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mkang39

    강신봉 칼럼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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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申씨..............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현모양처

賢母良妻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명인전 #40

1504 ~1551 48세

제공: 강 신 봉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현모양처의

어머니를 꼽으라면 단연 사임당 신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이 이율곡 선생의 어머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분은 조선시대의 여류 문인이자 화가였고 남편을 훌륭한 사람으로 이끌은 良妻였다.


그녀의 품행은 타의 모범이 되였고,

체취에서 흘러 나오는 정서적 지성미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였다.


4남 3녀, 7남매의 어머니로서 뿐이 아니라,

어려서 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 솜씨도 아주 뛰여 났으며,

남편의 출세를 위하여 고독의 삶을 초월한 결심은 대단하였다.

 

 

 

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강릉 오죽헌(북평촌) 외가댁에서,

신명화의 둘째 딸로 태어나,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 났다.


19세에 李元秀와 결혼하였다. 결혼 몇달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다.


이후 시가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자주 강능에 내려가 홀어머니의 말동무를 해 드렸으며,

이 시기에 셋째 아들인 이율곡을 강능에서 낳았다.


38세가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하여

서울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 되던 해에 삼청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 해에 남편이 평안도로 부임을 하기 위하여

아들과 같이 떠나 갔을 때에 사임당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일직부터 나타나 이미 7세 때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고 사숙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주된 그림 소개는 풀벌레, 花鳥, 매화, 난초, 산수화등으로,

이러한 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글씨와 詩,

문장에도 주위의 격찬이 끊이지 아니 하였다고 한다.


율곡은 후에 어머니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율곡은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그리고 정결한 지조등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사임당은 넷째 아들 우(瑀)와 큰 딸 매창(梅窓)

을 자신의 재능을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대표작으로는 자어리도(紫魚里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등이 있다.

 

 

 

사임당 詩의 대표작으로는 <母親>,

그녀가 서울에서 강능에 계신 홀어머니를 그리워 하면서 지은 것이다.

 

천리가산만첩봉(千里家山萬疊峰)

산이 첩첩, 내 고향 천리길이건만


귀심장재몽혼중(歸心長在夢魂中)

자나 깨나 꿈 속에서도 돌아 가고파


한송정반쌍윤월(寒松亭畔雙輪月)

한송정 호수에 외로이 떠있는 달


경포대전일진풍(鏡浦臺前一陳風)

경포대에 부는 한 줄기 바람


사상백로항취산(沙上白鷺恒聚散)

흰 갈매기는 모래위에서 모였다가 흩어지고


파두어정각서동(波頭漁艇各西東)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 가는데


하시중답임영로(何時重踏臨潁路)

언제 강능길 다시 밟아서


채복반의슬하봉(綵服斑衣膝下縫)

색동옷 입고 어머님의 슬하에서 바느질 할꼬

 

 

19세에 결혼한 남편 이원수는

학문과 예술등 모든 면에서 사임당만 아주 못하였든 것 같다.


사임당은 어느날 남편과 마주 앉아

서로 각각 헤어저서 10년간 학업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미침내 이원수는 부인을 처가에 두고 서울로 떠나게 되였다.

굳은 결심으로 성공을 하고 돌아

오라는 권고의 말을 되새기며 먼 길을 떠나려 하지만,


처가인 오죽헌에서 20리 밖에 아니 되는

성산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기를 기달려 다시 집으로 되돌아 왔다.


둘째 날은 40리를 갔다가 집으로 또 되돌아 왔고,

3일째 되던 날에는 대관령 반쟁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역시 되돌아 왔다.

 

 


오죽헌 이율곡상

 

사랑하는 부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원수의 애타는 마음이 그러 하였다.


하지만 사임당은 단호하게 “대장부가

한 번 뜻을 세우고 10년을 작정하고 학업을 닦으러 길을 떠났건만,


이같이 세번이나 잇달아 되돌아 오신다면

당신이 장차 무슨 인물이 되겠소이까?” 하고 하품을 느끼니 이원수가 대답을 하였다.


“학업도 학업이지만 나는 도저히

당신을 떠나서 10년이란 긴 세월을 따로 있을 수가 없소이다.”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사임당은 바느질 그릇에서

가위를 끄집어 내어 남편 앞에 두고,

“만일 당신이 이 같이 나약하고, 무능력 하시다면,


나는 이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더 오래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여승이 되여 산으로 가든지,


아니면 불측한 이야기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음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이 말 한 마디에 이원수는 눈이 번쩍 띄여,

그 날 밤에 부인과 작별을 하고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허나 원래 머리가

뛰여 나지 못하여 평생을 그저 평범한 관리로 지냈다고 한다.


사임당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은 당호(堂號)이다.

당호란 본채나 별채를 구별하는 이름이다.

그리고 당(堂)은 안주인이 기거하는 건물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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