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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봉 칼럼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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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31)-반공포로 석방

 

 

 

 1951년 6월 18일, 반공포로석방은 미국측과 상의 없이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한 역사적인 사항이었다. 미국측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지만 휴전협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과 맞물려 있는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굳건한 뚝심과 탁월한 외교력의 발로라고 평가된다. 여기에 동아일보 2015년10월10일자 기사를 소개한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막으면 행동 나설것” 
 美에 초강수, 美 합참 기밀문서로 본 당시 상황

 

 

1953년 6월 1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반공포로가 전격적으로 석방되었다. 미국은 반공포로의 강제 송환을 요구하던 북한을 의식해 휴전협상 결렬을 막으려고 반공포로 석방에 반대했다. 


1953년 6월 18일 오전 2시 10분. 논산, 마산, 부산, 거제도 등 한국의 4개 포로수용소에 있던 2만7388명의 반공포로(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공산군 포로)가 전격 석방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알리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단행한 결단이었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결코 휴전할 수 없다고 버티던 이 대통령이 취한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었다. 결과적으로 휴전회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한국 정부의 입지를 반전시키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동아일보가 단독 입수해 최초로 공개하는 미 합동참모본부의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일방적인 포로 석방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미국의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필요하면 전시작전통제권을 다시 한국으로 가져오겠다”며 당당하게 따졌다.


 휴전회담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미국은 결국 이 대통령의 뜻을 받아들였고 세계에서 가장 공고한 군사동맹으로 평가 받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태동하는 초석이 됐다.


1953년 5월 27일 한국 정부는 더 이상 휴전협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미국에 통보한다. 이틀 전 유엔군사령부가 한국에 있는 포로들을 즉각 석방하지 않겠다고 북한 측에 양보한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휴전협상 시작 당시 미국 중국 북한 대표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던 한국은 결국 포로협상 진행 과정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면서 협상장을 뛰쳐 나온 셈이다. 


한국 정부가 문제 삼은 대목은 포로 중에 한국 출신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점. 1951년 12월 당시 유엔군이 억류하고 있던 포로 중에는 북한군이 남침해 내려오면서 강제로 끌고 간 한국 국민이3만 5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피해가 주는 교훈 

 


 3년여의 포화는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 폭탄은 세계 제1차 대전 때의 전체 소모량과 비슷하다고 한다. 10만 명의 미망인과, 2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약 45%의 공업시설이 파괴되었고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하였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북한인구의 11.1%에 해당하는 113만 명이 사망하였고, 남북한 양측을 합하면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미군은 5만4천명이 사망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운명이 어떠한 존재이었는가를 한 번쯤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1)전 후의 많은 문제점들이 우리 민족의 미래사를 가늠하여 준다는 것. (2)1949년 미군이 철수함으로 남한이 국방력 공백상태가 되었을 때 6.25전쟁이라는 사상 최대의 비극이 초래되었다는 것.
 (3)한반도는 세계의 이념대립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3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것. (4)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에 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 
 (5)중공군의 투입으로 거의 다 이루어진 우리 한반도의 통일이 깨어져버렸다는 것. (6)바야흐로 북한을 속국화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이 앞으로 통일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문제점. (7)오늘날 북핵 문제는 어떻게 풀려야 할 것인가? 하는 등등… 지금도 많은 사안들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혼미 속으로 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남한 국민들에게는 이제 설마 설마 하는 의구심도 공포도 다 귀찮아졌다. 전쟁불감증에 취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을 생각하는 자체가 골치 아픈 일이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남한의 국민들. 오늘이 즐거우면 그만이지 내일의 전쟁의혹을 왜 걱정해야 하는가? 식량도 무기도 시원치 않은 북한이 무슨 능력으로 남한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설마 그것을 같은 민족에게 사용할 것인가? 세계 경제 10위권의 대한민국인데 뭘 그리 걱정을 한단 말인가? 


과연 남한의 정부나 국민들이 이렇게 방관을 하고 북한을 무시해도 괜찮은 것인가? 모두가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점들이다. 500년 뼛속에 도사리고 있던 “설마, 설마의 역사의식”이 또 다시 우리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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