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알지 못해도 장례식에 가는 걸 굳이 망설이지 않는다. 지난주에는 R. S. Kane 장의사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고인은 이민 초기 지인의 집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식사를 같이 했을 뿐 그 이후 한 번도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같은 토론토에서 반세기를 살다 보니 우연히 만나게 될 때가 있었다. 가뭄에 콩 나기 격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미소와 함께 힘찬 악수를 나눴다.
그가 목사의 아들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은퇴해서는 양로원에서 오르간 연주로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면 그에 대해 알 길이 없었을 신상 명세들이다. 그의 자녀가 몇 인지도 알지 못했다. 중년의 아들은 아버지, 천국에서 만나, 하면서 슬피 울었다. 자녀들과 저만큼 사랑을 나누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관에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은 메말랐다. 가슴엔 성경이 놓여 있었다. 그 곁에는 짙은 청색의 운동모자도 보였다. 로고는 어느 명문 고등학교의 그것이었다. 그가 그 학교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으면 관에 넣어달라고 했을까. 그보단 여기서 정을 나눴던 동창회일 수도 있다. 그 열성 때문에 부러 미망인이 넣어 주었을 수도 있다.
동창회라면 나 역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행사 때마다 머릿수 채우는 일에 앞장선다. 대학 동창회의 피크닉은 매년 교외의 Conservation Park(자연보호구역 공원) 에서 열린다. 한번은 거길 혼자 택시 타고 온 분이 있었다. 그 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나이차가 열 살도 더 되고 그 분이 내 이름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먼 길을 택시를 타고까지 달려오는 게 보통 일인가. 수백 명의 동창회원 중 조객은 몇 안 되었다. 당일 목사님의 설교가 아직 기억에 남는다. 임종 전 고인에게 예수님의 구원을 믿느냐고 물었는데 ‘아멘’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은 그의 프로필로 영원히 남게 됐다.
또 한 분은 특이한 분이다. 고인에게 불경스러운 표현이지만 동창회 행사 때마다 그의 차림은 허름했다. 수염도 깎지 않았다. 지병 때문에 안색도 창백했다. 그러면서도 행사에 필요한 오디오 시설을 도맡아 봉사했다.
한번은 생전에 인사 한 번 나눈 적이 없는 그가 내게 접근했다. 그리고 물었다. “비의 온도가 몇 도인 줄 아시오?” 그런 난센스 퀴즈를 내 어찌 안단 말인가. 머뭇거리자 “비의 온도는 5도란 말이요.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 그 노랫말에 있잖수!” 하는 거였다.
그의 장례식에 가는 날 저녁 비가 내렸다. 뿌연 차창의 시야를 열기 위해 와이퍼가 끊임없이 빗물을 밀어냈다. 접수를 보고 있던 동문이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단과대학이 다른 데다 평소 친분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나타났느냐는 얼굴이었다.
그의 일생 중 하일라잇들이 슬라이드쇼로 상영됐다. 결혼식 사진에선 그런 미남이 따로 없었다. 거기서 그쳤다면 모른다. 이곳의 한인들에게 골프 바람이 불기 훨씬 이전에 골프 클럽을 짚고 포즈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직 생업의 가파른 고개 길에서 허덕대고 있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신분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방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수재만 가는 단과대학을 나와 유수 재벌기업의 캐나다 법인장으로 부임했다고 한다.
그 장례식에 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세탁됐기 때문이다. 허름한 노숙자에서 어엿한 귀공자의 이미지로 말이다.
장례식에 가면 그처럼 뭔가 얻는 게 있다. 인연의 책장을 덮기 전에 한 인생의 문장 몇 줄을 읽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고인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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