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겨 보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19세기 중엽, 남북전쟁 전까지 미국 남부사회는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노동의 대가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대부분의 노예들은 한번도 자유를 누려 보지 못하였고 노예신분으로 남겨져 있었지만 그래도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려 했던 흑인 노예들이 그들 중에 있었다. 1800년대 미국 노예들 중 자유와 인권을 갈구하였던 흑인들의 꿈에 그리던 최종 정착지는 캐나다였다.

1830년대 초, '미주리주' 담배농장의 흑인노예 ‘존 안델센’은 7살 이전에 흑인노예였던 부모가 다른 주로 팔려가는 바람에 고아 아닌 고아로 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타고난 근면함과 부지런한 성격의 안델센은 열심히 노동을 하여 비록 법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혼이지만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결혼을 한 후 전보다 일을 게을리 할 것이라 생각한 그의 주인은 그를 다른 농장주에게 팔게 되고 그는 가족과 떨어지게 된다. 부인과 의논 후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캐나다로 탈출을 시도하던 중 안델센은 추적자들 중 한 명에 생포되나 잡혀가기 전 단도로 그를 살해한 후 천신만고 끝에 디트로이트를 거쳐 온타리오주 윈저에 도착하게 된다. 브램튼 인근의 칼레도니아에 거주하던 1860년, 안델센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흑인노예 친구를 알게 되었으며 그를 믿고 자신의 과거를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친구라고 믿었던 친구의 고발로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게 된다. 1심에서 유죄로 판결되어 미국과의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미국 미주리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노예 폐지론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언론의 도움으로 재심을 받게 되며 살인죄는 인정되나 ‘인신보호청원(헤비어스코포스) 요청’이 받아들여져 일단은 석방된다. 그후 1862년 크리스마스날, 존 안델센 은 미국 미주리주로 범인 인도 대신 그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리비에라로 본국 송환된다.

 

 

 

지난 2월1일, 토론토시는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토론토의 Bright St. 와 St.Paul St. 사이의 골목을 ”Henry Box Brown Line"으로 명명(命名)]하였다.

‘헨리 박스 브라운'은 1849년 미국의 버지니아주에서, 그의 부인과 자녀들이 다른 주의 대농원 (Plantation)으로 팔려가는 것을 목격한 후 그곳을 탈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우편나무상자였다. 그는 행선지가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로 되어 있는 우편나무상자를 한 백인 구두제조업자에게 83불을 주고 만든 후, 그 속에 들어가 ‘인간 화물’이 되어 27시간 만에 필라델피아에 우송된다. 필라델피아에 도착 후, 노예제도 폐지의 연사로서 활약을 하며 음악인, 마술사 등 직업을 전전하게 된다. 1881년에 캐나다 토론토로 그의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토론토시의 Bright St.에 거주하며 2024년 2월1일, 그가 143년 전 살던 그 거리가 그의 이름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BLM)’,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의 이 조직은 2012년 흑인 10대 ‘트레이브 마틴’을 총격사격으로 사망케 한 '조지 짐머만'이 무죄 판결을 받은 후 2013년 소셜미디어에 ‘BLM’이란 해시태그를 사용 후 대규모로 확산된 흑인 인권운동이다. 이후 흑인 범죄자에 대한 체포과정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사회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Black Lives Matter” 운동은 분산된 네트워크로 운영되고 있어 공식적인 구조는 따로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은 흑인들의 북미대륙에서의 역사와 문화적 공헌을 기념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매년 2월에 실행된다. 미국 또한 매해 같은 2월에 시행되는데 명칭을 '흑인 문화유산의 달'(Black Heritage Month)로 부른다. 캐나다의 흑인 역사의 달은 미국의 흑인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 구조의 틀은 다르다. 흑인의 북미대륙의 역사는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가 되어 북미대륙에 정착을 시작하면서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결국 그들 제국주의 산물로서 흑인의 역사는 시작되며, 흑인들의 흘린 피와 땀의 결실로서 남북전쟁 전까지 미국남부는 영광과 영화를 누리게 된다. 반면 백인들의 비인도적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흑인들의 필사적인 탈출은 19세기의 ‘노예 탈출 비밀조직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의 도움을 받게 된다. 비밀조직지하철도의 의미는 실질적인 철도의 의미가 아니라 비밀조직네트워크를 일컫는 말로서 탈출노예들을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까지 인도하는 조직적인 단체로 본부는 미국 '필라델피아'이고 그 종착지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였다. 대략 3만명 내지 4만명이 국경을 넘어와 캐나다에 정착하게 된다. 특히, 1850년~1860년 사이에만 만오천명 내지 2만명가량의 흑인노예가 캐나다에 도착하게 된다.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다' 는 말을 자주하였다. 물론 시작이 좋다고 해도 끝이 좋으라는 법이 없지만 모든 일에는 처음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을 한밤중에 습격하여 노예로 나포하여 신대륙에서 노예로 둔갑시켜 사고 판 것은 분명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예탈출 비밀조직 지하철도"나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와 같은 움직임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나 모든 단추가 다 제대로 끼워졌다 할지라도 흑인인권 문제는 갈 길이 요원하다.

 

1960년대의 메이저리그 애틀랜타팀의 흑인 야구선수가 있었다. 동료들과 같은 식당에 갈 경우 그 흑인선수는 다른 좌석에서 식사를 해야만 하였다. 그와 친하게 지내는 백인선수가 ‘나는 자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 그때 그 흑인선수는 "아니, 자네가 흑인으로 태어나기 전까지는 이 뿌리 깊은 치욕적인 감정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1963년 8월28일 '워싱톤 DC' 행진에서 행한 연설에 붙은 별칭이다. ”I have a Dream” 마틴 루터 킹의 꿈의 염원과 바람은 백인의 타인종에 대한 우월 인식의 의식구조가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 그냥 헛된 꿈이 될 수밖에 없다.

2024년 4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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