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유명 음악가 시리즈(X)-'아마데우스(Amadeus)' (7)

 


짧지만 굵게 살다간 노력하는 천재 음악가

 

 

 

(지난 호에 이어)
 좀 정신을 차린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에게 공연이 끝났느냐고 묻고, 공연에 참석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건넨다.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살리에리가 대신 나간다. 병 문안을 온 쉬카네더 일행이 공연은 대성공이었다며 수익금 중 모차르트 몫의 큰돈을 건네주고 돌아간다. 


 살리에리는, 아버지의 혼령이 미사곡을 재촉한다고 믿는 모차르트에게 진혼 미사곡의 작곡 대가로 돈을 받았고, 게다가 내일까지 완성하면 100두카트(약 2천만원 상당의 금화)를 더 주겠다고 말하고 갔다고 속인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병약한 모차르트는 쉬지도 않고 진혼 미사곡의 작곡을 계속하게 되고, 살리에리는 도와주겠다며 그가 불러주는 내용을 악보에 그대로 받아 적는다. '레퀴엠' 중 1. 죽은자의 안식을 비는 입당송(Introitus), 3. 부속가 중 진노의 날(Dies Irae) 등이 부분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살리에리의 비겁한 행동은 전혀 모른 채, 오히려 그에 대한 자신의 오해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모차르트. "제가 눈을 붙이고 있는 동안 제 곁에 있어 주시겠어요?"

"떠나지 않겠네." "부끄럽군요." "뭐가?" "어리석었어요. 당신이 날 별볼일 없게 보는 줄 알았어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진혼 미사곡이 점점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춰 가고 있던 무렵, 콘스탄체가 남편을 염려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자신을 모욕했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 콘스탄체는 남편의 필체가 아닌 진혼 미사곡의 악보를 보곤 살리에리를 내쫓는다. 

 

 

 

 

 

 

 

 


 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에 7살짜리 아들 카를 토마스는 아버지 손에 쥐어진 금화를 만지작거리는데, 모차르트는 결국 숨을 거두고, 끝내 "레퀴엠(Requiem Mass in D Minor, K.626)"은 완성되지 못한다. [註: 모차르트가 1791년 12월5일 새벽 1시경에 35세로 사망했을 때 그의 후원자였던 판 슈비텐 남작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장례일정을 준비했으며 장례식은 바로 다음날에, 9년 전인 1782년 결혼식을 올렸던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콘스탄체의 기록에 의하면 판 슈비텐은 모차르트 사후에도 그의 가족을 돕기 위해 1793년 1월2일 그가 작곡한 '레퀴엠'을 공연하는 자선연주회를 열어 당시 거액인 수익금 300두카트(약 6,100만원)를 전달했으며 아들 카를 토마스가 프라하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는 등 도량이 크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폭풍우와 진눈깨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모차르트의 시신은 비엔나 외곽의 빈민 공동묘지에 이름없는 시체들과 함께 묻힌다. 모차르트가 가난해서 빈민묘지에 공동매장된 것으로 묘사되어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註: 그러나 당시 요제프 2세 황제의 칙령으로 1784년부터 개별 매장을 금지시켰고 관 및 방부제 사용과 위치표시(묘비)를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 규정에 따라 엄격히 집행된 것이다. 이 집단묘지는 '성 마르크스 평민묘지'로 1874년에 폐쇄되었으나 1937년에 역사적 유물로 지정되면서 1950년에 조각가 요제푸 드로우옷(Florian Josephu-Drouot, 1886~1978)에 의해 새로 단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인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로 비엔나에서 객사하고 행방이 묘연한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에 비하면 그래도 모차르트는 행복한 편이라고나 할까…. 또 기록에 의하면 영화와는 달리 날씨는 평온하고 온화했다고 하며, 문상객은 판 슈비텐, 살리에리, 쥐스마이어(모차르트의 미완성 '레퀴엠'을 완성시킨 제자로 그도 이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2명의 음악가였다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장모 베버 부인, 쉬카네더, 카발리에리, 하녀 로리 등이 보인다. 당시 장례예식은 영화에서처럼 상주를 비롯한 문상객은 하관식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이때 흐르는 음악이 '레퀴엠' 3악장 '부속가(Sequentia)' 중 마지막 여섯 번째 단인 '눈물 겨운 그날(Lacrimosa)'로 음악 자체가 관객의 슬픔을 그대로 대변하는 곡이다. 합창으로 된 그 가사를 보면 다른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 


 Lacrimosa dies illa(눈물 겨운 그 날이 오면) / Qua resurget ex favilla(티끌로부터 부활하여) / Judicandus homo reus.(죄인은 심판을 받으리라) / Huic ergo parce, Deus(하오니 주님, 그 사람을 어여삐 여기소서) / Pie Jesu Domine(자비로우신 주 예수여) / Dona eis requiem. Amen.(그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아멘)

 

 

 

 


 장면은 고해성사를 받는 포글러 신부의 눈물 젖은 얼굴과 '으흐흐'하고 웃는 늙은 살리에리의 얼굴이 대비된다. 모차르트가 사망한 이후의 불행한 자기 삶을 토로하고 하느님을 저주하며 신부와의 얘기를 끝맺는 노년의 살리에리. 


 "당신들의 자비로운 신은 사랑하는 자녀를 파멸시켰소. 자신의 아주 작은 영광 한 조각도 나눠주지 않으면서, 모차르트를 죽이고 날 고통 속에서 살게 만들었소. 32년 간을 고통 속에서 아주 천천히 시들어가는 나를 주시하면서. 나의 음악은 점점 희미해져 갔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희미하게, 끝내는 아무도 연주를 하는 사람이 없게 됐지. 한데 그의 작품은…" 

 

 

 

 


 이때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 K.466' 중 2악장이 흘러나온다. 보조원의 휠체어에 실려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며 정신병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읊조리는 살리에리!


 "나는 보통 사람들의 대변자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자지. 난 그 평범한 사람들 중 챔피언이요! 그들의 후원자이기도 하고! 으흐흐…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여! 너의 죄를 사하노라! … 너희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직전에 모차르트(톰 헐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음악과 함께 슬프게 느껴진다….


 모차르트는 사망 후 곧바로 위대한 작곡가로 회자되었다. 콘스탄체의 사업수완도 한몫을 했지만 너무나 짧은 삶에 비해 많은 주옥 같은 작품을 남긴 '노력하는 천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註: 콘스탄체(Maria Constanze Mozart, 1762~1842)는 모차르트가 죽자 1798년부터 세입자였던 덴마크 외교관이며 모차르트 자서전 작가인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 1761~1826)과 동거하다 1809년 재혼했다. 그녀는 모차르트의 악처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사실은 사업수완이 좋아 재산을 불려 부자가 되었고 막내 동생 소피(1763~1846)와 함께 잘츠부르크에서 살다 80세로 사망하여 제바스티안 교회 묘지에 묻혔다.] 


 '모차르트 효과'란 말이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지능 발달, 심리적 안정 등이 향상되는 효과를 말한다. 사랑이 메말라가는 각박하고 팍팍한 세상이다. 아마데우스의 음악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어보자. (끝)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