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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은퇴

 

 2006년 6월24일 새벽 2시께, 독일 북부도시 하노버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텅 빈 역 승강장에서 월드컵 취재기자단 숙소가 있던 뒤셀도르프로 내려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며칠간 쌓인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독일에서 모든 일정을 함께하던 타 언론사 스포츠기자 3명의 일행이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운 밤공기만큼이나 분위기는 무거웠다. 더 이상 월드컵을 취재할 수 없다는 아쉬움과 공허함, 축구대표팀에 대한 안타까움이 뒤범벅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진출의 기세를 등에 업은 한국축구대표팀은 독일에서 원정 첫 월드컵 16강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은 아프리카의 복병 토고와 6월13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났다. 전반 선제골을 내주고 0-1로 끌려가다 후반 이천수의 프리킥 동점골과 안정환의 역전골로 2-1 승리를 거뒀다. 한국의 월드컵 원정 첫 승이었다.

 

 18일에는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를 맞았다. 한국은 전반 10분만에 앙리에게 선제포를 얻어맞았으나 후반 35분께 박지성이 극적인 동점골을 만들었다. 붉은악마는 물론 현장 기자석도 난리가 났다. 프랑스 기자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탄식을 뱉었고, 60여 명의 한국기자단은 얼싸안고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 1승1무로 승점 4 확보하며 16강에 다가섰다.

 

 스위스와의 결전을 하루 앞둔 22일, 아드보카트 감독은 이례적으로 대표팀 훈련을 전면 공개했다. 훈련이 끝난 뒤에는 “기자들이 독일에 더 오래 머물게 하겠다”며 농담을 건네는 여유를 보였다. 이때 이미 기자단은 스코틀랜드 전지훈련을 포함해 한달 이상 유럽을 돌며 대표팀을 취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0-2 패배였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이천수는 그라운드에 엎드려 통곡했다. 축구선수에게 월드컵은 그런 것이다.

 

 당시 한국대표팀에는 좋은 공격수가 많았지만 스트라이커 이동국의 부재는 아쉬웠다. ‘라이언 킹’ 이동국은 2005년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쿠웨이트와 우즈벡 등을 상대로 득점포를 가동하며 절정의 기량을 보였다. 하지만 독일로 향하기 직전 열린 K리그 경기에서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고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2002년 “재능은 있지만 노력하지 않는다”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혹평을 받으며 안방에서 열린 월드컵에 구경꾼 신세가 된 이동국은 큰 슬럼프를 겪었다. 절치부심 끝에 기량을 되찾았으나 독일월드컵에도 이동국의 자리는 또 없었다. 훗날 이동국은 “독일로 떠나기 직전 무릎을 다치고는 새벽마다 그저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고 털어놨다.

 

 이동국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이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하던 날, 후반 중반 투입돼 대포알 같은 중거리포 한 방을 날리며 차세대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동국이 다시 월드컵 무대를 밟기까지는 무려 12년이 걸렸다.

 

 2010년 남아공 대회에서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한국대표팀은 사상 처음 원정 월드컵 조별리그를 통과해 16강에 올랐고, 우루과이와 8강 티켓을 두고 맞붙었다. 후반 42분, 1-2로 뒤지는 상황에서 이동국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상대 수비를 허물고 침투한 이동국의 발끝에 패스가 전달된 것이다. 하지만 잔인한 운명의 장난인지 이동국의 오른발 슛은 제대로 맞지 않았고, 우루과이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를 통과한 볼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그라운드에 힘없이 데굴데굴 굴렀다. 볼이 골라인을 넘으려는 순간 수비가 걷어내면서 동점 기회는 무산됐다. 8강 진출 실패에 대한 비판이 이동국에게 집중됐고, “이건 내가 생각했던 월드컵의 결말이 아니었다”며 이동국은 눈물을 삼켰다.

 

 이동국은 한국 축구가 낳은 레전드다. 그는 아시아청소년대회 득점왕(98년), 아시안컵 득점왕(2000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 K리그 8회 우승 등의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축구선수로는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42살. 이동국이 10월28일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올 시즌 K리그 개막전에서 시즌 1호 득점포를 가동할 만큼 그는 여전히 경쟁력이 있지만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였다. 자신이 아닌 부모님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다. “30년 넘게 ‘축구선수 이동국’과 함께 하신 아빠도 은퇴하신다고 하셨다. 그 말씀에 가슴이 찡했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해 이제는 첫째 둘째 딸 쌍둥이, 셋째 넷째 딸 쌍둥이, 다섯째 아들을 둔 이동국은 언젠가 방송 인터뷰에서 “셋째 넷째 딸에게 아빠가 하고 싶은 일, 축구를 하면서 박수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네 딸은 물론 막내 아들 ‘대박이’에게도 자랑스럽게 뛰며 골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당당하게 은퇴했다.

 

 이동국이 한창 뜨던 시절 한국 축구장에는 “동국아, 나랑 살자”는 소녀팬들의 애교 섞인 응원 현수막이 나부꼈다. 또 한때는 중요한 경기에서 득점에 실패하며 대한민국 ‘욕받이’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떠나는 이동국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은퇴하는 시점에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 또 다섯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노력하는 자세 모두 우리를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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