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어느 이단 전문가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한국기독교 100여 년 역사에서 발생했던 이단, 사이비단체의 계보를 잘 정리해 설명했다. 신천지 등 많은 교회가 사이비 이단이라고 이미 정죄한 단체의 교리적 모순은 물론, 이단에서 또다른 유사단체가 갈라져 나온 과정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 덧붙여 그는 기독교 일각에서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여러 목사, 선교사들도 기본교리에서 벗어나 있다며 이단으로 내몰았다.
이단 사이비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것을 경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이단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특강을 마치고 문득 들었던 의문은 이것이다. 그가 재판정 판사석에 앉아 많은 사람을 이단이라고 낙인 찍을 수 있는 권한을 어디서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단 감별사’였던 그 목사는 자신이 스스로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토록 많은 이단이 득실거리는데 자신은 어째서 이단 목록에서 빠졌는지에 대한 언급이 일언반구도 없었다.
최근 한국에는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이단 정죄 논란이 뜨겁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단체가 전 목사를 이단으로 판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전 목사와 기독교 원로 등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단 판정은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라 한기총은 전 목사에게 소명 기회를 주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런데 이런 일은 역사 내내 있었다. 예수님도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귀신 들렸다’는 모함을 들었고, 사도 바울 역시 유대인들로부터 정통성에 의심을 받았다. 루터와 캘빈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지 않으면 기독교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일단 교회의 본질은 ‘00교회’라는 건물이 아니다. ‘00교회’에 등록하고, 세례 받고, 헌금하고,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무리도 교회(성도)가 아니다. 교회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시간에 따라 이 세상에 등장한 ‘교회(성도)’는 눈에 보이는 건물, 교회라는 단체에 속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복음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처절하게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절실한 것을 깨닫고, 부어주신 사랑에 감격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떠난다. 그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다.
그래서 교회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매달린 십자가로 모아진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눈을 돌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자랑’하며(갈라디아서 6장),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고린도전서 2장)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런 자리까지 밀어 넣으시고, 또한 그렇게 끌고 가신다. 그것이 성도들의 삶의 여정이다.
반대로 교회 밖에 머무는 자들의 특성은 ‘세상’에 대한 자랑과 사랑이다. 한때 사도 바울과 동역하던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디모데후서 4장)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형식을 활용해 자신도 구원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일생을 바쳤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세상에서 왕 노릇 하기’다.
그런 면에서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정치성향에 따라 패싸움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보수와 진보로 나뉜, 그런 기독교는 애초에 없다. 교회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고, 시장경제를 수호하겠다고 발벗고 나서는 것부터 자신들의 근본 소속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이 아니라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편하게 사는 데 있다.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시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앞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차분히 고민해 보시라. 자칭 ‘주의 종’들에게 속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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