없이 몸과 마음이 다른 여자, 젊은 여자를 찾으며 부인에게 미안해서 억지로라도 본 부인을 한 번 더 안아주고 사랑해주려는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 


 ‘노추’ 아무리 예쁜 꽃도 시들고 나면 이미 그것은 꽃으로서의 본분, 생명은 끝이다. 그렇듯 여자 역시도 나이 들며 시들해지고 볼품없이 늙어감을 뉘라서 피하고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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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6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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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9
잡식성을 가진 남자

 

 이라크에서 왔다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루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약간 뚱뚱한 몸집에 대머리에 안경을 쓰고는 오후 4, 5시쯤에 와서 보통 4, 5시간을 앉아 있다가 간다. 


 매일 같이 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쿼러 하나씩을 팁으로 주며 매일 같이 오는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더러는 가게에 오는 여자 손님과 얘기를 하기도 하며, 때로는 커피 한 잔씩을 사 주기도 해서 인심이 좋은 남자처럼 알고 있었다. 


 어느 날은 약간은 모자라 보이는 여자와 한 자리에 앉아 무슨 얘기인가를 주고받더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한참 만에 돌아오더니 여자가 20불짜리를 내고는 커피 한 잔을 샀다. 조금 전에 그 여자는 커피 한 잔도 사지 못해 루이가 커피 값을 냈기에 돈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어느 날도 보니 조금 모자라 보이는 여자와 루이가 밖에서 얘기를 하고 있기에 같은 동네에서 오래 살다보니 아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라며 그날도 역시 인심 좋은 남자라며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날이야말로 살짝 제정신이 아닌 여자가 가게엘 왔다. 그 여자는 하얀 티셔츠를 입었는데 어깨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며 옷이 구질구질한데다가 땀을 흘려 얼굴은 번들번들하고 머리에 기름때는 잔뜩 끼어 있고 안경까지 썼는데 루이와 몇 마디 주고받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그들을 보며 루이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손님에게 물으니, 나이 든 매일 오는 손님이 친절하게도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루이는 그 여자하고 저녁을 먹고는 룸으로 갈 것이라고 하기에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더니 정말이라고 하기에 서로가 웃고 말았다. 


 한참 만에 루이가 다시 돌아와서는 티를 한 잔 마시고는 몇 시간을 앉아 있다가 돌아갔다. 그 다음 날 친절하게도 루이에 관해 얘기해 주었던 빌이라는 남자가 와서 루이가 나중에 왔더냐고 묻기에 왔었다고 답변해 주었다. 


 그랬더니 루이가 어제 그 여자와 관계를 갖은 다음 여자가 울고 난리가 나는 바람에 구치소에 3시간 동안 갔다가 왔다고 내게 자세하게 일러주는 것이었다. 


 난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매일 같이 커피숍에 나와 앉아 신문을 들썩이거나 정상이 아닌 여자와 말을 건넸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구나 싶어, 게다가 그 날 그런 차림을 한 여자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이 너무 우스워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빌이 얘기하기를 와이프와 헤어진 지 15년이나 되어 그럴 수도 있으니 그냥 보아 넘기라는 말투처럼 들리는 것도 재미있어 웃음이 쿡쿡 터져 나왔다. 
 아무리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에 굶주렸기로 치마만 두르면 다 여자로 보인다 해도, 동네에 왔다 갔다 하는 약간은 머리가 돈 듯한 여자와 어떻게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이해를 하려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빌이 얘기하기로는 어제 그 여자는 남자 화장실 키를 들고 들어가는 여자이니 말해서 무엇 하겠느냐며 루이가 아직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남자 화장실 키를 들고 들어간다 함은 글조차 모르는 여자임을 내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며 잠시 지나니 루이가 가게에 나타났다. 난 정색을 하고 물어 볼 수도,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어 매일같이 “루이, 써니, 하아 유”하고 묻던 인사말도 할 수 없이 티 한 잔만 주고 말았다. 


 아뿔싸! 그 후 들리는 얘기로는 동네에 이 여자 저 여자와 관계를 갖는다는 얘기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또 매일같이 오는 전직 경찰관이었다는 아직도 미혼인 백인 남자 왈 “루이가 스투피드하다”고 했다. 그제서야 루이가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허리가 아프다고 하기에 그럼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아마 정부에서 돈을 받지 않겠느냐는 얘기에 하는 일 없이 그 나이에 혼자 살려니 정신이 그 정도라도 되는 것이 다행이라며 서로 혀를 차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루이가 길 건너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을 몇 번 보았는데 그때도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랬음을 알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식성이 까다롭지 않은 사람은 성격은 원만한 반면에, 식성이 까다롭거나 성깔이 있는 남자들에 비해 여자를 가까이 할 기회가 있으면 사양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원하지 않는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여자를 밝히든 여자관계가 복잡하든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사생활인 것이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생각을 해봐도 티 한 잔을 사며 매일같이 쿼러 하나씩을 “훠 유”하며 줄 수 있는 루이의 심성은 다른 여자들에게도 같겠지 싶으니 그의 따뜻한 마음이 오히려 더 고맙게 느껴진다. 부디 몸이나 해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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