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포항에 사는 친구가 카톡으로 꽃 사진을 보내왔다. 가끔 마당에 있는 화초를 찍어 보내곤 하는데, ‘참, 화단을 예쁘게 잘 가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솜씨가 좋다. 내 생각에는 친구가 꽃 가꾸는 것은 아니고, 아마 아주머니의 취미가 아닐까 싶다.

이 친구는 동네에서 함께 자라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공부를 잘 해서 서울대 의예과를 갔고, 졸업 후 정형외과 의사가 됐다. 어렸을 때, 동네 어머니들이 이 친구와 함께 과외 공부시키려고 꽤 애를 썼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서울대학병원과 금강병원 등에서 근무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 프랑스 유학도 다녀왔다. 시간 있을 때마다 짬 내어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무료 수술도 다니는 등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에 맞게 ‘베풂의 미덕’을 실천하며 산다. 이렇게 순탄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그에게 누군가 솔깃한 제안을 한다. “내가 투자를 할 테니 공동으로 병원을 운영하자”는 거다.

 소머리탕으로 유명한 곤지암 근처에 병실 100개가 넘는 규모의 큰 병원을 세운다. 그때가 아마 40대 중반이지 싶은데, 그 뒤로는 서로 바쁘고 사는 밭이 너무 달라 연락도 소원해진다. 그러다가 들리는 소식으로는 동업자하고 문제가 있어 갈라섰고, 운영하던 병원은 공중 분해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생, 나락으로 떨어진 거다. 그 후, 이 친구는 지방 어디론 가로 가서 살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면서 나도 이민 오는 바람에 그나마 소식도 알 수 없다가, 몇 년 전 초등학교 친구 단톡방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다행히 재기해 포항에서 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보내온 꽃 사진을 보고 내가 물었다.

“서원장! 꽃이 참 예쁘네요. 이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동양 모란(?) 같네요. 그 잎도 참 찰져 보입니다.” 친구가 답을 보내왔다. “피었니? peony”.

예나 지금이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꼭 체를 한다. 물론 내가 영어권에 살고 있긴 하지만, 꼭 잉글리쉬로 답을 해야 하나. 피오니(peony)가 뭐지? 사전을 찾아보니 작약이다. 풀에 핀 것은 작약이고, 나무에 핀 것은 모란이라고 한단다. 그리고 포항 친구가 사진 두 장을 더 보내왔는데, 자세히 보니 여러 화초 사이에 모란도 있었다.

작약의 꽃말은 ‘수줍음’이다. 꽃잎이 풍성하고 화려해 함박꽃이라고도 한다. 영어 이름 피오니(Peony)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의사’인 피에온(Paeon)의 이름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 피에온은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lus)의 제자였는데, 그를 질투한 스승의 노여움을 사서 위기에 처하자, 제우스가 그를 작약(peony)으로 변하게 하여 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피오니는 작약일 수도 있고 모란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작약은 ‘신들의 의사’를 상징하는 꽃이니, 친구가 작약 사진을 보내온 것은 ‘나, 의사 짓 하며 잘 살고 있다’고 사인을 보낸 것이지 싶다. 참, 나니까 똑똑하여 이렇게 해석을 하지,다른 녀석들은 감이나 잡았겠나?

 

 

모란하면 김영란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와 조두남 가곡인 ‘또 한송이의 나의 모란’이 생각난다. 그리고 조영남이 부른 ‘모란 동백’이 있다. 하지만, 이 ‘모란 동백’은 사실 조영남의 곡이 아니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이 노래의 원작자는 소설가 이제하다.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러 음반도 냈다. 처음 제목은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었다. 김영랑과 조두남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작품 일부를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하는 소설가며 화가이며 가수다. 그는 벌써부터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노래 잘하기로 소문이나 기타 들고 여기저기 무대에 자주 서 왔다. ‘모란 동백’은 1980년대 후반에 만든 노래로 음반이 나오기 전에는 지인들끼리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한 것을 돌려가며 들었다.

당시 그가 불렀던 모습이 유튜브로 떠도는데, 노래에 깊이와 철학이랄까, 그런 묘한 매력이 있다. 어느 날, 조영남이 이 노래를 듣고 반해 이제하에게 부탁해 리메이크를 했다. 제목도 단순하게 바꾸고 가사도 좀 깔끔하게 고쳤다.

조영남은 언젠가 MBC라디오 ‘싱글벙글 쇼’에 나와 “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모란 동백’을 불러달라”고 애기할 정도로 이 곡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하긴, ‘모란 동백’은 나 같은 한물간 남성들이 좋아하고 삶의 끄트머리에서 들으면 더욱 와 닿는 노래이다.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라는 가사는 장례용으로는 딱 맞춤이다.

이제하는 장르를 넘나드는 멀티플레이어였다. 1998년 환갑의 나이에 <빈들판>이라는 CD를 만들어 가수로 데뷔한다. 친구들이 환갑 선물 겸해서 돈 모아 음반을 내준 것이다. 여러 재주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소설도, 음반도 경제적으로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해 생계를 위해 대학로 동숭동 근처에 <마리안느>라는 카페를 운영했다.

 

 

이제하는 1937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홍익대 서양학과를 5년 동안 다녔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58년에 <현대문학>에 시로 문단에 오른 후, 여러 작품들을 발표한다. 모두 7권의 소설집과 시집 2권,동화책 2권, 영화칼럼집 2권을 냈다. 그림 전시회도 세 차례 열었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등 여러 수상을 한다.

그의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1987년에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자신의 작품 제목처럼 그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나그네였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죽은 아내의 유골을 뿌리려 동해안으로 가는 한 남자의 여정을 그린 것이다. 그 길 속에 만나는 현실과 환상, 우연과 필연이 엉켜 시와 그림처럼 펼쳐진다. 시나리오 기법으로 리얼리즘에 초현실주의를 가미해, 소설가이며 화가가 아니면 소화시키지 못할 표현들이 곳곳에 묻어 있다.

동숭동 카페 때는 직접 그린 그림과 도자기도 구워 팔았다. 그리고 자신의 글씨를 폰트화해서 <길손체>라는 글씨를 디자인해 북디자인 분야에 내놨다. 자음과 모음을 조립한 것이 아니라, 2780자를 일일이 손으로 다 썼다. 도대체 그의 본직은 무얼까, 싶어 한 기자가 물었다.

“저요, 본업이 소설가죠. 그런데 책이 잘 안 팔려요. 먹고 살려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요즈음 이제하는 동숭동 카페를 접고, 제주도 성산포로 내려가 갤러리를 만들어 그림 그리며 가끔 ‘모란 동백’을 부르며 살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민가수 나훈아도 새 앨범에 ‘모란 동백’을 넣었다. 자존심 센, 나훈아가 조영남이 히트 친 노래를 다시 리메이크한 걸 보면 ‘모란 동백’이 대단한 곡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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