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잃은 그대에게

 

꿈을 잃은 그대에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본능에 따라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서만 살지 않고, 자기의지에 의해 목표를 정하고 삶의 방향을 잡아 살아간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의 꿈이 있다. 대개 유년시절에는 대통령, 국회의원, 장군, 과학자 등 막연하면서도 거창한 직업을 꿈꾸는 경우가 많다. 약간씩 철이 들어가면서는 연예인, 변호사, 의사, 교수 등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꿈을 그리게 된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면,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으로 가능한 직업을 찾아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에도 계속 어린 시절의 꿈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20대 중후반쯤이 되면 자기의 어릴적 꿈을 잃어버리고 현실과 타협하여 하루하루를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대개 중년의 나이를 넘어설 때쯤이면 어린 시절의 꿈은 아예 잊어버린 채 현재의 일에 만족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내 어릴 적 꿈은 저널리스트였다. 고등학교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변함없는 꿈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한 유력신문사에 시험을 쳤으나 실패했다. 몇 달 후 또 다른 언론사에 시험을 쳤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그 언론사앞 게시판에는 합격자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죄송하지만, 회사가 없어졌습니다.”라는 황당한 공고가 붙어 있었다. 당시 서슬 퍼렇던 신군부세력에 의해 감행된 소위 ‘언론 통폐합’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어느 회사에 취업을 한 후 한 해를 더 기다려야만 했다. 이듬 해 드디어 취업시즌이 되어 또 다른 유력 신문사에 원서를 냈다. 그런데, 시험보기로 된 날 하루 전에 갑자기 쓰러져서 그 길로 병원으로 실려가 한 달여를 사경을 헤맸다. 그 때 병상에 누워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이 길을 고집하다가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나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을 접고 그저 하루하루 생업에 충실하면서 지금껏 살아왔다.


 일년전 늦가을 어느 날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어릴 적 친구와 소식이 닿았다. 몇 번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문득 옛날식 종이편지가 쓰고 싶어져서, 백지를 펴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 30여년 동안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던 편지글이 신기하게도 술술 잘 써져서, 단 숨에 일곱 장을 써 내려갔다. 다 쓴 편지를 접어서 봉투에 담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서, 문득 글을 더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쓰는 직업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껏 가슴에 쌓여 있던 글을 쓰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애초에 편지를 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길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바야흐로 우리는 인생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우리가 80년, 9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살면서, 꿈을 잃어버리고 방향 없이 하루하루 닥치는 대로 생존차원의 삶을 살아간다면, 결코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린 시절 품었던 ‘청춘의 꿈’을 젊은 한 때 재미로 꾸고 지나가는 꿈으로 그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다시 한 번 되살려 보자. 아득한 어린 시절 꿈들을 되살려 오늘부터 제2의 인생을, 아니 잃어버렸던 ‘진짜 나의 인생’을 시작해 보자.


 가수를 꿈꿨던 사람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노래방 클럽’이라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노래를 즐기고, 또 노인시설이나 불우아동시설 같은 곳에 가서 자원봉사 위문공연도 해보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꿈꿨던 이들은 하다못해 자기가 좋아하는 정치인 사무실에서 자원봉사 선거운동이라도 열심히 해보면 어떨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라도 붓을 들고 뭐든지 그려보자. 그래서 5년 후에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전시회를 열 계획을 지금 세워보자.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라고 하지 말자. 무얼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할랜드 샌더스 대령은 65세에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프랜차이즈를 시작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디즈니랜드를 설계한 월트 디즈니는 정작 디즈니랜드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완공식이 있던 날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었다면 디즈니랜드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고 하자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그는 이미 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가 꿈꾸던 디즈니랜드가 완공되어 있었던 것이다. 꿈이란 성취하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갈망하고 노력하는 자체로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옛날 어느 사냥꾼이 산속에서 독수리 알을 발견했다. 그 알을 집으로 가져온 사냥꾼은 집에서 키우던 닭이 품고 있는 달걀들 속에 집어넣었더니 새끼독수리가 다른 병아리들과 함께 알을 깨고 나왔다. 어릴 때부터 병아리들과 함께 자란 그 새끼독수리는 평생을 다른 닭들처럼 땅을 파서 모이를 주워 먹었고, 날개를 푸드득거리면서 겨우 몇 걸음 정도만 나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독수리는 어느 날 하늘을 쳐다보다가 하늘 높이 유유히 날고 있는 커다란 새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저기 멋지게 날고 있는 저 분은 누구지?” “저 분은 높은 하늘을 멀리멀리 날 수 있고 힘도 아주 센 새들의 왕 금빛 독수리셔. 괜히 딴 생각 하지 말고, 나처럼 열심히 땅이나 파서 먹이나  찾아봐.” 이렇게 그 독수리는 아예 딴 생각을 품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평생을 닭으로 살았다.


 사람은 생각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일상의 생업에 쫓겨서 인생의 목표나 꿈이 없이 하루하루를 허겁지겁 살아간다면, 자기 속에 감춰진 독수리로서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채 닭들 속에 파묻혀 하루하루 먹이 찾는 일에만 급급하여 살아간 저 새끼독수리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높고 넓은 저 하늘을 날아보겠다는 꿈을 꾸지 않는 한 결코 하늘을 날 수는 없다.    


 꿈을 잃은 그대들이여, 다시 한번 꿈을 꾸자. 꿈이 있는 삶은 꿈길처럼 달콤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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