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여호수아 24장2~3절)
약 4천년 전 당시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세상나라의 대표, 갈대아 우르(바벨론)에서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강 건너편 가나안으로 뽑아내셨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당시 한 일이라고는 조상 대대로 우상을 섬긴 것뿐이었다. 그를 강 저쪽에서 이끌어내고, 가나안 땅에서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는 계획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다. 이것이 구원자와 구원 받은 죄인의 출발점이다.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구원의 이야기는, 저주에서 탈출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 출애굽기 여호수아 요한계시록 등에서 반복된다. 세상나라에 속한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선택을 받아 하나님나라로 옮겨가는 장면이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시작이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데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장8절)
믿음과 구원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일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그 믿음이라는 은혜의 선물에 끌려다닌 삶이었다. 스스로 믿음을 성숙, 발전시키면서 구원 받은 성도들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믿음에 의해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교회와 성도의 표본이라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하려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모든 육신적 노력이 물거품이 될 때까지 기다리셨고, 육신적 가능성을 차단하신 후에 직접 언약을 완성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의 선물’이라는 믿음과 구원의 방정식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삶에서 스스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약속을 완성하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믿음이 아브라함 속으로 파고들면서 삶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나라에서 그의 믿음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없고, 오로지 불가능한 자신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 만을 찬양해야 한다.
이런 그의 삶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향하는 여정으로 집약된다. 우르에서 나온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해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을 받고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하지만 그는 곧장 하나님나라와 대척점에 선 세상나라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를 애굽왕 바로에게 내준다.(창세기 13장)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장면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상속자와 자손에 대한 약속을 또 하셨다. 이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6절)고 설명한다. 그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의미로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셨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체결에서 약속의 당사자, 즉 실행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의미다.
인간을 언약 체결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아브라함의 어떤 행위와도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마무리하겠다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 믿음,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도 아브라함은 계속 여호와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자로 판명되었고, 그래서 언약은 하나님의 쪼개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성취된다.
아브라함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고, 심지어 믿지도 못 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는다. 17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가 할례로 언약의 표징을 삼고,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하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아브라함은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하며 엎드려 웃는다(17절). 그리고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하고 말한다.
18장에서는 아들을 약속하기 위해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을 사라가 비웃고 만다. 아브라함은 100세 가까운 나이였고, 사라는 생리가 끊어진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신 뒤에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의심하고 마음 속으로 계속 비웃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마저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그런 식으로 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같은 인간적인 불가능함과 아브라함의 불신앙 가운데 마침내 은혜로 태어난 것이 이삭이다.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주어진 믿음은 아브라함을 모리아산,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갔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3~14절)고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성도들에게 성취되며, 그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물이 되기 위해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으로 올랐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이삭의 심장을 찌를 칼과 불이 들려 있었다. 이삭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는다. 이때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세기 22장8절)고 대답한다.
아브라함의 칼날이 이삭을 향해 찌르려는 순간 하나님은 어린 양을 준비하고 계셨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대신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 양이 죽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다. 하나님의 약속을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에만 몰두하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던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은 그를 죽음의 자리, 모리아 산, 골고다 언덕으로 밀고 갔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향해 칼을 번쩍 든 것은 곧 아브라함 자신의 죽음이다. 그러나 결국 목숨을 내놓은 것은 무죄한 어린 양이었다. 그 어린 양은 아브라함의 모든 허물을 대신 짊어진 이삭이며, 골고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의 보혈로 아브라함의 불신앙이 덮이고, 마땅히 죽었어야 할 아브라함은 살아났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며 기다리다 보고 기뻐하였다(요한복음 8장56절). -‘사람 낚는 예수, 사람 잡는 복음’(부크크출판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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