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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름(眞)과 사랑(愛)

 

바름은 모순과 의심과 오류라는 부정의 벽과 다름과 이의(異意)라는 반대의 벽을 거쳐 스스로 밝혀지는 과정의 미학이고, 사랑은 만물이 영원한 날까지 함께 어울러 살아갈 힘이다. 


해서 그 부정적 그물 망들은 적(악)이 아니라 되려 진리의 길에서 만나 함께 동행하는 비교의 벗이랄 수 있고, 그름에 의해 옳음이 들어나고 모순에 의해 바름이 가늠되는 절대이치가 왜 겉돌아야 하는지 안타깝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경험에서 탄생되고, 행복은 불행의 요소에 의해 드러나고, 아름다움은 추함에 의해 빛이 발하는 동반자적 동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 


음(陰) 없이 양(陽)이 없고, 꼴찌 없이 일등이 없는 앞뒤 양명성은 진리를 밝혀내는 상대거울이고 저울이다. 


굶어봐야 음식의 귀함을, 아파 봐야 건강의 고마움을, 늙어봐야 젊음의 싱그러움을, 큼은 작음에 의해 드러나듯 삶의 절대가치는 죽음에 의해 들어난다. 즉 탄생(삶)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내 의지 밖에 있다.


부처님은 보리수 밑 수행을 통해서, 예수님은40일 광야의 고행을 통해서 절대경지를 얻었다 함은 바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공짜가 아니란 뜻이다.


이 경지가 되면 적과 미움과 반대와 오류와 모순이 통일적 한 묶음으로 여겨질 듯 한데, 그게 엿장수 맘대로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살맛일 것 같으니 희한하다.


내 눈과 마음과 기분은 절대중립이 불가능한 내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기 때문으로도 더욱 그러하다.


절대 성자들의 절대 옳음의 말씀들이 세상 속에 들어오면 각 개인들의 속성에 의해 파벌화 되어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모순에서 인간지성의 한계가 드러난다. 


적어도 성자들의 말씀은 하늘 닮은 말씀들일 것 같은데도 그러하니, 어쩌면 그 말씀들이 진리(옳음) 그 자체가 아니던지. 


인간들이 언제쯤이면 이 지구 상에서 종교 전쟁이라는 모순의 수렁에서 깨어나 평화스럽게 살 수 있을까? 종교전쟁이라니? 말도 안 된다. 참으로 안타 갚다. 종교는 곧 사랑인데 말이다.


보라! 저쪽을, 이 순간에도 종교라는 이름에 의해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신)를 위한 살상과 순교로 지구촌이 피로 물들고 있는 모순을. 


하긴 구약성경 자체도 사람 살리는 사랑이야기보다 사람 죽이는 전쟁이야기가 더 많으니 헷갈려도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다. 


어떤 종교든 종교는 사랑이 주제다. 첫째도 둘째도 사랑이다. 아니 사랑이어야 한다. 해서 종교와 전쟁은 최악의 궁합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만을 말해야 한다. 사랑만을 실천해야 한다.


창 들고 방패 들고 싸우자는 노랫말은 그래서 적어도 종교적이기에는 모순이다.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 하신 말씀을 상기해서도 그러하다.


충분히 피하실 수도 있으신 능력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을 감당하신 그 깊은 뜻을 나는 헤아릴 길 아득하나 스스로 감당하신 그 크신 고통의 의미가 어렴풋이 보인다.


사랑이다. 아니 사랑 만일까? 사랑을 넘어 용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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