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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3)

 

빗속에서 '부엔 까미노' (2일차)


 모처럼 숙면을 취한 탓인지 신 새벽에 잠이 깨어 로비로 나왔다. 방마다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한 걸 보아 모두 단 잠에 든 모양이다. 커튼을 젖히니 어렴풋한 산등성이들이 어깨를 맞대며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피레네 산맥의 한 언저리에서 맞이 한 첫새벽은 설렘과 함께 불확실한 우리의 여정을 예견하는 듯 묘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른 아침, 간밤 숙소 문제로 의기투합 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침 식사를 했다. 커피와 빵, 시리얼 정도의 간단한 메뉴였으나 한 끼를 쉽게 해결 할 수 있어 좋았다. 일행 중 유일한 이십 대 크리스틴이 지난밤 숙소 탈출은 자신의 공이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젊은 혈기의 선동으로 상쾌한 아침을 맞은 우리는 출정을 위해 배낭을 꾸렸다. 

 

 

 


 폭설로 인해 '나폴레옹 루트'가 폐쇄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져 왔다. 피레네 산맥 최고봉인 '콜 데 레페데르(Colde Lepoeder)는 순례길 중 가장 험난하면서도 아름답기로 정평 난 곳이다. 하필 오늘 폭설이라니, 기대한 만큼 아쉬움도 컸지만 자연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숙소 주인이 약간 우회하는 발카를로스( Valcarlos)로 데려다 주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늘은 론세스바예스를 거쳐 에스파냐까지 약 27km를 걸을 예정이다. 피레네 산맥 최고봉을 약간 우회하기는 하나 해발 1000m의 산을 넘어 프랑스 국경을 통과해야 하니 제법 묵직한 하루가 될 것 같다.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산 정상은 폭설 경보라더니 아랫동네엔 폭우가 쏟아졌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악산을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만큼이나 마음도 어두워졌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초보 순례자에게 자연이 주는 첫 시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나는 부지런히 판초와 각반을 착용하며 일행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듯 강단 있게 빗길을 밀고 나가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남의 집 처마 밑을 서성이며 선뜻 나서지 못하는 약한 그룹도 있었다. '그래 이거야.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을 위해선 무조건 전자 쪽 이어야 해.' 움츠러드는 어깨를 곧추세우며 산기슭으로 접어 들었다. 


 이제 막 웅지를 틀기 시작하는 봄 산은 잔설에 묻힌 새싹부터 꽃망울을 터트린 야생화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새 생명을 키우는 봄비 향연은 축복이지만 극기훈련 하듯 산길을 오르는 우리에겐 보통 난제가 아니었다. 우중 산행에서 생기기 쉬운 위험에 대처하느라 체력은 급격히 소진되고 십여 킬로 남짓한 배낭의 무게는 갈수록 어깨를 짓눌러왔다. 그럴 때마다 편한 길 마다하고 어려운 길을 택한 게 아주 잠깐씩 후회되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가능한 한 천천히 그리고 정직하게 걷고 싶은 소망이 있는 한 어떤 난간도 극복하게 되리라는 믿음에서였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소나기, 진눈깨비가 번갈아 내리는 너도밤나무 숲에서 잠깐씩 휴식하며 묵묵히 산을 오르고 있을 즈음 누군가 뒤에서 인사를 건네왔다. 돌아보니 빨간 우의를 입은 백인 남성이 반갑게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오늘 산행 중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라 여간 반갑지 않았다. 빗속에서 통성명을 하고 서로 격려하며 또 길을 재촉했다. 


부엔 까미노, '당신의 앞날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또는 '행운이 함께 하기를' 하고 나눈 인사는 가장 어려운 순간 큰 힘이 되었다.


 정오가 훨씬 지난 무렵, 론세스 바예스에 도착했다. 성당이 곧 마을이라 할 만큼 큰 규모의 성당들과 부속 건물들이 부락을 이루고 있는 곳, 아름다운 피레네 산맥이 감싸고 있는 광경은 그 동안의 고생을 희석 시키기에 충분했다. 저녁엔 800년 된 유서 깊은 수도원에서 순례자를 위한 미사가 올려진다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아쉬웠다. 

 

 

 


수도원 옆 '카사 사비나' 바에서 커피와 스낵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그리곤 장작불이 훨훨 타는 난로 앞에 앉아 짧지만 찐한 휴식을 취했다.


 숙소 예정지 에스파냐 가는 길은 꽃길 이었다. 비 개인 오후 파란 하늘이 열리며 오랜만에 햇볕도 비춰서 젖은 옷을 말려가며 가볍게 걸었다. 방향 표식이 안 보여 애매했던 구간에선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오랫동안 길동무 해주었고, 동네 주민이 넌지시 놓고 간 사과를 깨물며 이방인에 대한 정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꽃길도 간간이 함정이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곳곳에서 개천 물이 불어나 건너느라 애를 썼고, 일행 중 토마스는 물에 빠져 고생을 했다. 스페인 나바라 자치주를 들어서며 자연스럽게 국경을 통과 한 것처럼, 우리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순례의 물결에 스며든 긴 하루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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