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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VIII)-'내 이름은 바흐'(2)(My Name Is Bach)

 


왕과 거장 음악가의 만남, '음악적 헌정'을 통해 교감

 

 

 

 

(지난 호에 이어)
 왕이 계속 읊조리던 다섯 음을 하프시코드로 쳐보이며 크반츠 교수에게 그 뒤를 즉석 연주해 보라고 부탁하면서, 바흐가 포츠담으로 오고 있으며 오늘밤 이 주제에 의한 3성 및 6성 푸가를 즉흥 연주하도록 그를 시험해 볼 것이라고 말한다. 


 바흐의 절친한 친구인 크반츠는 "내가 그에게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라이프치히의 위대한 작곡가이며 오르가니스트인 바흐를 존경심은커녕 이런 식으로 시험하는 건 좋지 않다"고 충언을 하고, 덧붙여 "바흐는 노인이고 당신 아버지 뻘이 된다"고 말한다. 


 이에 왕은 정색을 하며 "당신은 연봉 2천 탈러(1억5천만원) 외에 플루트 교습료를 따로 지불하고 고용된 교수"임을 상기시키며 "나에게 설교 따윈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註: 프리드리히 2세는 청소년기에 바흐와 비발디, 헨델 등의 음악에 정통했고, 크반츠로부터 플루트를 지도받아 자주 연주회를 열곤 했다. 그러나 쾌락이나 즐거움을 주는 예술이나 학문 등을 엄격히 금지했던 부왕은 이러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분노하여 장소를 가리지 않고 회초리나 몽둥이로 그를 때리거나 걷어차고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반발심리로 예술심취와 함께 부정적인 인간관을 형성했다. 그는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남이 자신의 견해에 토를 다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이즈음 포츠담의 에마누엘 집에 도착한 바흐는 손자를 안으며 며느리 요한나 마리아(안체 베스테르만)에게 프리데만이 톨 게이트에서 '아담'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요한 제바스티안 2세'라고 지으려고 했다며 실망스런 눈치다. [註: 에마누엘 바흐는 1744년 와인 가게의 딸인 10살 연하의 요한나 마리아 단네만(Johanna Maria Dannemann, 1724~1795)과 결혼하여 다음해에 아들 요한 아담(1745~1789)을 낳았으나 당시 유아사망률이 높은데다 세례식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렸던 것 같다. 그 후 딸 안나 카롤리나 필리피나(1747~1804)에 이어 아들을 낳자 요한 제바스티안 2세(1748~1778)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아무도 음악가가 되지 않았고, 막내는 유망한 화가였으나 1778년 로마로 유학 가는 중에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사망했고, 딸은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대가 끊겼다. 에마누엘은 1788년 12월14일 함부르크에서 74세로 사망하여 성 미하엘 교회에 묻혔다.]


 바흐가 "내 나이에 뼛속까지 흔들어 놓는 마차를 타고 3일 걸려 여기 오느라 피곤하고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註: 라이프치히 - 포츠담 거리는 약 160km로 지금은 차로 1시간 반 정도 걸리지만 18세기에는….]


 요한나가 잽싸게 식사를 준비해 올리는데 왕의 전령이 도착해, '안할트- 쾨텐 궁정의 카펠마이스터'이며 '폴란드왕 겸 작센 선거후의 궁정작곡가'이며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이신 바흐를 국왕께서 소환한다고 정중히 예를 갖추고 길게 알린다. [註: 바흐는 1685년 아이제나흐(Eisenach) 태생이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56)가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1522년 9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바흐가 쾨텐(Koethen)의 궁정작곡가로 있을 때 결혼한, 그의 6촌으로 한 살 위인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1684~1720)가 1720년 5월에 급사한다. 결혼한지 12년 8개월만이었다. 첫 부인과 사별한지 17개월만인 1721년 12월3일에 쾨텐 궁정 트럼펫 연주자의 딸인 스무살의 꽃다운 처녀 안나 막달레나 빌케(1701~1760)와 재혼했다. 안나가 낳은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는 영국 Queen Charlotte (조지 3세 국왕의 왕비) 악단의 음악장을 지냈기 때문에 '런던 바흐'라고 불리고, 에마누엘은 '베를린 바흐' 또는 그의 대부인 텔레만의 카펠마이스터를 계승했기 때문에 '함부르크 바흐'라고 구분해 부른다. 그러나 안나 막달레나는 말년에 돈 한푼 없이 노상에서 사망하여 라이프치히의 성 요한 교회의 묘지에 묻혔으나 그마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버린 비운의 여인이다.]

 

 

 

 


 궁정에는 플루티스트인 프리드리히 2세가 크반츠 작곡의 '트리오 소나타 E단조'를 하프시코드, 바이올린, 바소 콘티누오 등과 함께 연주하고 있다. 집사가 바흐의 도착을 알리자 중간에 연주를 멈추고 내빈들에게 바흐의 출현을 알리는 왕. 


 바흐는 왕에게 대뜸 악수를 청하고, 프리데만은 아말리에 공주의 손에 키스를 하면서 '폐하(Your Majesty)'라고 불러 웃음거리가 되는데….

 

 

 

 


 왕은 "이제 하프시코드 시대는 끝나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바흐를 그가 새로 구입한 '피아노포르테'가 있는 방으로 안내한다. 바흐는 "폐하, 이런 기회를 주시니 기쁨과 영광입니다."라고 예를 갖추어 말하고, 한 피아노를 연주해 보고는 "잘 통제돼 있고 음이 정확하며 훌륭합니다"고 격찬하며 "나도 이런 악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한다. 


 왕은 이 말에 신이 나서 "나의 친애하는 바흐 선생이 여기 와 주셔서 얼마나 영광인지 모르겠습니다"라며 또 다른 피아노포르테로 안내한다. 그러나 바흐는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을 연주해 보며 키가 손가락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조도 맞지 않아 자기 음악에는 이 피아노가 맞지 않는다고 평한다.

 

 

 

 


 결론적으로 이 피아노포르테들은 아직 미완성 상태이며 시스템이 완벽하게 되어야 한다며 "만일 이 상태에서 이들 피아노를 구입했다면 오만하게 뽐낼 이유가 없다"고 내뱉곤 이제 집으로 가겠다고 방을 나가는 바흐….


 여기서 잠깐 '피아노의 역사'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지금의 피아노는 원래 이름인 'pianoforte' 또는 'fortepiano'를 줄여 쓰는 말이다. 마치 'violoncello'를 줄여서 첼로라고 부르듯이. 피아노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하프시코드(쳄발로)와 클라비코드가 대표적인 건반악기였는데, 지금과 같은 효과적인 피아노의 발명은 1700년대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국 파두아 출신인 쳄발로 제작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 1655~1731)에 의해서였다. 그 후 고트프리트 질버만(Gottfried Silbermann, 1683~1753)에 의해 독일에서 피아노가 완성된다. 


 1740년대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질버만의 피아노를 15대나 구입했다고 하는데, 현재 포츠담 궁에는 2대가 보존되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알림: 9월 5일(수) 갤러리아 쏜힐점에서 문화 강의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중국 서안 둘러보기), 천하성, 한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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