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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의 미학(6)-취미와 과정

 

(지난 호에 이어)
운동은 취미로 할 일이다. 골프가 우리들의 주된 운동으로 자리 매김을 한 것은 그것이 재미가 있어서이지 건강을 위해서 입네, 사교를 합네, 는 핑계다.
건강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이기겠다는 목적으로 하는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고행이다. 거기에 돈이 걸리면 더욱 그러하다. 건강은커녕 스트레스만 더 받는다. 프로들의 운동, 그것은 운동이 아니라 직업이다. 취미라는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돈 버는 재미로 한다.


그래서 취미와 직업이 일치되는 사람은 행복하다. 자기 적성에 맞고, 취미에도 맞는 직업, 얼마나 이상적인가. 프로 선수들은 취미, 돈, 인기라는 삼위가 일치된 너무도 멋진 직업이라 ‘하늘에 별 따기’다. 그래서 스타라 한다. 


이기기만을 위해 골백번 반복하는 운동, 올림픽 선수들이 그들이다.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죽으라고 같은 동작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운동, 그것은 운동이라기보다 훈련이다.


“인형이 망가져 속이 상해요.”


몬트리올 올림픽(1976) 체조에서 사상 처음 만점을 따낸 루마니아의 14살 어린 코마네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조국 비행장에 내리자 몰려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첫마디다.


금메달보다 인형이 더 좋은 이 아이는 또래처럼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지도 못하고 3살 때부터 똑 같은 동작을 수천, 수만 번을 자고 일어나 또 하고 자고 일어나 또 해서 컴퓨터가 조작하는 로봇보다 더 정확한 동작으로 만점을 따낸 것이다.


이 어찌 아마추어정신 운동시합 이랄 수 있는가? 이겼을 때 받는 열광, 졌을 때 받는 냉담함,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벅찬 무리다. 그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14살 아이에게는 금메달보다 인형이 걸맞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고, 그렇게 자라게 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좋은 사회일 것이다. 아이가 총을 들고 있는 사회, 아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회, 아이가 성(Sex)을 알아버린 사회, 아이가 폭력에 재미를 붙인 사회, 아이가 인기를 알아버린 사회, 아이가 경쟁에 민감해진 사회, 아이가 노동을 하고 돈맛을 알아버리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는 결코 밝은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그때 밴 존슨(88 서울올림픽 100m 금메달 선수)은 어른인데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약물이라는 비상수단을 썼겠는가?


오래된 이야기다. 북한 사격 선수가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땄을 때 소감을 묻는 한 서방기자의 질문에 답하길 “적의 심장을 향에 정조준 하는 기분으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했을 때 나는 섬뜩했다.


올림픽 선수로 참가한 것을 고지를 점령하는 전사로 착각, 운동을 전투하듯 했다는 뜻인데, 농사일도, 공장 일도 전투적 구호를 앞세워 하는 그들이고 보면 착각은 당연할 것이다.


목표 지상주의자들은 목표만이 선이 된다. 수단이 악이 되든 선이 되든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목표주의자가 선을 행하기 힘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목적설정 그것은 곧 무리를 만들기 쉬운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과정을 인생철학 중심으로 여기는 사람은 목표에 도달하기가 답답하리만큼 느리게 보이지만 이런 사람들에 의해 사회는 좋게 되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어느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연주를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팝송을 볼륨 끝까지 올려놓고 듣는다고 한다. 완벽한 연주를 위해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서란다. 


예술과 운동은 원래는 일상의 긴장(스트레스)을 풀기 위한 취미 놀이 활동인데, 그만 그것이 상업성과 경쟁적 욕심과 결탁되자 타락해 버린 것이다. 
내가 골프를 즐기지 못하는 큰 이유는 룰이 많고 복잡하여 놀이의 기본 조건인 편한 마음으로 칠 수 없게 만들어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온다는데 있다. 


나의 글쓰기 출발은 문인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쓰고 싶어 썼고, 쓰다 보니 글이 되었고,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었다 했을 때 행복해 했었다. 과정의 즐거움이었다. 시험이 목적이 아닌 과정의 즐거움인 독서처럼 말이다. 


건강이라는 목적으로 걸으면 십리길이 지루하지만, 연인과 함께 걸으면 백리길이 십리길로 짧아지는 즐거움이 된다.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썩어 거름이 되고, 그 거름으로 또 싹을 틔우는 과정의 반복이 자연의 섭리다.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니 열매를 맺는 것이다. 봄을 위해 겨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울이 가니 봄이 왔을 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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