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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학의 선구자, 오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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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생활이 벌써 3주째다. 주말에는 약속이 없어 주로 미술관이나 고궁을 다니고 있다. 마침 가을이라 이곳 저곳에서 행사가 많아 조금만 부지런 떨면 좋은 구경을 할 수 있다. 이번 주말에는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을 가볼 계획으로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 내렸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덕수궁 남쪽 돌담길 옆, 옛 대법원자리에 있다. 


거기서 서울시립미술관을 가려면, 옛 배재중학교 골목을 지나야 하는데, 옛 배재중고등학교 자리에는 옛 모습은 없고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박물관을 들어서니, 마침 가이드가 한참 설명 중이었다. 배재학당이 선교사들에 운영되어 기독교, 독립운동의 중심이었고, 초창기에는 영어로 교육을 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근처에 외국선교사들이 많이 살았고, 그러다 보니 덕수궁 근처로 외국 대사관들이 자연스레 자리 했단다. 배재학당 출신으로 이승만, 서재필,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외에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오긍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소개한다.


오긍선(1878-1963)은 1878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남 3녀 중 장남이었다. 오긍선은 9세부터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고, 15세에 박현진과 결혼한 후에도 과거시험을 준비하였지만, 후에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6년에 서울에서 내부 주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개화기에 신학문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해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이승만보다 1년 후배)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가 침례교 신자가 되어 스테드만이라는 선교사를 돕는다. 


하지만 1901년 스테드만이 일본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군산 야소교 병원장으로 온 의료 선교사 알렉산더(A. J. Alexander)를 소개받는다. 이 만남이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오긍선은 알렉산더에게 한글을 가르쳤는데, 알렉산더는 그의 영특함과 성실함을 보고 미국 유학을 권유한다.


오긍선은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영어실력이 탁월하였기에, 알렉산더의 주선으로 남장로교 측에서 입학금, 생활비 일부를 보조 받아 1902년 3월, 켄터키주 덴빌에 위치한 센트럴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고학을 하면서 의학 기초학문을 공부하여 1904년 동 대학 교양학부 2년 과정을 수료한 후,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 편입학한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라는 권유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았지만, 서재필, 알렉산더 선교사의 조언으로 계속 의학을 공부하고 1907년 3월, 루이빌의대를 무사히 졸업, 의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는 졸업 후, 루이빌시립병원에서 6개월간 인턴으로 근무하고, 그 해 10월, 미남장로교 선교부 소속으로 선교사로 파송 받아 한국으로 돌아와 군산 야소교병원의 책임자가 된다. 


그 당시, 오긍선보다 먼저 서양 의학을 공부한 서재필과 박마리아가 있지만, 그들은 의사의 길을 걷지 않고 독립운동을 해 오긍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을 전공한 의사로 보는 시각과 의견이 많다.

  

 

 

 

그 뒤 임금 순종은 전의로 입궁할 것을 요구하지만, 선교에 뜻이 있어 본래 계획대로 군산 병원장으로 근무한다. 그리하여 1910년에는 광주 예수병원장으로 부임하고, 1911년에는 목포 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하여 중학과정인 정명학교 교장을 맡기도 한다. 


그의 삶은 매우 분주하며, 바쁘게 지나갔다. 오긍선은 1913년에 세브란스 의학교에 조교수로 취임을 하게 된다. 이때 그는 세브란스 의학교에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서 기록된다.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 의전을 설립하는 데는 캐나다 선교사이며 의사인 에비슨의 공이 크다. 에비슨은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1892년부터 1935년까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34년, 에비슨이 정년 퇴직을 하며 오긍선을 세브란스 의전 제2대 교장으로 적극 추천하여 취임하게 된다. 그가 채택된 중요한 이유는 독실한 신앙심과 평범하고 유순하게 보이지만, 말없이 실천하는 그의 인품 때문이었다. 


오긍선은 세브란스 의전 교장직에 있으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치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오늘날 수많은 의사들이 의학공부를 하고 사회에 배출되어 활동하지만, 수준에 미달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즉 돈을 벌기 위한 밥벌이로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오긍선은 학생들에게 의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늘 강조하곤 하였는데, 늘 돈 버는 의사가 아니라 병 고치는 의사가 되라고 훈계하였다.

 

 

 

 

1945년, 68세로 해방을 맞이한 오긍선은 각계 각층에서 많은 요직을 제안했지만, 일선에서 일하기 보다는 고문, 이사 등 후원자 역할을 감당하면서 해방 전부터 애정을 쏟았던 고아 구제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48년 정부 수립 후에 이승만 정부가 보건부장관을 제안했지만 거절한다. 그는 6.25전쟁 중에도 70세 노구로 고아들과 함께 남해안 거제도 근방 가덕도로 피난 가는데, 그가 얼마나 고아들을 애정으로 돌봤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오긍선은 1963년 5월에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의학계뿐 아니라 봉사자의 삶을 몸으로 실천한 커다란 별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세브란스 의전 교장으로 이 땅의 의사들을 길렀고, 우리나라 최초로 고아 사업을 시작해 고아들의 아버지로 빈자와 고아들 위해 살았다. 또한 자식을 잃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해 양로원을 지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요즘 같이 메마른 때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 오긍선 같은 선인의 행적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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