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인간의 굴레와 불교의 삼독(三毒: 탐·진·치)
소설의 제목인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는 인간을 고통 속에 묶어두는 정신적, 감정적 구속을 의미하며, 이는 불교에서 모든 고통의 근원이라고 보는 세 가지 근본 번뇌, 즉 삼독(三毒)과 정확히 연결된다.
2. 필립 캐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삼독
1) 탐 (貪, 갈망과 집착) (성경참조: 누가복음 12:15, 골로새서 3:5, 디모데전서 6:9–10)
필립의 삶에서 탐(貪)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밀드레드 로저스에 대한 병적이고 파괴적인 집착(Attachment)이다.
갈애(渴愛)의 실체: 필립은 밀드레드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하고 경멸과 멸시만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향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 때문에 재산과 명예, 시간까지 모두 탕진한다. 불교에서 갈애(Tanha, 목마름)는 고통을 낳는 원인인데 필립은 밀드레드라는 대상을 통해 끝없는 고통을 자초하며 스스로 굴레에 갇한다.
- 쾌락의 덧없음: 필립은 밀드레드를 통해 순간적인 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그 쾌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더 큰 고통을 남긴다. 이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리, 즉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고통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2) 진 (瞋, 분노와 적개심) (성경참조:마태복음 5:22, 에베소서 4:26–27, 로마서 12:19–21)
진(瞋)은 필립의 내반족(clubfoot)이라는 신체적 조건과 외부 환경에 대한혐오(Aversion)와분노(Hatred)로 나타난다.
- 신체적 고통과 세상에 대한 미움: 필립은 자신의 장애가 세상을 향한 증오와 비관론의 뿌리가 되었다고 느낀다. 이는 삶에서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의 원인을 외부(타인, 세상, 운명)로 돌려 분노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번뇌다.
- 미움의 굴레: 냉정한 외삼촌에 대한 미움 역시 필립 진심을 키우는 요인이 된다.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고, 필립은 이 부정적인 감정의 굴레에 갇혀 어린 시절부터 불행했다.
3) 치 (癡, 어리석음과 환상) (성경참조: 에베소서 4:17–18, 잠언 1:7, 로마서 1:21–22)
치(癡)는무명(無明, 진리를 모르는 어둠)을 의미하며, 이는 필립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 삶의 패턴에 대한 환상: 필립은 헤이워드 같은 친구들의 철학을 따라가거나 예술, 종교, 이념 등 외부에서 인생의 패턴(figure in the carpet)을 찾아내면 자신의 고통이 해소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갖는다. 이는 삶의 본질인무상(無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갈구하는 무명의 상태이다.
- 자기 기만: 밀드레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녀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관계를 지속하는 자기 기만 역시 치심의 발현이다. 그는 고통을 통해 진실을 볼 때까지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서 방황한다.
3. 필립의 깨달음과 불교적 해탈
서머싯 몸은 필립이 고통의 삼독에서 벗어나 평화에 이르는 과정을 불교의 해탈과 유사하게 묘사한다.
1) 집착의 소멸 (탐의 소멸)
필립은 밀드레드와의 관계가 완전히 파국을 맞고, 극심한 가난과 절망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갈망(탐)의 본질을 깨닫는다. 그는 더 이상 밀드레드를 쫓지 않음으로써 그 관계가 초래했던 고통을소멸(Nirodha)시킨다. 이는 불교의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와 같다. 집착이 사라지자, 그는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느낀다.
2) 무상(無常)의 깨달음 (치의 소멸)
필립은 오랜 방황 끝에 중요한 깨달음에 이른다.
"인생에는 어떤 패턴도, 어떤 의미도 없다. 삶은 직조된 카펫이 아니라, 의미 없이 흩뿌려진 우연한 매듭들의 연속일 뿐이다."
이 깨달음은 무상(無常, Anicca), 즉 세상 만물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고 영원한 의미도 없다는 불교적 통찰과 일치한다. 그는 삶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환상(치)을 버리고, 현실의 단순함과 소박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3) 소박한 평화 (팔정도와 유사한 실천)
마지막에 필립은 의사로서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샐리 애설니라는 평범하고 심신이 건강한 여인과 관계를 맺으며 소박한 행복을 선택한다.
- 그는 세상의 화려한 욕망이나 철학적 진리 대신, 친절함, 노동, 그리고 가족과의 안정된 일상에서 만족을 찾는다.
- 이는 거창한 깨달음이나 신의 구원이 아닌, 일상 속에서 바른 견해, 바른 생활, 바른 마음가짐을 통해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려는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적 실천과 유사한 결론이라 할 수 있다.
팔정도(八正道)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 바르게 기억하기(알아차림)
정정(正定): 바르게 집중하기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