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마리아 바이 칼라스’ (Maria by Callas)(하)

 

오페라의 성녀(聖女) '칼라스'와 아내•엄마가 
되고픈 여성 '마리아'의 내적 갈등 묘사

 

 

(지난 호에 이어) 
 칼라스가 오페라에 바친 공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막대한 것이다. 특히 케루비니, 벨리니, 도니제티, 로시니 등의 고전적 벨 칸토(소리 자체의 아름다움과 균등한 울림에 중점을 두는 18세기 이탈리아에서 성립된 발성법) 오페라의 음악적, 극적 가치를 부활, 전성기의 길을 터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녀는 벨 칸토 콜로라투라(가장 음이 높고 까다로운 화려한 고난도 창법)에서부터 푸치니의 '토스카' 및 '투란도트', 베르디의 '아이다' 및 '일 트로바토레',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가혹한 도전에도 마다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 그녀가 부른 아리아가 10곡 정도 나오는데 그 중에서 빈첸조 벨리니의 '노르마(Norma)' 제1막에 나오는 '정결한 여신(Casta Diva)'을 두 팔을 가슴에 안고 부를 땐 눈물이 나온다(특별히 컬러로 처리했다). 


 또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세니에(Andrea Chenier)' 중 제3막에 나오는 '어머니는 돌아가시고(La Mamma Morta)'는 1993년 동성애자 영화 '필라델피아'에 삽입되어 톰 행크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곡이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라 디비나(La Divina)' 즉 '성녀(聖女)'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칼라스는 20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오페라계의 성자이며 순교자, 아니 순교자였기 때문에 성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그녀를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순수한 에너지 자체'라며 '오페라의 바이블'이라고 극찬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에서 앤 공주 역으로 나오는 날씬한 오드리 헵번을 동경하던 칼라스는,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당신 몸매가 오드리 헵번 같다면 진정한 트라비아타가 될 것'이라는 말 한마디에 1954년, 10개월에 걸친 노력 끝에 체중을 30여 ㎏ 줄이는 다이어트에 성공하여 키 174㎝의 늘씬하고 우아한 몸매의 여인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녀가 변하기 시작한다. 195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성공적인 데뷔 직전에 칼라스는 은인 세라핀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그 이유는 세라핀이 그녀와 한마디 상의 없이 다른 소프라노 가수를 뽑아 '라 트라비아타'의 전곡 녹음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칼라스의 끈덕진 보복으로 일을 얻을 수 없게 된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연출자•지휘자였던 노(老) 세라핀은 불우한 만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1958년, 칼라스는 공연계약 파기, 공연 포기 등을 거듭하면서 불화와 분쟁의 씨를 뿌린다. 1월2일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이탈리아 조반니 그론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벨리니의 '노르마'를 공연할 때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먹고 공연했으나, 통증과 약기운 때문에 결국 공연 중간에 그만두게 됐다. 청중들은 화가 나서 그녀를 맹비난했다. 


 5월에는 라 스칼라 극장에서 벨리니 오페라 '해적(Il Pirata)' 공연 중, 감독 안토니오 기린겔리와의 오랜 갈등으로 1959년 말까지 남은 계약 기간 동안 공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설상가상으로 11월6일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루돌프 빙 총감독은 1959년 시즌에 칼라스를 투입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해고를 통보해 왔다. 


 칼라스는 극장 측이나 동료들뿐만 아니라 종종 본인의 팬들과 언론에까지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그러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될수록 칼라스의 지명도는 더욱 높아졌고, 극장 앞은 그의 공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편 남편인 메네기니는 유럽의 콘서트를 알아보았고, 드디어 1958년 12월19일 칼라스는 파리 오페라 콘서트에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1907~1975)의 요트항해에 남편과 함께 초대받은 칼라스는 '세기의 연인'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 안의 여성 '마리아'를 재발견한 것일까. 


 1959년, 만 35세의 칼라스는 당시 53세였던 오나시스와 호화 요트로 애정 도피를 감행, 전세계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메네기니와의 10년에 걸친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결국 자기를 '세계의 디바'로 키워 주기 위해 물심 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네기니와 세라핀을 버렸고,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조차도 아랑곳하지 않은 마리아 칼라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 목소리와 예술의 쇠락뿐이었다. 

 

 

 

 


 1966년, 법에 따라 그리스 국적을 획득하기 위해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오나시스의 지시를 따라 그의 아이를 유산하면서까지 그와의 결혼을 갈망했지만, 오나시스의 사랑은 그녀의 재능과 명성만 갈구했을 뿐 일시적인 희롱에 지나지 않았고, 그는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1929~1994)과 결혼했다. 


 이후 파졸리니 감독의 '메데아(Medea•1969)'에 첫 출연하나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나시스는 재클린과의 결혼 이후에도 칼라스를 그리워했고 종종 그녀를 만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이러한 복잡다난한 개인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 무리한 다이어트와 일정 소화 등이 그녀의 목소리를 너무 일찍 시들게 한 요인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어쩌면 자기의 신념을 관철하고자 하는 그녀의 불 같은 성격이 자기 스스로를 비극으로 내몰았는지 모를 일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1965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한 코벤트 가든 왕립오페라 극장에서의 '토스카(Tosca)'를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사라진다. 영화에서는 이때 2막에 나오는 유명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가 나온다. 역시 컬러 화면으로 처리했다.

 

 

 


 자료화면에 루키노 비스콘티 및 비토리오 데 시카, 장 콕토 등 영화감독, 그리고 배우 오마 샤리프, 카트리느 드뇌브, 브리지트 바르도 등이 잠깐씩 보인다. 


 칼라스가 1974년 옛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이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1921~2008)의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국, 유럽, 아시아에 이르는 세계투어 공연의 일환으로 그 해 10월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이화여대 대강당에 섰던 그녀는 카르멘과 라 조콘다, 메피스토펠레스, 라 보엠, 토스카 등의 타이틀 롤을 선보였다. 


이때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의 칼라스를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지만, 관객들은 칼라스의 주옥 같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서 있는 칼라스의 전설적인 모습을 감상하는 것에 만족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1977년 9월16일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쓸쓸히 53세의 일기를 마쳤다. 그녀의 시신은 화장되어 에게해에 뿌려졌다. 지난 날 그녀 자신이 "고독은 공허하며 그것은 무(無)"라고 했지만 이 말 자체가 그녀의 만년을 선명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것이 진짜 여자가 되는 일"이라고 말했던 '마리아'는 이제 만인의 연인, 전설의 디바 '칼라스'로 남아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끝)

 

 

※ 알림: 갤러리아 쏜힐점 문화교실 '손영호의 여행•영화•음악 이야기' 강의가 내일(토) 오후 5시에 있사오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