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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뽑힌 나무(14)

 

 (지난 호에 이어)

“내가 그 아픔을 나눠 가질 수만 있었다면…. 내 동생아!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힘들었니? 왜 하나님은 착한 내 동생에게 그런 잔혹한 벌을 내려셨는지 정말 너무 합니다. 친구들하고 싸움 한번 해 본 적 없고 남을 욕 한번 해 본 적 없은 천사 같은 내 동생에게 어떻게 그런 잔혹한 병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내 동생아 부디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말 거라!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튼튼하고 건강한 멋진 꽃미남으로 태어나렴. 그땐 이생에 못다한 꿈도 다 이루고 살기를 바란다.

 언젠가 우리 다 같이 만날 때까지 아픈 고생, 배고픈 고생없이 그곳에서 편히 지내길 바랄게! 내가 누나가 되어서 네가 힘들고 아플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이 죄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하는지 천상에서 만나면 그 벌을 다 받을게. 사랑한다 내 동생! 집을 떠나 오기 전까지 사랑한단 말도 못하고 헤어진 나를 용서 해다오! 그리고 용서하지 말아 다오. 너를 차디찬 땅속에 묻어두고 지금 혼자 잘살고 있는 이 못난 누나를!”

 나는 그렇게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동생의 영혼을 향해 속삭였다.

4. 하늘같은 나의 어머니

 엄마는 함경북도 회령의 한 시골에서 10형제의 막내로 태어나셨는데 그러다 보니 조카들과 나이가 비슷했다. 외할아버지는일찍 돌아가셨고 해방 전 땅을 조금 갖고 있어서 자작농으로 끼니를 굶지는 않고 살았다고 한다. 형제 4명은 어렸을 때 홍역으로 사망하고 6명만 남게 되었는데 형제애가 정말 끈끈했다.

 엄마 형제들은 하나같이 점잖은 양반이셨는데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었다. 외삼촌들은 모두 군의관, 학교 교장선생님, 등등 모두가 인텔리 들이셨는데 그중에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제일 머리가 좋았다. 엄마는 해방 전에 7살부터 일본학교에 다닐 때 성적이 뛰어나 학년 말마다 세라복이나 흰 고무신, 책가방 등등 선물을 많이 받아서 동네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엄마는 그 후 청진교원대학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대학 총장은 엄마라는 인재가 너무 아까워 평양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할 것을 추천했으며 추천서를 써서 평양에 올려보냈다. 일찍 대학을 졸업하고 19살에 첫 교단에 서게 된 엄마는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야간수업으로 7년만에 졸업했다. 어문학부 동창들 중 여자는 엄마와 다른 여자, 두 명뿐이었다. 엄마는 한문에도 능통하셨고 러시아어는 물론, 어렸을 때 배운 일본어까지 막힘이 없었다. 또한 고등학교 때 배웠던 화학이나 물리, 수학, 생물도 배운 것을 그대로 기억하고 계셔서 우리에게 숙제를 가르쳐주는 다과목 과외선생이었다.

 나는 30년이 지나도 한번 배운 것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엄마의 비상한 두뇌를 항상 부러워했다. 우리 형제들 중 남동생이 엄마 머리를 닮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병마와 싸우느라 공부를 더 할 수가 없었다. 앞부분에서 언급했지만 엄마는 실력에서 으뜸이었고, 도 교육부에서는 도 문학교원들의 본보기로 엄마의 문학 수업을 시범으로 내 세울 정도였다. 엄마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한번 배운 것을 그렇게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전국의 교원들은 2년에 한 번씩 국가 급수시험을 봐야 한다. 본인 전공 외에 다른 과학계통 시험도 필수로 봐야 하는데 수많은 선생들은 비전공 과목 시험을 치를 때마다 커닝을 한다고 한다. 그때마다 엄마는 선생들에게 한바탕 일침을 가한다. “대학 엊그제 졸업한 젊은 선생들이 벌써 커닝을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요. 그러고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겠어요?” 엄마는 쓴소리를 바로 하는 스타일이라 선생님들은 엄마를 두려워했다.

 엄마는 국문학을 가르치며 학교에 문학소조(글짓기동아리)를 운영했다. 할아버지 유물인 병풍을 비롯해 집안 물건가지 갖고 나가 문학소조 교실을 멋지게 꾸렸다. 그곳에서는 해방 전 작품들인 최서해의 “탈출기”, “소금” (훗날 신상옥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짐)등을 비롯하여 세계의 유명한 장편소설, 우화, 동화집들을 언제든지 빌려서 볼 수 있었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글도 쓸 수 있었다.

 북한의 책들은 거의 대부분 김일성, 김정일 찬양하는 선동선전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책에 대한 흥미를 잃었는데, 고등학교 4학년부터 갑자기 세계 대문호들의 책들을 읽게 되면서부터 책 읽기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알라딘의 마술 등잔”과 “신데렐라” 등 아랍 동화, 우화집들은 사춘기 시절에 밤새워가며 책 한 권을 다 읽을 정도로 깊은 흥미에 빠져들었다. 이때 읽었던 책들은 나에게 외국에 대한 환상을 많이 심어주었고 세계를 더 알고 싶은 큰 충동심을 불러 일으켰다.

 외국소설들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 인간의 감수성과 생활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 너무 좋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셰익스피어의 4대 작품인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베니스의 상인”, “막베스”, “리어왕” (모두 대학입학 시험문제에 나옴). 러시아의 대문호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1,2,3부), “안나 까레니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등, 그 밖에서 프랑스 소설 “레미제라블”, “장 발장”, 그 외에도 “돈키호테”, “빠리 노토르담 사원” “큐리부인” 등등 수없이 많았다. 그 책들은 나를 르네상스(북한에서는 르네상스가 이태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여 이태리문예부흥기’라고 한다) 세계로 데려가 그들의 문화와 사회에 대해 눈을 뜨게 했다.

 외국소설들은 페쇄된 북한에서 세계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되어주었다. 문학교원인 엄마는 학교 문학소조원들에게 글 주제를 주고 그 주제를 가지고 동시나 서정시, 논술, 기행, 등등 아무거나 작품을 지어 오라고 한다. 엄마는 들국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과제로 종종 내주기도 하였는데 엄마가 직접 지은 서정시 들국화는 전국문학작품 대회에 3등으로 입상하였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초가을부터 들국화가 정말 많이 피어나는데 그때마다 엄마 생각을 떠올랐다. 마르고 거칠은 땅에서 억세게 살아나 끝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들국화처럼 우리네 인생도 비록 고달프고 힘들지라도 삶의 의지를 절대 잃지 말고 꿈을 이루어 내라는 현실을 담은 주제였다.

 엄마는 사회적인 지위에서 훌륭한 교육자셨지만 가정적으로는 사실 불우한 여인이었다. 다감하고 정서적인 엄마와는 달리 무뚝뚝하고 손재주가 전혀 없는 아버지를 만나서 이사 다니는 곳마다 부엌게 불이 잘 들지 않고 연기 때문에 거의 한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지어야 했고 물독에 물이 차 있는 일이 드물 정도로 물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고친다고 손만 대면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남들이 다 설치하는 펌프도 없어 우리는 몇십 년을 물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길어 먹어야했다. 그래서 물독에 물을 채우는 것은 나와 둘째 언니의 몫이었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오면 우리는 우물가에 가서 두레박으로 바께쓰 2개를 가득 채운다. 바께쓰 한 개 용량은 10리터였다. 양쪽에 바께쓰를 들고 집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이고 멈춰서 쉬었다 가야 한다. 나중에는 20리터 물통을 머리에 이고 다녔다. 머리에 똬리를 놓고 물을 들어서 올려 놓고 일어서다가 출렁거리는 물이 쏟아져 옷을 흠뻑 적셔 놓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가뿐히 수지통을 머리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물을 길어오는 일이 너무 힘들어 나는 나중에 결혼을 하면 물이 콸콸 나오는 집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기도 했다. 만약 우리가 10대부터 무거운 물 바께쓰를 들고 다니거나 20킬로그램 가까이 되는 물을 머리에 이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는 키가 지금보다는 더 컸을 것이다. 동네 우물은 폐쇄되고 펌프를 설치하는 집이 늘어났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의 물 긷는 모습을 강 건너 불보듯 하신다. 펌프 있는 집 문을 두드려 사정하면서 수십 년을 물 길어 먹었다. 내가 집을 떠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홀로 남은 남동생이 펌프를 설치했다고 한다. 큰 소가 나가면 작은 소가 일한다더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누나들도 다 떠나고 집에 물 길어 올 사람이 없으니 동생이 펌프를 설치할 생각을 한 것이다.

 물론 대다수 북한 주민들이 우리처럼 물을 길어 먹고 살았지만 아버지가 가장역할에 충실한 집들은 물 긷는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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