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지 워싱턴(1)
미국의 국부 조오지 워싱턴에 대한 전기는 900권 이상 발간되었다. 그 중 베스트셀러는 2011년 론 처르노에 의한 워싱턴의 일생기(Washington, A Life)로 2011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우드로 윌슨도 1897년 워싱턴 전기를 발간한 후 1913년 26대 미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일부 작가들은 워싱턴전기를 신화적 또는 전설적으로 간행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전설이 벚나무 이야기다.
새로 구입한 손도끼로 아버지가 소중하게 키우는 벚나무를 자르고 화난 아버지에게 “아빠 저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잘랐습니다”라고 자기 잘못을 고백했고 용서를 받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는 메이슨 로크 윔스 작가가 워싱턴이 사망한 다음해 1800년 최초로 발간한 워싱턴 전기에 기술되었다.
100여 년이 지난 후 벚나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워싱턴을 신 같은 완전한 존재로 인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특히 이로 인해 워싱턴의 정직성이 모범이 되어 미 역대 대통령이 재임시 횡령이나 부정축재를 멀리하여 미국민의 단결과 애국심을 키우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측량기사
워싱턴의 부친 어거스틴은 가세가 기울어 워싱턴을 14세 위인 이복형 로렌스처럼 영국에서 교육을 시키지 못했다. 대신 워싱턴은 부모 및 형으로부터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는 문장력보다는 수학에 우수한 재능을 발휘했다. 워싱턴이 11세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고 12세 되던 해 마운트 버논에서 부유한 페어팩스가의 앤과 신혼생활을 하는 로렌스 형 집에서 형의 교육을 받으며 생활했다.
이때부터 워싱턴은 부유층들과 사교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후에 예법에 대한 자서전을 만들어 덕목을 쌓아나갔다. 형수 가문의 토지가 광대하여 측량기사를 계속 고용하는 것을 본 15세의 워싱턴은 천재적인 수학능력으로 측량기술을 배워 쉐난도를 포함한 버지니아 주 측량지도를 만들어 수입을 올렸고, 1752년 2315 에이커의 땅을 소유했다.
같은 해 불행하게도 그를 가장 사랑하는 형 로렌스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워싱턴은 과부가 된 형수의 자산관리인이 되었다. 그는 형의 요양을 위해 바베이도스 섬에 갔다가 천연두에 감염되었지만 소생하여 얼굴에 작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프랑스 인디언 전쟁(1754-1763)
워싱턴은 형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기를 원하여 버지니아 의용군에 가담하여 1752년 버지니아 부주지사 딘위도로부터 소령의 계급을 받았다. 그 당시 1750년부터 퀘벡에서 내려온 프랑스군은 인디언들과 힘을 합하여 오하이오 강 협곡을 차지하여 요새들을 세웠다.
이에 대응하여 딘위도는 1753년 워싱턴 소령과 몇 명의 민병을 파견하여 프랑스군에게 물러가라는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프랑스 사령관 쌘 피엘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의 친서를 받은 워싱턴은 77일간의 장정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편지는 전쟁으로 이어져야 하는 내용이었다.
영국의 지시를 받은 딘위도는 1753년 워싱턴을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300여명의 의용군부사령관으로 오하이오 강변에 영국군 요새를 세우게 하였다. 그와 함께 프랑스군1000명은 11 km까지 접근하여 요새를 세우고 있었다.
50명도 안 되는 프랑스군이 근접하는 것을 감지한 워싱턴은 영국군을 돕는 인디언들과 함께 공격을 가하여 프랑스 지휘관 주몬빌을 포함한 13명의 프랑스군을 사살하고 21명의 포로를 잡았다. 주몬빌은 영국군에 외교적인 편지를 전달하는 중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주몬빌의 형 빌리어스 대위는 1754년 인디언을 포함한 700명의 프랑스군을 몰고 400명도 안 되는 워싱턴 군을 포위하여 워싱턴을 항복시켰다. 프랑스말로 쓰여진 항복서에 서명을 하고 주몬빌을 저격한 것을 인정한 워싱턴은 용서를 받고 겨우 목숨을 건져 귀향해야 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와 영국을 7년 전쟁으로 이끌었고 워싱턴은 이 패배감을 사망시까지 교훈으로 간직했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