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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Luther)"(3)

 

종교개혁 500주년 ― 세상을 바꾼 획기적 사건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의 교수였던 요한 에크는 자신의 대학이 아닌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교묘하게 비텐베르크 대학의 도전자를 끌어들였다. 이 두 대학은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공작령의 작센과 선제후령의 작센을 대표하는 대학교들이었다. 


 루터와 에크의 논쟁은 첫째, 교황의 기원과 권위에 관한 것. 둘째, 성경의 권위에 관한 것. 셋째, 연옥에 관한 것. 넷째, 면죄부와 고해성사에 관한 것 등 네 가지로 요약된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콘스탄츠 공의회(Konstanzer Konzil, 1414~1418)가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잘못 정죄한 것을 들어 교회의 공의회조차도 과오를 범할 수 있으며, 예베소서에 근거하여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주장하였다. [註: 체코 공화국 수도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는 얀 후스(Jan Hus, 1369~1415) 동상이 먼저 반긴다. 후스는 마르틴 루터, 존 캘빈(John Calvin, 1509~1564) 등에 영향을 미쳐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게 한 첫 선구자로서 당시 프라하 카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나 로마 카톨릭 교리를 거스른 이단자로 지목되어 45세에 화형을 당했던 인물이다. 동상 뒤편에 그가 죽기 직전에 설파한 '진리에 대한 7가지 제언'이 체코어로 새겨져 있다.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어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사수하라."]


 이 논쟁을 계기로 해서 루터는 작센의 게오르크 공작(1471~1539, 프리드리히 3세의 사촌)과 적수가 되는 한편,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같은 이를 우군으로 얻었다. 아무튼 요한 에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출교에 대한 교황의 교서를 이끌어내게 된다. 


 여기서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 'Exs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뉘우칠 수 있는 60일 간의 말미를 주면서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위협하였다. 또한 교서는 루터의 반박문 중에서 41개 발언들을 열거하면서 '이단적이고 위법적이며 거짓'이라고 단죄하고,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0일, 루터는 공개적으로 비텐베르크 성의 엘스터 문 앞에서 "교황은 하느님의 대리인이 아니라 악마의 대리인"이라며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의 화형식을 거행하여 불태워 버린다. 결국 그의 책은 불태워도 그의 이상(理想)은 태우지 못하였다.


 드디어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최종적으로 파면하고 로마로 소환하는 명령서인 교황의 교서 'Decet Romanum Pontificem'(로마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를 로마에서 공포하였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토르벤 리브레히트)는 3월 6일, 루터에게 종교재판 소환장을 보낸다. 

 

 

 


 한편 교황의 파면과 소환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현자는 조카인 카를 5세 황제를 교묘하게 설득하여 루터의 신변 안전보장을 약속 받고, 독일의 영주들 및 성직자들이 참석하는 보름스(Worms) 국회에서 루터가 자신을 위해 변호할 기회를 얻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註: 카를 5세는 교황이 직접 왕관을 씌워준 마지막 황제였으며, 이후로는 오직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만이 황제가 되었다. 이 때 프리드리히 현자 역의 피터 유스티노프 경(Sir Peter Ustinov, 1921~2004)의 연기가 빛난다. '쿼바디스(Quo Vadis•1951)'에서 폭군 네로 황제 역으로 나와 눈물단지에 눈물을 짜내는 연기를 연상시키듯 그는 권력을 장난감처럼 잘 다루는 선제후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그러나 황제의 안전 보장은 믿을 바가 못되었다. 선제후의 궁전에서도 의견은 분분하였다. 결국 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루터가 선택할 몫이었다. 루터는 주위의 우려와 권고를 물리치고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서 제자 울리크(마르코 호프슈나이더)를 데리고 보름스로 갔다. 

 

 

 

 

 


 4월 16일 보름스에 도착한 루터는 뜻밖에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슈타우피츠 신부를 만난다. 루터를 돌보러 보름스에 온 그는 "일평생 내가 본 세상은 선을 사랑하기보다는 증오하는 악의 세상이었네. 자네는 그런 세상을 바꾸고 있어."라며 격려하는데… "세상을 바꾸라며 저를 과감하게 보내시던 그날 희생이 없을 거라 보셨습니까?"라고 말하는 루터.


 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한 루터. 카를 5세와 그의 자문관인 알레안드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트리에르(Trier)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묻는다.

 

 

 


 첫 번째 질문은 탁자 위에 나열된 책들을 가리키면서 '95개조 논제(論題)' '면죄부와 은총에 관한 설교' '바빌론 유수(幽囚)'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하여' '독일의 귀족 기독교인들에게 고함' 등의 저자가 당신인가?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라 시인하고 자신이 쓴 책들이 더 있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질문. 이 책들에는 교회에 반하는 이설(異說)이 담겨있다. 그러한 주장을 철회하겠는가? 


 루터는 주님의 뜻이 훼손되거나 제 양심에 위배되지 않도록 만족할 대답을 하고 싶다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황제를 설득한 알레안드로는 하루의 여유만 주었다.


 다음날 4월 18일,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다 같은 내용이 아니므로 전부 철회할 순 없습니다. 우선 1부에는 제게 적대하는 이들조차 유용하다고 여길 만큼 기독교 신앙과 삶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담겼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철회하라는 것은 통념이 된 기독교적 진리를 철회하란 것이 됩니다." 


이 때 알레안드로가 말을 잘라서 '그대는 연설하러 온 게 아니라 답변하러 온 것'임을 상기시킨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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