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54)

 

(지난 호에 이어)

 “조선족들 조심하오. 한족들보다 더 위험한 게 조선족이라오. 나도 물론 조선족이지만 조선족들 중에 나쁜 놈들이 많아요. 그리고 절대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안 돼. 북한에서 왔다는 것만 알면 나쁜 놈들은 꼭 돈을 갈취해 간다오. 공안에 신고한다고 협박하고. 그러니 절대 사람을 믿지 마시오. 그리고 나랑 같이 다니면서 주방에서 사람 구하는지 알아봅시다. 내가 도와줄게요. 그리고 내 조카딸이라고 하시오.”

갑자기 나한테 좋은 지원군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다니던 가발공장을 그만두고 조선족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양꼬치집 이었는데 양꼬치뿐 아니라 한식들도 있었다. 거리도 멀고 버스비가 비싸서 집으로 다닐 수 없던 나는 식당에서 숙식을 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식을 꼭 배워야 했던 나는 아들과 남편을 떼어 두고서라도 몇 달만 버티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한식을 익히게 되었지만 그 식당은 월급을 주지 않았다.

너무 한식당들이 많아서 장사는 잘 안되고 주인 여자는 수입이 없어 나한테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한다. 그곳 주인 여자는 물론 박씨라는 조선족 아저씨도 주방장으로 있었는데 그들은 내가 북한 여자임을 처음부터 눈치챘고 그래도 나를 위해준다며 한식을 많이 가르쳤다. 일한 돈을 받지 못하니 너무 속상했지만 그저 한식을 배우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고 그들이 나를 해코지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주방장 박씨는 가끔 나한테서 돈을 빌렸다. “300위안만 빌려 줘, 마누라가 다음 주에 월급을 탈 때 바로 갚아 줄게.” 그의 마누라는 거리가 먼 한국회사의 회계원으로 일했는데 나도 그녀를 가끔 본 적이 있어서 별 의심 없이 빌려줬다. 그렇게 나간 돈은 돌아올 줄 몰랐고 그는 후에 300위안을 또 빌려갔다. 세상 순진했던 나는 그의 아내를 만나서 돈 얘기를 꺼냈다.

“남편이 1주일 후에 갚는다며 600위안이나 빌려갔는데 아직 안 갚았네요. 당신이 월급타면 준다고 했어요. 3개월이나 지났는데 이젠 돌려주세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남편이 돈을 빌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남편이 빌렸으니 그에게서 받으라고 매정하게 말했다. 박씨는 사실 나에게서 돈을 갈취할 목적으로 빌려달라고 한 것인데 내가 순진하게 속아서 빌려주고 돌려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돈을 당구장이나 술집을 다니면서 아내 모르게 다 써버린 지 오래되었다.

식당에서 2달을 일하면서 돈 한푼 못 받은 건 둘째 치고 밤새워 가발을 만들어 번 돈 600위안은 그렇게 떼였다. 나는 이렇게까지 나를 속이고 갈취하고 살아가는 박씨를 정말 원망했다. 내가 얼마나 돈 한 푼을 아끼고 또 벌려고 애를 쓰는지, 내가 얼마나 돈이 꼭 필요한 사람인지 그는 잘 알면서도 내 돈을 그렇게 갈취해 갔다.

사실 나는 박씨에게 고향에 편지를 써서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연변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 부탁하면 북한 밀수를 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북한에 편지를 써서 고향에 보낸 지 두 달 넘어도 소식이 없었고 나는 그에게 매일같이 회답편지가 왔냐고 물었다. 그래서 박씨는 내가 돈 빌려 달라는 그를 차마 거절할 수 없을 거라는 나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나를 이용했다.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고향에 보내는 편지만 한 가득 쓰고 또 썼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남동생에게, 언니, 조카들에게 각각 한 통씩 다 써놓고 답장이 오기만 하면 또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편지 한 줄 한 줄 쓰면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영원히 부치지 못했다. 편지만 보내는데 너무 비싼 돈을 요구해 편지를 보내느니 차라리 그 돈을 가족들에게 부치는 편이 더 낫다.

그렇게 몇 달 만에 정말 고향에서 회답 편지가 왔다. 그런데 그 편지를 내가 받으려면 1000위안을 줘야 한다고 한다. 편지 보낸 지 5달 만에 받은 회답 편지인데 나는 정말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빌려간 돈 600위안이 있으니 400위안만 준다고 했지만 그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며 딱 잘라 말했다. 그래서 겨우 800위안을 주고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 편지 속에는 남동생과 언니가 쓴 편지가 있었고 가족사진도 들어 있었다.

나는 사실 부모님들, 특히 엄마가 쓴 답장을 기대했는데 편지 내용에는 엄마가 편찮아서 편지를 못 썼다고 했다. 조금 실망스럽고 느낌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고향에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회답 편지를 받게 되니 정말 그동안 쌓였던 고민이 다 풀리는 듯했다.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박씨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사다리에 올라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추락사했다는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아내는 그 후에도 나와 인연이 되어 서로 친구가 되었지만 참 세상은 요지경이다. 41살 밖에 안 되는 박씨가 1미터도 안 되는 높이에서 떨어져 죽다니 정말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월급이 없는 그 식당을 2달 만에 그만두고 나는 바로 그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금형 회사에 주방일 하러 들어갔다. 한국인이 3명 밖에 안 되는데 내가 잘 모르는 음식들도 가르쳐주던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내가 집을 떠나 새 환경에서 적응하는 동안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매일 밤 엄마를 기다린다며 대문밖에 몇 시간씩 앉아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아동 실종이 많이 일어났는데 아이가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대문 밖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주인 할머니가 애를 달래느라 무척 고생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섬뜩했고 하루빨리 집 근처의 회사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음력 설이 가까워올 무렵에 집 주인은 설 지나면 우리가 사는 방을 닭을 기르는 양계장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그 말은 더는 아이를 돌봐 줄 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그 할머니가 얼마나 아들을 잘 돌봐 주고 수고가 많았는지를 너무 잘 안다. 내가 집을 나가 있는 동안 정말 할머니는 자기 손주 보는 것보다 내 아들 돌보는 것이 훨씬 더 힘들었다고 한다. 월세 70위안으로 저녁 시간에 아이까지 돌봐야 한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좋은 집주인들과 헤어져 동네 가까운 곳에 좀 더 크고 따뜻한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거리인 남한 기업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선풍기나 열풍기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내가 다니던 중 최고의 직장이었다.

남한 사람들은 나에게 너무도 친절했고 사투리를 고쳐주었다. 일하는 환경도 정말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남한 위성 TV를 보면서 드라마 대장금을 비롯해 음악과 예능 오락프로 당시 유행하던 ‘X맨’, ‘장미의 전쟁’, ‘천생연분’, ‘야심만만’ 등 너무너무 재미있는 프로를 보려고 주말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회사에서 나는 한국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세계에 한걸음 한걸음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접한 남한 문화는 나에게 꿈에라도 가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혹시 나도 남한에 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곳 직원들은 또한 나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쳤다. 나는 내가 감히 컴퓨터를 배우게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젊은 사람이 컴퓨터를 모르면 안 된다며 강제로 이끌려 컴퓨터 기술을 배워야 했다.

 “ㅇㅇ씨. 배워야 해. 앞으로는 뭐든지 배워야 잘 살 수 있어. 컴퓨터 사용은 기본이야. 주방에서 요리만 한다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르쳐줄 때 배워. 그리고 시간 나면 낮잠이나 자지 말고 아무 때나 사무실로 와.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도 가르쳐 줄게. 배워 두면 나중에 쓸모가 많을 거야. ㅇㅇ씨는 총명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하는데 요점은 주방에서 요리만 하기에 내가 아까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회사에 조선족 총무가 있었는데 중국 국경절을 맞아 휴가를 받고 고향에 갔다가 정해진 날짜보다 늦어서 돌아왔다.

평소에 그 총무를 탐탁잖게 여겼던 회사 전무님은 그를 바로 해고해 버렸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컴퓨터를 배워서 나에게 총무 직을 맡아주면 어떠냐고 물었다.

사실 요리를 좋아하고 직원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며 진심으로 행복감을 느끼면서 내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넘쳤는지라 사무직은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월급이나 대우도 똑같기 때문에 내가 굳이 사무실에서 중국인들 상대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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