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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100주년 안보 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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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경달(근대 조선과 일본 저자)이 본 조선


 조선 왕조의 건국이념은 유교적 민본주의였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한 정치를 주장했다. 왕도정치로 자애심이 넘치는 군주에 의한 덕치로 이상국가를 지향한다 했다. 고로, 조선의 정치문화는 전통적인 유교적 민본주의, 즉 인군만민의 정치문화였다.
유교적 민본주의 정치문화가 사대부뿐만 아니라 민중 세계까지 널리 침투해 있어, 민란, 농민전쟁조차도 민중의 항거는 유교적 민본주의 질서에서 벋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와 사뭇 다른 모습이어서, 특히 아전의 예를 보면 백성과 매일 접촉하는 하급관리로, 이들은 가가호호의 세금을 걷고, 행정실무를 담당하며, 지방관아의 유지비, 경비 등, 때로는 외부 고관이 왔을 때는 이의 접대 등 모든 관아의 치다꺼리를 하면서도 봉급이 없었다.
이들은 일을 하면서도 이를 양반에 대한 의무로 생각해 보수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비리가 시작됐다. (일본의 경우 이런 일은 봉급을 받는 하급 무사가 담당했다.)
조선 왕조는 8도로 된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밑에 350개의 읍(또는 군, 현이라는 다른 명칭)이 있고, 다시 그 밑에 면, 동, 리라는 말단 행정 편재로 짜여있었다.
도에는 관찰사(감사)가 파견되어 읍을 감독하고, 읍에는 수령이 파견되어 행정, 사법, 징세 등의 업무를 보았다.
 한편, 19세기 들어 정조가 갑자기 죽자(1800년), 11살의 순조가 즉위한다. 정조는 당시의 세도가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아 왕권에 안정을 기하고자 했으나, 세상은 뜻과 달리 흘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불러온다.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에 왕위에 오른 헌종도 같은 생각에 풍양 조씨를 왕비로 불러들였으나 같은 일이 반복되고, 이는 19세에 왕이 된 철종까지 이어진다. (다음 고종시 대원군이 이를 시정하려 해보지만…)
수령의 권력은 끼리끼리 증대되고, 이들은 지방의 아전, 양반과 결탁, 백성의 피를 빤다 (비숍은 이를 흡혈귀라 했다).
이런 상태에서 위생에는 관심 쓸 여력도 없어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가 창궐 1820, 1860년에는 수십만이 사망한다.

 


 2. 브루스 커밍스(한국 현대사 저자)가 본 조선


가. 양반과 상놈의 세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반에 속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다양해서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나, 17세기 말에는 인구의10% 내외가 자신을 양반이라 생각했고, 19세기에 이르러 더 많은 숫자가 자신을 양반이라 주장했다.
조선 왕조에서 문과에 급제한(500년 기간 중 1만4,600명) 사람을 조사하면 그들의 40%가 21개 가문에서 배출됐는데, 우선 이들이 양반 가문이다.
조선의 전통적인 신분체계는 양반 외에 백성 대다수인 농민과 소수의 하급서리(아전), 상인, 그리고 천민계급으로 최하층 세습집단인 백정, 걸인, 갖바치(가죽신 제조업자)가 있었다.
상인은 천민보다는 높은 신분이지만, 소위 유교 엘리트들은 상업활동에 눈살을 찌푸렸고, 그 결과 억상정책이 기조였다.
조선은 농본주의를 주창했다 하나 말뿐으로, 양반들을 먹여 살리고, 각종 힘든 일은 도맡아, 그들의 삶은 특히 조선후기에 고달팠다. 농민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수확량의 반을 지주에 바치고, 또한 국가 부의 원천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잡세를 부담해야만 했다.
1462년 한양에만 20만 명의 노비가 있었고, 1663년 한양 인구의 75%가 노비였다 한다. 아마 전 인구의 30% 정도가 노비였을 것이다. 노비에는 두종류가 있었으니 하나는 국가 소유의 관노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으로 사고 팔리는 사노이다.
노비의 가격은 국가가 정했다. 1398년, 태조 당시 노비 3명이면 좋은 말 1마리를 살수 있었다. 노비들의 생활 여건은 가난한 소작농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지위는 엄격히 세습되어 성종 때 어느 부자 노비가 자신의 아들 4명을 면천시키기 위해 쌀 3000석을 정부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양반은 사실상 아무것도 국가에 내는 것이 없고 군역, 노역에서도 면제됐다.


나. 조선의 쇠퇴기


16세기 초 사화, 16세기 말 일본침략, 17세기 만주의 침략 등으로 조선은 심하게 쇠약해졌다. 이어 19세기 들어 전염병이 돌아 수십만이 죽고 굶주린 이가 시신을 먹는 일도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만주족에 축출되어, 북방 야만족이 중국을 다스리게 되니, 조선은 스스로 성리학의 최후 수호자라는 생각이 생겨 유교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이는 당파 싸움을 더욱 격하게 해, 조선의 쇠퇴를 앞당겼다.


다. 조선의 상업


1960년대가 아니더라도, 1860년대에 조선을 여행한 사람치고 조선을 상업국가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한국 현대사의 저자인 커밍스가 1967년 평화봉사단원으로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은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상업적이 아닌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막상 한국에 와서 서울의 북적거리는 시장을 보고,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몹시 애를 먹었다.
사실, 서울에는 시장이 언제나 있었다. 종로라고 하는 대로를 따라 작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 가게들은 국가의 면허를 받아 운영했으며, 보부상이라는 순회행상들이 등짐이나 손수레에 물건을 싣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다니고, 도붓장수가 커다란 쇠 가위를 찰각거리며 노래, 타령, 호객소리를 흥겹게 하며 장사를 했다.
그러나 조선의 관리들은 거의 언제나 간섭하며 상업의 싹을 잘라버리고는 했다. 졸부가 흥성하고, 농민이나 노비가 돈을 벌면 제 분수를 잊어 다스리기 어려워지고, 양반질서에 구멍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결국 20세기 후반, 양반 계층이 몰락하고, 국가의 간섭이 줄어들면서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 후 100년, 게으르고 무감각하기만 했던 조선인이 매사 ‘빨리 빨리’하는 국민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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