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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진화론 그 틈새논리

  
 
창조론, 진화론이 논(論)을 달고 있는 걸로 봐 아직은 그 어느 쪽도 절대진리가 아닌 듯하니 그 논(論) 틈새에 끼어 감히 내 생각을 논(論)해보고자 한다.


과학(힘. 시간. 빛. 소리. 냄새. 모양)과 미학(美學)과 정서(情緖)가 생(生)과 사(死) 사이를 간섭하며 더 좋게 되려는 생명체의 모든 과정이 우연한 습성인가? 아니면 창조의지의 결과물인가? 


하긴 솔직히 창조론을 들어봐도 억지 같고 진화론을 들어봐도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니 내 틈새논리가 무엄지경은 아닌 듯하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6일에 걸쳐 우주를 창조하실 때 날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만족해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윈이라는 학자가 나타나 토를 달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는 듯하다.


외적 힘에 의해서건 내적 힘에 의해서건 우주라는 만물 만상이 생겼다는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 자연의 속성이 있었을 텐데 그 속성(? 에너지)이 참으로 궁금하다.


영원히 숨을 쉬는 생명체의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힘의 원천이 과학이 되든 신학이 되든 그 신비엔 변함이 없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잉태되면서 시작된 맥박의 박동이 마치 기름의 힘으로 돌리는 자동차 엔진처럼 죽을 때까지 뛴다는 힘의 원천이 신비함이고, 나아가 내 심장의 박동이 내 죽음으로 소멸된다 해도 씨앗이라는 매체의 연속성에 의해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대를 이어 조금씩 변화를 하며 계속 뛴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다.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생명체가 멈추지 않고 조금씩 변화를 하며 숨을 쉬며 이어나가는 힘(과정)이 그래서 내 보기로는 진화적 속성으로 창조 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우주적 시간 속 어느 순간 만물 만상이 등장, 그 중 생명체라는 회한한 물체가 지구라는 땅에 생겨(등장)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씨앗(죽지 않는 생명체)이라는 매체에 의해 반복하며 유전적 종족이음을 시간 속에서 역사를 만들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를 혹 진화라 하고 혹 창조라며 논란이 일고 있긴 하지만 생명체 그 자체로 보면 기적이고 경이다. 


그리고 그 종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고, 같은 종(種)끼리 만 연속이음이 가능하고, 타종(他種)과는 불연속적 인연관계로만 얽혀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절대질서에 나는 감동하고 놀란다. 


이 자연절대질서를 주관하는 힘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서 인지는 내 좁은 소견으로는 짐작도 못하나 다만 머리 숙여 순종할 수밖에 없다. 해서 종교의 이유들이 이해된다.
종자라고 하는 작은 씨알 속의 유전인자가 갖고 있는 특성들(모양과 성질과 영원성)을 현대과학이 아무리 분석해 본들 내 웃을 때의 근육의 움직임과 슬플 때 나오는 눈물 한 방울의 의미를 알아낼 것 같지 않다.


그 좁쌀 같은 작은 씨알 속에 담겨 있는 모든 속성(사랑, 미움, 슬픔, 질투, 용서, 이해, 욕망, 절망) 등, 그리고 모양, 색깔, 냄새, 소리 등, 그 많은 유전적 내용물들을 내포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암(-), 수(+)가 짝을 만나 잉태라는 사건을 통해 새끼줄 꼬이듯 얽혀 이어나가는 연속적 생(生)의 과정이 우연의 속성(버릇)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치밀하고, 연속적 변이에 의한 도태의 과정을 거쳐 진화되는 버릇(성질)이라기에는 역시 너무도 신비하다. 


이 신비함을 종교라는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신의 개입이 상상 되는데, 그래서 나는 모든 생물은 진화 되게끔 창조된 것이 아닌가 상상하고 있다. 


수 억만년 동안 환경에 적응, 더 나은 삶의 조건에의 도전에 의한 변이와 도태를 거치며 오늘에 왔다면 분명 태초와 지금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졌을 터이니 말이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성경과 그 영감성, 그리고 무오성이라는 절대성에 진화론은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은 머리(과학)가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론과 진화론은 철길같이 끝없이 론(論)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는가 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창조론과 진화론에서 손잡을 수 있는 한가지 사건(조건)이 내 머리를 스친다. 그것은 미학(美學)이라는 정서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스스로 창조하시면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독백이다,


 더 편리하고 더 보기 좋은 방향으로 변화된다는 진화론 자의 말대로라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비교상대어와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절대자 자신의 창조에 굳이 “보기에 좋다”라는 비교상대어를 사용하셨을까? 절대자 스스로의 작품에 좋다 나쁘다라는 비교상대어가 되려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렇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바가지 하나를 만들어도 예쁘게 만들고 싶어하는 농부의 마음에서 일곱 색 곡선으로 수놓아 하늘에 예쁘게 걸게 한 절대자의 속 마음을 나는 훔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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