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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춘-재외동포 문학상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 뿌리와 홀씨 사이(상) 일러스트: AI 생성. *이 글은 토론토 양경춘 씨가 한국 재외동포청이 주관한 재외동포문학상 공모에서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상><하> 2번으로 나눠서 싣는다. 새벽 두 시. 나는 또 눈이 떠졌다. 알람은 맞추지 않았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이불을 젖히고 살며시 일어나 거실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의료용 침대 위 장모님의 몸을 천천히 돌려 방향을 바꿨다. 그 순간 장모님이 눈을 떴다. 말씀은 없으셨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이불을 여며 드리고 다시 조용히 침실로 돌아왔다. 문 앞에 서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쉽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말하면 거짓은 아니지만 전부도 아니었다. 의무라고 말하면 더 정직하지 않았다. 어쩌면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민자로 살아온 사반세기 동안, 이 집 안이 내가 유일하게 완전히 속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민자에게 ‘속한다’는 것은 국적이나 주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곳에 있을 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 문제다. 캐나다에서 나는 늘 설명해야 했다. 내 이름의 발음을, 내 나라의 위치를, 내 경력이 왜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지를. 그러나 이 집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냥 ‘사위’였고, 그걸로 충분했다. 장모님 가족이 토론토에 도착한 것은 1990년 가을이었다. 단풍이 절정이던 계절, 장인어른과 장모님, 처남들이 토론토 공항에 내렸다. 영어는 통하지 않았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가족이 함께 편의점을 시작했다. 장모님은 새벽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면서도 자식들 도시락만큼은 한 번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어린 시절 1·4 후퇴 때 빈손으로 이북을 떠나 낯선 남쪽 땅에 뿌리를 내리셨고, 쉰 중반의 나이에 다시 태평양을 건너셨다. 낯선 땅에서 살아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그분은 이미 몸으로 알고 계셨다. 1997년 겨울, IMF 외환 위기의 한복판에서 나는 가족의 손을 잡고 토론토에 왔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열한 살 아들이 물었다. “아빠, 우리 언제 다시 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부터 나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있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 부서장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그 경력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백 장의 이력서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Canadian experience required.” 캐나다 경험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해야 경험이 생기는 진퇴양난. 나는 그 앞에서 매일 조금씩 낯선 사람이 되어 갔다. 결국 한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야간 헬퍼 일을 시작했다. 자정까지 계산대를 지키고, 음료 박스를 나르고, 새벽에 진열대를 채웠다.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계산하고, 영어로 웃었다.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다. 그 첫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거리마다 불빛은 화려했지만 우리 아파트는 조용했다. 한국이었다면 친척들이 모여 북적였을 시간, 우리는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김치찌개를 먹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렸고, 아들은 말없이 영어 숙제를 하고 있었다. 이민이란 화려한 나라로 온 것이 아니라, 낯선 조용함 속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강추위가 몰아치던 1월 어느 날, 처음으로 장모님의 된장국을 먹었다. 빙판길에 두 시간이나 막혀 늦게 돌아온 나를 보시더니, 장모님은 말없이 냉장고를 여셨다. 따뜻한 된장국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김이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어, 능력, 존재. 그러나 장모님의 밥상 앞에서는 그 어떤 증명도 필요 없었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내가 있어도 되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그것이 내가 이 집에 속한 이유였다. 토론토의 봄은 늦게 온다. 긴 겨울 끝에야 얼어붙은 땅이 조금씩 숨을 돌리고, 무릎 높이까지 쌓였던 눈더미가 녹아내린 자리마다 작은 연둣빛 잎들이 고개를 내민다. 낮은 자리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것은 늘 민들레였다. 봄이 오면 주말 오후, 옆집의 다니엘과 말라 부부는 자기네 앞마당에 퍼진 민들레를 부지런히 뽑아냈다. 캐나다 사람들에게 민들레는 잔디를 망치는 잡초였다. 그러나 장모님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못내 아까워하셨다. “이 귀한 걸 왜 뽑아 버리나?” 장모님은 낡은 호미를 들고 민들레를 캐셨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의 표정이 그 얼굴에 서려 있었다. 바구니에 민들레를 가득 담으며 환하게 웃으시는 그 얼굴을, 나는 오래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캐 온 민들레는 김치가 되어 식탁에 올랐다. 쌉싸름한 맛 속에 봄의 기운이 배어 있었고, 우리는 그 맛을 나누며 함께 웃었다. 나는 그때 몰랐다. 그 봄날의 풍경이 훗날 내가 가장 오래 붙잡게 될 기억이 될 줄은. 그 웃음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무렵이었다. 했던 질문을 다시 하고, 물건을 엉뚱한 곳에 두는 일이 잦아졌다. 우리는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2년 후 어느 날. 산책을 나간 장모님이 돌아오지 않았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큰 처남이 운영하는 11킬로미터 떨어진 리치먼드힐의 호텔이었다. 장모님은 몇 번 차를 타고 가 본 기억만으로 그 먼 길을 걸어가셨다. 호텔 로비에서 아들을 보자 환하게 웃으셨다고 했다. 그것은 단순한 길 잃음이 아니었다. 기억이 만들어 낸 선명한 현실을 향해 걸어가신 것이었다. 진단명은 알츠하이머성 치매였다. 처남들과 우리 부부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오래 침묵했다. 한국어만 쓰는 어머니를 영어권 요양 시설에 보내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홀로 기억을 잃어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여보, 우리가 모셔야 할 것 같아.”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사위였다. 그 말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 이미 선택은 되어 있었다. 이 집이 이 나라에서 내가 유일하게 속한 곳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이 12년이 될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장모님의 몸을 직접 돌보아야 했던 날을 기억한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 오후였다. 나는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것이 맞는가. 이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 기저귀를 갈아 드리고 나왔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 나는 이 집에서 조금 더 편안해졌다. 마지막 경계가 사라진 사람만이 느끼는 그 편안함이었다. 한국의 관습에서 사위는 백년손님이다. 딸의 남편이 장모의 환부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두 시간마다 체위를 바꾸는 일은 그 어떤 예절 책에도 나오지 않는 항목이었다. 캐나다에도 이 역할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son-in-law caregiver’라는 조합은 사전에 없었고,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의 지인들은 “장하다”고 했고, 캐나다 동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문화 어디에도 내가 하는 일을 딱 맞는 언어로 설명할 자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야겠다. 나는 이 12년을 아름답게만 기억하지 않는다. 두려웠다. 회의실에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다가 전화기가 울리면 심장이 먼저 내려앉았다. ‘엄마가 또 나가셨어.’ ‘찾았어.’ 문자 두 줄이 하루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발표를 마치고 복도로 나와 벽에 기대는 때, 나는 내가 어느 쪽의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섭섭하기도 했다. 처남들은 각자의 삶이 있었다. 나는 사위였지만 주된 돌봄을 맡아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어디선가 만들어졌다. 그것에 대해 한 번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때로 무거웠다. 짜증이 난 적도 있었다. 장모님이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실 때, 새벽 두 시에 또 현관 앞에 서 계실 때, 그 순간 내 안에서 올라오는 것이 연민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누를 때마다 죄책감이 따라왔다. 치매 환자에게 짜증을 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번은 출장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안도했다. 장모님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흘 동안 이 집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안도감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나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장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어느 날 장모님이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당신 누구요?” 그 말이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아주 잠깐,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 뒤로 오래 나를 괴롭혔다. <하>편으로 계속. 양경춘/토론토 출처 : https://torontokjournal.com/news/42881
[양경춘-재외동포 문학상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 뿌리와 홀씨 사이(하) 일러스트: AI 생성. *이 글은 토론토 양경춘 씨가 한국 재외동포청이 주관한 재외동포문학상 공모에서 체험수기-수필 부문 가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상><하> 2번으로 나눠서 싣는다.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집 앞 골목에 차를 세우고 나는 한동안 시동을 끄지 못했다. 핸들 위에 이마를 얹었다. 눈물이 났다. 이유를 말하기 어려운 울음이었다. 무너진 것도,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아주 오래 팽팽했던 어떤 것이 그 순간 갑자기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 몇 분이, 이상하게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성인(聖人)이 아니었다. 그냥 사위였다. 어디에도 없는 역할을 맡은, 그냥 한 사람이었다. 이민자의 치매에는 특별한 슬픔이 있었다. 몸이 떠나온 곳과 기억이 머무는 곳이 서로 다르다는 것. 장모님의 몸은 캐나다에 있었지만 기억은 한국의 어느 장터와 옛집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그것이 나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몸은 캐나다에 있었지만 내 감각의 절반은 한국에 있었다. 된장국 냄새, 민들레 김치의 쌉싸름함, 주위에서 들려오는 한국어. 그것들이 없으면 나는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낮 동안 나는 차가운 영어로 버텨 냈다. 그러나 퇴근 후 마주하는 장모님의 야위어 가는 손을 잡을 때 나는 비로소 사위였다. 우리는 같은 처지였다. 어디에도 완전히 없는 사람들. 장모님이 기억을 잃어 가면서 짧은 영어마저 잃고 한국어만 남긴 것은, 어쩌면 가장 정직한 귀환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새겨진 것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다. 한번은 경찰이 장모님을 찾아 순찰차로 집으로 모시고 왔다. 현관 앞에서 젊은 백인 경찰관이 장모님 앞에 쪼그려 앉아 천천히 말을 건넸다. 장모님이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당신 참 잘생겼네.” 경찰관이 나를 돌아보았다. “She says you have a kind face.” 내 통역에 그도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 통역은 반만 맞았다. ‘잘생겼다’는 장모님의 언어에서 낯선 사람에게 경계를 풀 때 쓰는 말이었다. 무섭지만 믿고 싶을 때 건네는 말. 그 결은 어떤 영어로도 옮겨지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새로 개발된 GPS 시계를 구입했다. 장모님의 작은 손목 위에 채워 드리며 창문 너머 뒷마당의 민들레를 바라보았다. 민들레 홀씨는 바람이 데려가는 곳으로 간다. 방향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홀씨에 실을 묶으려 하고 있었다.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어디로 날아갔는지만이라도 알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였다. 영하의 날씨에 얇은 옷 한 겹만 걸치고 나가신 장모님이 몇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아 경찰 헬기까지 동원됐던 그 밤이 있었다. 찾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다리가 풀렸다. 순찰차 안에서 장모님은 멋쩍게 웃고 계셨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그때 처음으로 분명히 알았다. 나는 이 분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번은 지도 위의 점이 오래 멈춘 적이 있었다. 공원 벤치였다. 장모님은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앉아 계셨다. 나는 말없이 그 곁에 앉았다. 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함께 풀밭의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홀씨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바람을 탔다. 그러나 결국 땅에 닿으면 뿌리를 내릴 것이다. 어디든 닿는 곳에서. 새벽이면 장모님은 외투를 입고 현관 앞에 서 계셨다. “아들네 호텔에 가야 한다.” 처음에는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기억 속 현실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곁에 앉아 있었다. 현관 바닥의 찬 공기가 발끝으로 스며들었다. 이 나라에서 내가 경험한 가장 이상한 종류의 친밀함이 그 바닥 위에 있었다. 장모님의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그러나 침대로 안아 올릴 때마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온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몸은 생의 끝으로 갈수록 무게보다 온기가 먼저 느껴진다. 그 온기가 손바닥에 잠깐 머물다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욕창을 발견한 날이 있었다. 엄지손톱만 한 붉은 상처. 내가 잠든 사이 생긴 것이었다. 그날 이후 두 시간마다 체위를 바꾸는 일이 시작되었다. 내가 출근한 낮엔 아내가 하고, 퇴근 후 밤엔 내가 맡았다. 새벽 두 시, 네 시, 여섯 시. 어둠 속에서 거실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드리면 장모님이 잠시 눈을 뜨곤 하셨다. 계단을 올라오다 눈물이 차오를 때가 있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돌본다는 것의 가장 오래된 모습과 잠깐 마주친 느낌 때문이었다. 식사는 점점 느려졌다. 밥이 죽이 되고, 죽이 미음이 되었다. 한 숟가락을 삼키는 데 십 분이 걸리는 날도 있었다. 어느 주말 아내가 미음 그릇을 들고 들어가자 장모님이 낯선 얼굴로 바라보셨다. “당신 누구요?” 아내는 굳어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나 몰라? 딸!” 그날 밤 아내는 부엌 싱크대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물이 넘치고 있었지만 아내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수도를 잠그고 그 옆에 앉았다. 아내가 한참 뒤에 말했다. “엄마 기억 속에서 나까지 지워질 줄은 몰랐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아내는 딸이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간병인으로 살면서도, 어머니가 딸의 얼굴을 잊은 날에도. 나는 그냥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말이 필요 없는 자리가 거기 있었다. 그리고 어느 봄날이었다. 거실에 앉아 계시던 장모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나는 말없이 그 곁에 앉았다. 한참 뒤 장모님이 아주 희미하게 웃으셨다.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짓는 웃음이었다. 병이 앗아간 것들—이름, 얼굴, 언어, 시간—그 모든 것을 가져간 뒤에도 끝내 가져가지 못한 어떤 것이 아직 당신 안에 있었다. 기억이 사라진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2022년 겨울, 장모님은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내가 울었고, 처남들이 울었고, 나도 울었다. 12년 동안 고여 있던 시간들이 그제야 천천히 흘러내렸다. 1990년 첫 겨울도 이처럼 눈이 많이 내렸을 것이다. 처음과 끝이 같은 계절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장례를 마친 뒤에도 한동안 새벽이면 눈이 떠졌다. 이제는 달려갈 방이 없었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간병이 끝난 자리에 남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낯선 적막이었다. 12년 동안 나를 일으킨 것은 전화벨 소리였고, 문자 진동이었고, 새벽에 방문 열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들이 사라지고 나니, 오히려 그 소리들이 얼마나 나를 살아 있게 했는지를 알았다.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모님은 떠나셨다. 그러나 봄마다 민들에는 피어났다. 낮게 엎드린 잎새들 가운데 유달리 노란 꽃등을 높이 켜 올린 민들레 한 송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밟힌다. 나는 한동안 그 꽃 앞에 서 있었다. 장모님이 호미를 들고 웃으시던 그 표정이 떠오른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제 것으로 만드는 사람의 표정. 어쩌면 그것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분다. 흔들리던 민들레가 기어이 하얀 홀씨를 멀리 날려 보내고 있다. 이제 나는 그 홀씨를 붙잡지 않고, 다만 그것이 닿을 어느 따뜻한 흙을 상상하고 있다. <끝> 양경춘/토론토 출처 : https://torontokjournal.com/news/42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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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신호등 간도 크지 어쩌자고 빨간 신호등에 시작하여 번연히 운전을 하고 가는가? 빨간 불이 켜져 있는데 무슨 생각에 빠져 교통신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왔는가? 어느새 뒤에서는 경찰 페트롤 카가 왱왱거려서 차안의 백미러로 보니, 빨강 파랑불이 빠르게 돌아가며 내 차를 세우라고 난리다. 언뜻 보니 또 한 대의 같은 차가 왱왱거리더니 내 차 운전석 쪽에 즉시 달라붙는다. 나를 꼼짝 못하게 완전 포위한다. 오 마이 갓! 완벽한 신호위반 임이 분명하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주 예수! 주 예수! 만을 빠른 말로 거듭 불렀다. 오른 쪽 길가로 서서히 차를 세우고 앞의 양쪽 차 유리문을 내렸다. 고개를 앞으로 끄덕끄덕하며 살며시 웃었다. 빨간불에 갔다고 인정하는 뜻이다. 두 명의 백인 젊은 무장경찰관이 내 얼굴에 바짝 다가오니 혼이 빠질 것 같이 으스스했다. 내가 먼저 “아이 메이크 미스테이크, 아이 메이크 미스테이크, 암 쏘리, 암 쏘리” 하면서 두 손을 앞으로 순간 모았다가, 지갑을 꺼내어 운전면허증을 주려고 하니, 경찰관은 손바닥을 흔들며 노 노 노 노 하면서 조심해서 운전하라 한다. “아 유 오케이? 아 유 오케이?” 묻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내 차안을 순간 훑어보는 것 같았다. “아이 앰 오케이, 아이 앰 오케이” 하면서 밝게 웃었다. 핸드폰은 핸드백 속에 있었으니 그 또한 하나님의 가호하심이었다. 어텐션! 어텐션! 주의를 주며 친절하게 잘 가시라고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경찰관의 두 손이 앞을 향한다, 그것도 두 명이 약속이나 한 듯이. 오마이 갓! 땡큐! 쏘 마치! 할렐루야 아멘! 지저스! 를 경찰관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하며, 내가 먼저 악세레다를 밟고 유유히 앞으로 간다. 약간 무서움을 느꼈지만 백미러로 뒤를 보니 경찰관 두 명은 내 차의 뒷모습을 보고 서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오른손을 흔들었다. 순간을 지나고 보니, 때 묻지 않은 젊은 백인 미남경찰관들의 그 선한 얼굴들이 클로즈업된다. 언젠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되면 식사비를 내어줄 것이다. 그 뿐인가 커피도 사주고 그들이 하는 일에 감사하며 위로하고 용기도 줄 것이다.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지만, 한편으로는 내 잘못을 즉시 인정하고 처벌을 내려라, 달게 받겠다 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경찰관들이 감동을 받았나? 아니면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이었나? 운전한지 40여년이 넘었고, 눈만 뜨면 운전하고 살아야 하는 캐나다에서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차들이 앞뒤 양 옆에서 속력을 내어 들이치면 얼마나 큰 사고가 났을 것인가? 아찔하다. 나중에 아는 분한테 이야기를 하니 빨간불에 갔다면 벌점 4-5점에 벌금 4-5백 불 정도는 나왔을 것이라고 한다. 벌점이나 벌금보다도 일단 골치 아픈 일이 아닌가. 너그러움과 아량을 베풀 줄 아는 캐나다의 경찰관들이 얼마나 멋지고 신사적인가? 오래전부터 좌우명으로 삼고 사는 말이 있다. 잘못을 했으면 즉시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무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도 대부분 문제가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안전벨트가 내 생명을 구하고, 정직하지 않아도 많은 경우 별 탈이 없는 것 같지만, 정직은 결정적일 때 나의 운명을 바꾼다. 또한 정직은 최상의 재산이라는 말도 있다. 정직? 나는 과연 정직한가? 정말로 정직하게 살아왔나? 정직이란 말이 나를 또 무겁게 한다. 양심은 정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언제가 되어야 정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슨 일을 당했을 때, 순간 나오는 말과 행동에서 어떠함을 볼 수 있겠다. 오늘의 이 일은 정말 정직했음으로 복을 받은 것 같다. 정직이 축복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면서 순간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천국과 지옥을 단 몇 분 만에 맛본 셈이다. 나이 들면서 정신 줄을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는 경고다. 빨간 신호등은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가지 말라! 일단 정지하라! 빨간 신호를 무시하면 끔찍한 피를 흘릴 것임을 다시 한 번 나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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