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 칼럼이 인쇄될 쯤엔 화산이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탄핵 선고의 용암이 역사적인 판결문에 이미 시뻘건 밑줄을 그었을 지도 모른다. 조바심에선지 동포사회도 가만있지 않았다. 3월 1일에는 탄핵반대집회가 있었고 그 사흘 후에는 탄핵촉구집회가 있었다. 둘 다 멜 라스트먼 소광장이었다.
외국에서도 집회의 자유를 누리겠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하지만 가뜩이나 분단국가에서 온 한인들이 각기 별도의 집회를 열고 두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게 비한인들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여부는 우선 한국의 국내문제다. 한국의 사법절차에 의해 처결되면 그만 아닌가. 굳이 여기서 까지 광장의 대결을 불사하는 못 말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120년 전 구한말 시대로 돌아가 보자. 어쩌면 이렇게 판박이인가. 주위 열강들의 대결구도도 그렇다. 무대 역시 광화문 일대다. 보수와 진보의 충돌 역시 판박이다. 그때는 왕당파인 황국협회가 보수였고 개혁파인 독립협회가 진보였다. 피터지는 패싸움에서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120년이란 세월 동안 광장의 집회문화는 비폭력을 지향하며 발전해 왔다. 3•1 운동, 4•19혁명, 그리고 이번의 촛불집회가 그렇다. 하지만 탄핵이 선고된 다음 어떤 후폭풍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아스팔트에 피가 뿌려질 거라는 어느 변호사의 예언이 적중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조선의 자주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독립협회가 벌인 대중집회였다. 당시 서울 시민 1만여 명이 운집했다. 그건 인구대비 지금의 백만 촛불에 버금가는 참가자 수다.
주최측은 물론 외국 공사관 공사들도, 정부 관료들도 놀랐다고 한다. 가장 놀란 건 거기 모인 백성들 자신이 아니었을까.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도 먹혀들지 않던 몽매한 때다. 민주적인 토론을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3•1운동이 절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예고편이다.
만민공동회에선 러시아의 침략을 격렬히 성토하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석탄기지로 조차하려던 부산 절영도를 포기했고 개설한 은행도 철폐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고 토론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는 지금의 촛불집회처럼 광장민주주의였다. 정부의 그릇된 정책 시정과 부패 무능한 관료의 해임, 의회의 설치, 외세 축출과 자주독립국 선언, 신분차별 철폐 등을 주장했다.
그러자 조정의 수구파들이 반격에 나섰다. 수천 명의 보부상을 끌어들여 황국협회를 조직했다. ‘황실을 존중하고 군주에게 충성하자.’는 게 강령이었다. 그해 11월 만민공동회는 일당 1원 2전씩 받은 2천 명의 보부상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의 몽둥이질이 시작되자 민중들은 마포까지 밀려났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종로의 상인들이 가게를 닫고 합류했다. 돌멩이를 산처럼 쌓고 보부상들을 몰아낸 다음 종로에서 다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토론토의 보수파들이 주최한 탄핵반대집회에서 눈길을 붙잡은 건 ‘법치(法治)’라는 팻말이었다. 한국의 박사모처럼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팻말의 키워드가 한국에 그대로 전달됐으면 얼마나 좋겠나.
토론토의 진보파가 주최한 집회에선 ‘사드(THAAD) 반대’ 팻말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비한인들이 그 팻말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평화운동단체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구악과 적폐 청산을 들고 일어섰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는 수구파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곧 이어 왕조도 멸망했다.
가정은 금물이지만 그때 올바른 선택이 이뤄졌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문제는 그런 고비마다 개혁이 실패한 게 우리네 좌우대결의 잔혹사라는 사실이다. 남북분단도 암울한데 외국에서까지 아직도 좌우대결의 집회를 벌이는 이 잔혹사가 언제 끝날지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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