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미합중국 제15대 대통령-제임스 뷰캐넌(1)

 

 

영어이름: James Buchanan

출생: 1791년 4월 23일, 펜실바니아주 코브 갭

사망: 1868년 6월 1일 77세,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

부친: 제임스 뷰캐넌 시니어, 펜실바니아 부호

특성: 평생 독신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5대, 1857년 3월 4일- 1861년 3월 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트럼프(44/44) 제외하고 최악의 미 대통령 43/44

소속정당: 연방당(1814-1824), 민주공화당(1824-1828), 민주당(1828-1868)

임기 중 인구증가: 2,929만명에서 3,221만명

       GDP 증가: $41억8천만에서 $46억4천300만 

       1인당 GDP 증가: $1,427에서 $1,441

업적: 미 해군력 과시로 영국 중남미 점거 방지

인용구: 옳다고 해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장기간(1791-1814)

제임스 뷰캐넌은 1791년 4월 23일 펜실바니아주 코브 갭 통나무집에서 부친 제임스 시니어 뷰캐넌(1761-1821)과 모친 엘리자베스 스피어(1767-1833) 사이의 11자녀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제임스가 태어난 해 부친은 머세스버그에 자리잡은 농장으로 이사를 하고 농업, 상업, 부동산 투자로 성공하여 부호가 되었다.

제임스는 1809년 디킨슨 대학을 졸업하고 랭카스터에서 제임스 홉킨스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 연수를 받고 1812년 펜실바니아주 변호사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1821년 그의 연 수입은 1만 1천달러가 되었다. 그 당시 평균 하루 노임 수당이 90센트였다. 365일 노동을 해도 노임은 연 330불도 안되었다.

 

군복무 및 정치입문(1814-1815)

뷰캐넌은 1812년 전쟁이 발발한지 2년 후에 펜실바니아 의용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총부대원으로 볼티모어 수비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미 대통령 중 유일한 사병의 경력을 갖고 있다.    

동년 뷰캐넌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연방당원으로 펜실바니아 주의원에 당선되어 연방은행제도와 고관세 정책을 지지했다.

 

중견정치인(1815-1857)

1820년 뷰캐넌은 펜실바니아주 대표로 미 연방하원에 입성하였다. 1824년 연방당이 와해되면서 뷰캐넌은 민주공화당 대선후보인 앤드루 잭슨을 지지하였다. 1828년에도 뷰캐넌은 잭슨을 지지하여 잭슨이 대선에 압도적인 승리하면서 창당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1832년 재선에 당선된 잭슨은 뷰캐넌에게 주러시아 미대사직을 부탁했다. 처음엔 망설이다 수락을 한 뷰캐넌은 18개월간 러시아에 머물면서 불어도 익히고 외교능력을 과시하여 러시아와 무역 및 해양관계에 대한 조약을 맺었다.

 

미국에 돌아온 뷰캐넌은 펜실바니아 대표 미연방상원에 입성하여 3선에 당선되었고 잭슨의 민주당 정책을 따라 연방은행 재설립을 반대하였다.

민주당에 소속되면서 뷰캐넌은 정치사상을 180도 바꾸고 노예제도에 언급을 피하고 서부개척에 필요한 노예제도는 주정부 관할로 위임해야 된다고 주장하여 남부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844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로 지명 받으려 했으나 제임스 포크에게 밀려 탈락되었다.

1845년부터 1849년까지 뷰캐넌은 포크내각의 국무장관직을 수락하여 오레건 협약과 구아달루프 조약을 맺어 포크의 미 합중국 영토확장을 도왔다.

 

 1848년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참가했으나 루이스 캐스에게 참패 당했다. 그 후 정계를 떠나 랑캐스터로 돌아와 프랭클린 마샬 칼리지 대학장을 지내며 조용히 1852년 대선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1852년 6월 1일부터 5일까지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뷰캐넌은 다수의 표를 유지했으나 2/3의 지지를 받지 못해 계속적인 지명투표로 이어지다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양보하였다.

뷰캐넌은 피어스 14대 대통령의 제의로 1853년부터 3년간 주영국 미대사직을 맡고 클래런든 영국 외무장관을 만나 영국의 중남미 진출을 방지하는 압력을 불어넣었다.

 

1854년 뷰캐넌은 자신은 반대했지만 피어스의 지시에 의해 재정난에 허덕이는 스페인에게 쿠바 매도요청을 했다. 만일 스페인이 거절하면 다른 수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오스텐드 메니페스트 요구서는 스페인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국 내에서 특히 북부지역의 비난을 받게 되어 쿠바매입 계획은 무산되었다.

 

1856년 대선(1856)

1856년 6월 2일부터 6일까지 신시내티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지명을 위해 참가한 뷰캐넌은 인기를 잃은 피어스 14대 대통령과 스티븐 더글라스, 루이스 캐스를 누르고 17번째 지명투표에서 296표의 만장일치로 잔 브레킨리지 러닝 메이트와 함께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1856년 대선 유세에서 뷰캐넌은 모르쇄당의 밀라드 필모어 13대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잔 프레만트 대선후보들과 경선을 했다. 뷰캐넌은 주로 편지를 사용하여 유세를 했다. 그는 공화당이 노예문제로 지역감정을 일으켜 남과 북을 가른다고 비난하며 자신은 남북통합을 위한 평화적인 연방정책을 세운다는 선거유세를 강조했다.

 

1856년 11월 4일 대선결과에서 뷰캐넌은 296개의 선거인단 중 174표로 45%의 선거인 지지를 받아 114표로 33.1 %의 지지를 받은 프레만트를 누르고 15대 대통령이 되었다.

 

뷰캐넌은 현실성이 없는 평화통일과 비슷한 평화통합 구호로 당선되었다. 피어스의 실책으로 미연방은 이미 남과 북이 분열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평화와 통합 합성어를 만들어 평화를 선호하는 민심을 얻어 당선되었고 미국을 피바다로 만든 남북전쟁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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