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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음악가 시리즈(V)-'쇼팽의 연인’ (Impromptu)(4)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여걸 문학가 조르쥬 상드와의 사랑을 그린 작품

 

 

 

(지난 호에 이어)
 서로 격렬하게 다투는 리스트 부부를 뒤로 하고, 쇼팽은 상드와 두 아이들과 함께 질투심과 경쟁심으로 얼룩진 파리를 떠나 스페인 마요르카(Majorca) 섬으로 여행길에 오르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평론가들의 평점은 대체로 높은 편이었지만, 상황 설명에 지극히 인색하여 등장인물의 배경과 상황을 모르면 도대체 뭐하는 건지 모를 따분한 영화가 되지 싶다. 게다가 특별한 시각적인 볼거리도 없으니 심심풀이 땅콩에 다름 아니게 보일 수도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쇼팽이 아니라 상드이다. 그녀를 둘러싼 다른 연인들이 벌이는 해프닝이 그렇고, 리스트의 연인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벌이는 사랑의 곡예도 그렇다. 그래서 등장 인물에 대한 설명을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늘어놓았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진작 쇼팽의 창작적 전성기는 마요르카에서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약 10년의 시기이었기에 영화 밖 이야기로 쇼팽의 일생과 상드에 대해 좀 더 오롯이 언급하는 게 좋겠다.


 1838~1839년 사이 마요르카 발데모사 수도원에서 보낸 상드와 그의 아이들 및 쇼팽의 이야기는 1841년 상드의 소설 'Un Hiver a Majorque (A Winter in Majorca)'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 때의 쇼팽과 상드 얘기는 '쇼팽의 푸른 노트(The Blue Note•1991)' '쇼팽: 사랑에의 욕망(Chopin: Desire For Love•2002)' 등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마요르카 섬의 겨울은 한랭한 우기(雨期)로 몸이 약한 쇼팽은 건강을 크게 상했고 결핵으로 각혈을 많이 했다고 한다. 주거 여건이 좋지 않은 벽지인데다 쇼팽과 상드의 관계를 의심한 동네 사람들의 구박까지 겹쳐 상드의 지극한 간호도 별수 없어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결국 마요르카 섬을 떠나 마르세유에서 잠시 요양을 한 후 상드의 고향인 프랑스 중부의 노앙(Nohant)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1846년까지 쇼팽과 상드는 노앙과 파리를 오가며 지낸다. 이 시절은 쇼팽의 삶에서 매우 행복한 시기였다. 

 

 

 

 


 귀족적 취향에 까탈스럽고 병약한 데다 때로는 상드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그의 곁에 9년 간이나 머물며 헌신적인 모성애적 사랑을 쏟은 상드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지 싶다. 상드는 쇼팽에게 때로는 친구, 때로는 어머니 같은 연인이었고 행복과 영감을 준 예술의 뮤즈였다. 


 마요르카에 머물던 시기에 쇼팽은 24곡의 전주곡을 완성했고, 노앙 시절에도 많은 곡을 썼지만 그 중에서도 '피아노 소나타 제2번 B플랫단조, 작품 35'와 '피아노 소나타 제3번 B단조, 작품 58'을 빼놓을 수 없다. 전자는 노앙에 당도한 직후였던 1839년 여름에, 후자는 노앙 시절의 막바지였던 1844년 여름에 작곡했다. [註: 특히 피아노 소나타 제2번의 3악장인 아주 여리고 슬프고 우울한 단조로 된 '장송 행진곡'은 자신의 장례식뿐만 아니라 존 F. 케네디 미국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및 마거릿 대처 수상 그리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 등의 국장(國葬) 때 연주되기도 한 유명한 곡이다.]


 그러나 쇼팽이 죽기 2년 전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상드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들, 집에서 부리는 일꾼들 같은 문제들이 둘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결국 파국이 오고 만 것이다. 

 

 

 

 


 상드의 딸 솔랑쥐(Solange Dudevant-Clesinger, 1828~1899)는 1847년 19세 때 프랑스의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클레신저(Auguste Clesinger, 1814~1883)와 결혼하였으나 돈 문제 때문에 어머니 상드와 관계가 험악해졌는데, 이러한 솔랑쥐를 '사랑하고 두둔했던' 쇼팽의 태도는 상드로 하여금 노골적인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한편 외젠 들라크로와에게 사사를 받은 예술가이자 곤충연구가였던 아들 모리스(Maurice Dudevant, 1823~1889)는 쇼팽을 엄청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역시 돈 문제였다. 즉 쇼팽이 재산상속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오로지 자신이 '유일한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상드는 남성 편력이 많은데다 과시욕이 넘치는 여자이었기에 '악의 꽃(1857)'으로 유명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는 그녀를 '남성 전용 화장실'이라 혹평했고, 니체 등 다른 비평가들은 '오물을 세척하는 배수구'라고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는 "사람들이 상드에 대해 비난할수록 그녀를 더더욱 명예롭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으며, 플로베르, 스탕달, 에밀 졸라, 도스토예프스키 등 수많은 인사들은 그녀를 칭송하였다. 


 쇼팽은 1848년 2월 그가 작곡한 '첼로 소나타 작품 65'를 첼리스트 오귀스트 프랑숌(Auguste Franchomme, 1808~1884)과 협연한 것이 그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연주였다. 이때부터 거장으로서의 인기는 시들기 시작한다. 따라서 재정적으로 궁핍해졌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쇼팽은 그의 문하생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제인 스털링(Jane Stirling, 1804~1859)의 후원으로 런던에서 5월15일 첫 연주회를 가진다. 영국의 유명한 피아노 제작사인 브로드우드가 그랜드 피아노를 제공했다. 청중 중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알버트 왕자를 비롯하여 '허영의 시장(Vanity Fair)'으로 유명한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 1811~1863)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리운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Jenny Lind, 1820~1887)도 있었다.


 그 해 늦여름에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연주회를 열었다. 물론 일체의 여행비용은 제인 스털링이 부담했다. 꺼져가던 인기가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다시 불을 지핀 것이다.

 

 

 

 


 원래 남녀관계는 소문을 낳는 법. 그러나 쇼팽은 그의 폴란드 친구로 파리에서 은행가로 재직하고 있던 워지쳬크 그르자이말라(Wojciech Grzymala, 1793~1871)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스코틀랜드 여자는 친절하고 헌신적이지만 나는 결혼 침대보다는 무덤에 더 가까이 가고 있다."며 소문에 대해 일축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 알림: 6월 6일(수) 갤러리아 쏜힐 문화센터에서 낮12~오후3시 과학 및 인문 강좌가 있습니다. 강사: 문종명, 손영호(주제: 역사 속 서태후), 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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