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법대로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를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때는 어린 양의 희생에 힘입어 이집트에서 탈출한 일을 기념하는 유월절이다. 이제 진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에 나타나 죽임 당하는 날이 온 것이다.

흠씬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가?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라”며 유대인들에게 떠밀었다. 흉몽을 꾼 빌라도의 아내까지 나서 예수와 관련된 일에 가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졌다. 그들은 “만약 예수를 놓아주면 빌라도 총독 당신은 로마황제의 충신이 아니다”고 협박까지 했다. 결국 빌라도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라”며 예수를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넘겨 주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구명하기 위해 나름 애쓴 것처럼 보인다. 또한 물을 떠다 무리들 앞에서 손을 씻는 행위를 보여주며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벗고자 했다.

그러나 빌라도의 말이나 노력, 마음가짐과는 상관없이 그는 예수의 죽음에 가담한 가해자였다. 대제사장 무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재판한 세상의 대표였다. 싫든 좋든, 인정하든 동의하지 못 하든, 성경은 아담의 선악과 사건 이후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대제사장 무리의 일원이며, 십자가 사건의 주범 빌라도 소속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일상 생활을 통틀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날마다 세상을 심판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나라’에 대한 대화가 등장한다.

빌라도는 예수를 끌고 온 대제사장 무리에게 “너희들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요구했고, 예수께는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고 말했다.(요한복음 18장)

여기서 빌라도는 자신과 유대인 무리를 구분 짓고 있다. 예수 또한 대제사장들과 같은 유대인이 아니냐는 것이다.

예수는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약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오히려 유대와 로마를 한데 묶었고, 빌라도와 대제사장 무리를 한통속으로 분류했다. 이 대목에서 빌라도의 구별짓기는 무력화된다. 예수님의 기준은 바로 ‘이 세상’과 ‘내 나라’로 나뉘기 때문이다. 빌라도와 대제사장 무리는 예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 소속이었다.

빌라도가 “당신이 왕이오?”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라고 대답했다.(18장37절)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개역개정)”라는 번역과 “진리가 무엇이오?(새번역)”라는 질문은 어감에서 차이가 있다. 글로 옮겨진 말은 그 진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에 대한 빌라도의 질문은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진짜 진리가 궁금해서 물었을 가능성도 있다. 죄수로 끌려와 심문을 받고 있던 대화의 흐름상 허황되게 들리는 예수의 진술을 비꼬는 말투였을 수도 있다.

빌라도의 진의는 중요하지 않다. 해답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는 예수의 대답 안에 있다.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친히 진리를 증언하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고통을 받던 유대인들이 모세의 인도로 탈출에 성공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유대인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것처럼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 때문에 그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다. 예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되어 태어났다. 동시에 유대인과 로마총독 등 모든 인류는 예수를 죽인 가해자로 판명된다. 빌라도의 몸부림은 그래서 무의미하다.

예수의 수난 과정에서 소속이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다. 흉악범이었던 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예수를 저주하며 세상의 왕 노릇을 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며 예수께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한다. 예수는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란 말로 강도의 소속을 확인시켜 준다.

이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복음은, 사형 집행이 갑자기 보류되거나, 혹은 유죄 판결이 뒤집혔다는 긴급속보가 아니다. 로마 군병들이 급히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 양 손에 박힌 못을 빼거나 상처를 치료한다 해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했다는 후회조차도 필요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깜짝 놀람과 감사, 예수에 대한 찬양만 있을 뿐이다.

 

<‘사람 낚는 예수, 사람잡는 복음’(-부크크출판사, 김용호 씀)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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