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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18)

 

(지난 호에 이어)

 명태 간은 졸여서 기름을 내어 그것으로 튀김을 해 먹거나 비누를 집에서 만들어 사용했고(양재물만 있으면 됨), 명태 고지는 무를 넣고 국 끓여 먹거나 말려서 봄에 간유에 튀겨 먹기도 했다. 간유의 특유 냄새 때문에 튀김 말고는 딱히 음식에는 사용할 수 없는데 내 친구 한 명은 눈에 좋다며 그 비린내 나는 간유를 숟가락으로 퍼먹고 살았다. 그것이 너무 징그러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간유가 (내가 지금 사 먹는 오메가3, 혹은 피쉬 오일) 심혈관 질환을 예방하는 데 좋다는 걸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영하 10도가 넘는 추운 겨울에 밖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신선한 명태 더미 앞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명태 배를 따고 갈라낸 내장은 겨울내내 부식물이고 유일한 수입원이었고 비싼 일본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물물화폐였다. 밸을 따갠 명태는 덕장에 널어 말린다. 기관들에서 그 많은 명태를 처리하는데 한계가 있어 집집마다 10:1의 비율로 임대를 내준다.

 집에 덕장을 매고 말려서 10%는 본인이 가지고, 90%를 갖다 바치는 식이었다. 우리집도 해마다 명태 한 톤씩 임대해서 걸기도 했다. 능력에 따라 10톤씩 거는 집도 있다. 집집마다 명태 덕장이 걸려 있어 그 시절에는 훔쳐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 시절이야말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명태가 거의 말라갈 무렵 3~4월에는 우리는 가끔씩 마른 명태 한 드럼을 집 안에 들여와 온 식구가 둘러앉아 명태파티를 한다. 살짝 덜 마른 것은 불에 살짝 구워 먹으면 정말 별맛이다.

 명태가 완전히 건조되는 3~4월부터는 건태를 손질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마른 명태들을 집안에 들여와 한 마리씩 두드려 배를 갈라 뼈를 빼고 납작하게 만들어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다가 다시 무거운 돌이나 쇠덩이로 눌려서 압착을 한다. 이 과정을 명태 탈피라고 부르는데 정말 그 며칠 동안은 온식구가 달라붙어 명태탈피에 매달린다.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명태냄새가 진동을 해도 느끼지도 못할 정도였고 탈피하면서 실수한 것들은 상품가치가 떨어져 바로 뜯어먹기도 했다.

 탈피하고 나온 명태 대가리와 뼈들은 모았다가 계란이나 식량으로 바꿀 수 있었으니 정말 명태는 뼈부터 창자까지 버릴 것 하나 없는 효자 생선이었다. 그렇게 손질이 끝나면 중국 국경 지대에 가져가서 팔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보관을 잘해두었다가 여름이 되면 가격은 두 배로 뛰어올랐다. 바닷가 사람들에게 12월부터 이듬해 4월 까지는 농사철과 다름없는 중요한 계절이었고 이때 마련한 수입으로 아들딸 시집 장가보낼 준비, 결혼식, 환갑잔치 준비, 대학생 자녀들 뒷바라지 할 수 있는 자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입원이다.

 명란뿐 아니라 도루묵어(도루메기라고 부름)도 꽤 비쌌는데 다만 잡히는 양이 많지가 않다. 도루묵어를 은어라고도 불렀다. 은처럼 귀하다고 은어라고 한다. 도루묵어는 10월말부터 11월 말 정도까지만 잡힌다. 알도루묵어는 외화벌이사업소에서 명란처럼 물건을 교환해준다. 어느해 나는 알도루묵어 10여킬로그램 가져다 바치고 체리 색깔의 왈렌끼(부츠)와 겨울 쟈켓, 그리고 겨울용 무릎양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겨울에 난방도 안 되는 추운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치느라 고생한다고 엄마에게 무릎양말과 부츠를 드렸다.

 그 당시 부츠는 오직 쏘련 영화에서만 많이 봤을 뿐 실제로 본 적은 없었는데 엄마가 부츠를 신고 나가면 사람들 모두 부러워서 쳐다보군 하였다. 우리는 엄마와 딸 셋이서 번갈아 신었다. 그처럼 아끼던 부츠는 이듬해 봄에 누가 훔쳐갔다. 우리는 옆집을 의심하였다. 옆집은 아들만 셋에 딸이 하나였는데, 그 집 아들들이 도적질을 전문으로 하면서 사는 집이었다. 우리가 키우던 돼지, 닭, 김장김치, 명태, 눈에 뵈는 족족 훔쳐갔다.

 물건을 잃어버릴 때마다 엄마는 너무 화가 나 “손모가지나 콱 끊어져라, 남의 물건 훔치지 못하게!” 이렇게 혼자 말로 욕을 하곤 했는데 나중에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옆집 외동딸이 정말로 손목이 잘렸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톱에 손이 잘려 나갔다고 한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다 서늘했다. 결국 우리는 옆집 사이에 벽을 막고 대문을 따로 내었다.

 

2. 먹을 “알”이 있는 직장으로

 교원양성소를 졸업한 나는 유치원교사 자격증은 받았지만 역시 교사라는 직업이 싫었다. 1990년대 초부터 북한의 경제와 인민들의 생활은 급격하게 궁핍해져갔다. 배급이 몇 달씩 밀리다가 끊겨버렸다. 사람들은 부족한 식량과 생필품, 자금을 직장 생산물을 절취하여 팔아서 해결하였다. 그래서 어로공이나 먹을 알있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생활이 괜찮았다. 그때는 우리 식구들 대부분이 군부대 산하 00수산사업소로 직장을 옮겼다.

 군부대 산하 기업소는 배급도 잘 내주는 편이었다. 그만큼 입직하기 어려웠다. 마침 그 기업소 안에 4개 대대 병력의 규모를 가진 교도대(민방위대)가 있었고 같은 회사 건물 안에 있었다. 정문 보초병은 여자들이었고 때마침 자리 하나가 비어서 내가 적임자로 뽑혔다. 보초병 3년 경력으로 인해 나는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은 원래 근무하던 곳보다 많은 무기가 보관되어 있어 실수가 용납이 되지 않는다. 또 같은 공장에 식구들이 함께 일하는 터라 함부로 행동과 몸가짐이 조심스러웠다.

 겨우 1년이나 채웠을까 할 무렵에 또다시 보초병 전원을 현역 남자 군인들로 교체하면서 나는 물고기 냉동직장으로 배치되었다.냉동직장은 그 회사에서 가장 먹을 알 있는 직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인재들도 참 많았다. 그 직장에서 나를 받아준 이유는 손풍금을 잘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정일 김일성 생일 기념 공연 때마다 직장별 경쟁이 치열한데 그 직장은 해마다 경연에서 1등을 한다. 그런데 손풍금수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어 후보자를 고르는 중이었다. 마침 내가 아코디언을 좀 다룰줄 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배치된 것이다.

 기업소는 3천여명의 노동자들과 10여개가 넘는 직장, 대소형 어선들을 거느린 3개 선단이 있는 대기업이었다. 공장 끝에서 끝까지 걸으면 30분 이상 걸린다. 냉동공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겨울에도 차가운 냉동실에서 물고기를 냉동을 하고 50킬로그램이 넘는 냉동 브로크를 들어서 옮겨야 했다. 고되고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지만 남들보다 물고기를 만지고 생활에 보탬이 되면서 그 직장에 들어간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내가 직장에서 받는 월급은 한 달에 42원이었는데 쌀 1.5킬로그램을 살 수 있었다. 그것마저 제때에 지급되지 않고 몇 달씩 밀렸으며, 옷가지를 사려면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만 가능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신을 신발이 없어 엄마가 신다가 해지고 낡아서 버린 5cm 정도의 낮은 하이힐을 뒤축을 절반 잘라서 신고 다녔는데 발 앞 볼이 너무 좁고 내 발에 맞지 않아 양쪽 새끼발가락이 까맣게 죽어버렸고 물집이 생겼다. 그걸 신고 학교에 갔다 오고 나면 물집이 터져 벗겨지고 너무 아파 울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그 꽛꽛한 힐을 신고 학교에 가야 했는데 발가락 통증때문에 발 뒤축 절반은 신발속으로 다 넣지도 못하고 뒤축을 꺽어 신고 끌고 다니다 싶이 해야 했다.

 우리집은 발에 신을 신발마저 살 형편이 안 되고 또 살곳이 없어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를수도 없었다. 그 신발로 몇달을 그렇게 고생하다가 끝내 집어 던지고 언니들 신발을 물려 신었다. 학급 애들은 내 신발을 보고 놀려 대기도 했는데 그거라도 발에 걸칠 수 있으니 다행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물고기를 재량껏 집에 가져가 식구들도 먹고, 시장에 내다 팔아 부족한 식량을 사거나 신발이나 옷을 사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시기는 집짓기, 돌채취, 온갖 잡일에 동원되었다.

 노동자 주택은 기업소가 자체로 해결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짓고 지어도 주택은 부족했다. 남자들은 거의 다 군대 제대한 사람들이라 못하는 일이 없었다. 북한의 군인들은 훈련도 하지만 건설작업에 많이 동원된다. 그래서 군대 갔다 오면 미장이나 축조, 용가래를 올리고 지붕을 쌓을 줄 안다. 특히 우리 반장은 용가래와 지붕 쌓기, 미장, 축조, 등 건축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반장은 군대에서 매일 건설만 하다가 왔는지 건축에는 막히는 일이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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