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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17'의 롤모델은 캐나다인?

 

 최근에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칼럼을 준비하면서 '가을의 전설(Legends of the Fall·1994)'을 다시 보았다. 이미 본 영화이지만 그 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의 중심인 윌리엄 러드로우 대령(앤서니 홉킨스)은 미합중국 정부의 인디언 말살 정책에 불만을 느끼고 스스로 퇴역하여 몬태나 주의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는 큰 농장에 정착하여 원주민 친구들과 함께 세 아들을 키우며 평화로운 삶을 영위한다.

 

 장성한 세 아들은 1차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에 자원한다. 그런데 삼형제는 캐나다군에 합류하여 참전한다. 당시 1차대전 때 영국의 연방국가인 캐나다도 원정군(Canadian Expeditionary Force, CEF)으로 참전하였는데, 특히 1914~1919년 사이에 맹활약한 알버타 CEF 제10대대가 유명하다. 미국인 지원자들은 대부분 CEF를 통해 장교 또는 병으로 참전했는데, 영화 속 삼형제도 바로 CEF 10대대 소속으로 출전한다.

 

 참호,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대표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장남 알프레드(에이던 퀸)는 다리 부상을 입고, 막내 새뮤얼(헨리 토머스)은 전사한다. 둘째 트리스탄(브래드 피트)은 새뮤얼의 심장을 도려내 고향에 보내 장사 지내게 하는 한편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밤마다 인간사냥을 하여 독일군의 두피를 벗겨온다.

 

 그런데 CEF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중 아주 귀한 자료를 발견했다. 바로 온타리오 주 개너노퀘이(Gananoque) 출신의 해리 브라운(Harry W. Brown, 1898~1917)이다.

 

 1898년 5월9일에 태어나 15일 마을에 있는 세인트 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이 '존 헨리 브라운(John Henry Brown)'이었음이 밝혀졌다. 행정관의 실수로 이름이 '해리 W. 브라운'으로 굳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재혼한 패트릭 맥콜리프의 농장에서 일하다 그의 누이가 있는 온타리오 주 런던으로 옮겨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중에 1916년 8월18일 캐나다 보병대대 징집영장을 받고 영국으로 파병됐다가 1917년 5월27일 프랑스에 참전 중인 캐나다 CEF 제10대대로 전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운은 프랑스 서부전선 '힐70고지 전투(Battle of Hill 70)' 중 아군이 고지를 점령한 후 독일군의 재탈환을 위한 총공격이 시작되자 통신망이 두절된 상태에서 본부에 즉각적인 포병 지원을 요청하는 '아주 중요한 명령서'를 전달하는 전령의 임무를 띠고 다른 병과 같이 가다가 그는 전사하고 혼자서 1917년 8월16일 드디어 한 장교에게 메시지를 전해줌으로써 독일군을 무찌르고 큰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브라운은 수많은 부상으로 그 다음날 사망했다. 당시 19세였다. 전사한 8월17일자로 브라운 일병에게 영국 최고의 훈장인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Victoria Cross)이 추서되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007영화 '스카이폴(2012)' '스펙터(2015)'로 잘 알려진 샘 멘데스 감독의 2019년 영화 '1917'의 롤모델과 거의 같은 데에 놀랐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4월6일, 독일군에 의해 모든 통신망이 파괴된 상황 속에서 영국군 윌리엄 스코필드 병장(조지 맥케이)과 토머스 블레이크 병장(딘 찰스 채프먼)에게 하나의 미션이 주어진다. 독일 육군의 함정에 빠진 영국군 데본셔 연대 2대대의 수장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에린모어 장군(콜린 퍼스)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는 것!

 

 황폐화 되어 있는 무인지대(No Man's Land, 독일군 참호와 연합군 참호 사이의 약 250-300m 정도의 넓은 공간을 일컫는데, '지옥의 여정'이라고도 불렸다)를 가로질러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겪으며 끝내 임무를 완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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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은 1차 대전 당시 전령으로 활동했던 샘 멘데스 감독의 할아버지 알프레드 H. 맨데스가 들려준 이야기를 근거로 제작된 영화이다. 따라서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더욱이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영화 속 주인공 및 조연 인물들 모두 역사적 고증에 바탕하지 않은 픽션이다.

 

 어쩌면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이러한 '전령' 관련 사건이 해리 브라운 한 사람뿐이었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 영화의 롤모델은 해리 브라운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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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 다 시점은 1917년으로 같은데 브라운은 8월16일이고, 스코필드는 4월6일이다. '힐70고지 전투'는 8월15~23일 사이에 프랑스 라스(Lens) 근교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캐나다군과 독일 육군 4개 사단과의 치열한 전투로, 캐나다군은 전사자 2,400명을 포함한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 브라운의 소속은 CEF 10대대, 스코필드는 영국 육군 보병부대로 둘 다 보병이며 전령의 임무도 같다.

 

• 브라운과 함께 간 병사는 도중에 사망했는데, 마찬가지로 스코필드와 같이 간 블레이크도 중간에 사망한다.

 

• 브라운은 메시지를 본부와 가까이 있는 한 장교에게 전해주고 다음날 사망했고, 스코필드는 지휘관에게 직접 전달해주고 살아남는다. (그래서 손자에게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었다?)

 

• 브라운은 19세의 독신 일병이었지만 스코필드는 20대 초반의 처자식을 둔 병장이고, 죽은 블레이크가 19세였다.

 

• 이 일로 스코필드 단독 또는 블레이크 포함하여 훈장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둘의 대화 중 스코필드는 솜 전투에서 훈장도 받았다고 언급하는데 훈장을 '쇠쪼가리'라고 부르거나 프랑스 군인의 와인 한 병과 교환해 버렸다는 걸 보면 명예 같은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진짜 그랬을까?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는 1916년 7월1일 프랑스 북부 솜 강 30km에 걸친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투 참여 인원 약 3백만 중 3분의 1이 전사하는 역사상 초유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베르됭 전투(Battle of Verdun)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철조망과 기관총 참호 제거를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11월13일 영국군은 마지막 공세를 취해 독일군의 보몽 하멜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1월18일 폭설로 중단되었지만 42만 명의 영국군과 20만 명의 프랑스군이 다치거나 전사하고 독일군도 50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기록한 대격전이었다. 그런 훈장을 엿 바꿔 먹다니!

 

• 한편 해리 브라운은 사실에 근거하여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VC)을 받았고, 그 훈장은 오타와의 '캐나다 전쟁박물관(Canadian War Museum)'에 전시돼 있으며 개너노퀘이 및 오메미 전쟁기념관을 비롯하여 많은 곳에 세워진 위령탑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쩌면 1차 대전 당시 해리 브라운 일병의 무공담은 연합군 참전용사들 사이에 널리 회자 되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군대생활 얘기만 나오면 모두 '한가닥' 했던 것으로 자랑스럽게 얘기하듯이 재미 있으라고 살을 붙여 자기의 얘기로 둔갑시킨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한편 이런 좋은 소재를 왜 캐나다에서 정작 영화로 만들 생각을 못했을까. 'Lest We Forget'이란 구호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끝)

 

▲ 해리 브라운 묘지 표석 - 이름 뒤의 VC는 Victoria Cross 수상자임을 가리키며 밑에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이 새겨져 있다. <자료: 캐나다전쟁박물관 온라인>

▲ 해리 브라운 및 관련 사진과 공적에 관한 기사 <자료: Gananoque Remembers>

▲ '1917(2019)' 영화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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