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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 자서전) 뿌리 뽑힌 나무(2)

 

(지난 호에 이어)

 

그러다가 빨간색 겨울 자켓을 발견하였다. 큰 언니부터 물려 입던 여자 옷이었는데 내가 작아서 내 남동생이 물려 입게 된 것이다. 점심시간에 나는 빨간 겨울 자켓을 동생에게 입히고 아래는 벌거벗은 채로 동생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그날은 어쩐 일로 문이 밖으로 잠겨 있지 않아 우리는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걸어서 20분 정도에 있는 학교에 다다르니 마침 점심시간 중간 체조 시간이었다. 온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노래에 맞춰 인민보건체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동생 손을 꼭 잡고 줄지어 있는 학생들 사이로 걸어가다가 앞에서 체조를 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기뻐서 소리쳤다. “엄마. 나 의덕이 데려왔어”

 나는 엄마가 길을 잃지 않고 용케 잘 찾아왔다고 칭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보고 엄마는 너무 당황하여 얼른 우리들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여름에 겨울 옷을 입고 엉덩잇살을 다 드러내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3살짜리 남동생을 보며 학생들과 교원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그때부터 내 동생을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북한에서는 해마다 모내기철인 5월과 가을철 10월에는 전국의 학생들이 농촌 지원을 나간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서 합숙을 하며 바쁜 농번기 일을 돕는다. 엄마도 맡은 학급 학생들을 데리고 한 달간 농촌 현지에서 합숙을 해야 했는데 동생만 데리고 가고 나는 동네의 제일 무서운 할머니에게 맡기곤 하였다. 그 무서운 할머니는 일제시기에 신통방통 소문난 무당이었는데 일본인들도 점 보러 찾아올 정도로 점을 잘 봤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일성이 정치를 하면서부터 종교와 미신을 타파한다고 하면서 모조리 청산하여 함부로 점이나 무당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식도 남편도 없이 홀로 살아온 그 할머니는 생김새가 너무 험악하고 무서워 공포와 두려움의 대명사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무당할멈한테 데려간다고만 하면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그때 엄마는 내 간식용으로 앙꼬빵을 할머니에게 맡겨 두었는데 할머니는 숨겼다가 매일 1개씩만 꺼내 주었다. 너무 맛있어서 더 먹고 싶었지만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먹어야 한다며 더 주지 않았다.

 나는 몰래 그 할머니가 어디에 숨겼는지 지켜보다가 혼자 꺼내 먹었는데 그만 들키고 말았다. 할멈이 나를 혼냈지만 나는 무서워도 하지 않고 엄마가 날 먹으라고 준 건데 왜 욕을 하냐고 대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때 그 할멈은 나에 대해 어떤 예언을 해주었는데 엄마는 미신을 믿으면 반혁명분자로 몰아가던 시기라 귀담아듣지 않아 훗날 몹시 후회를 하셨다.

 

2. 1976판문점 도끼 사건과 우리 가족의 운명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에서 북한군이 미군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유엔군이 초소 근처에 있던 미루나무의 가지치기 작업을 하면서 북한군은 작업중지를 요구했고, 유엔군은 받아들이지 않자 북한군이 도끼를 휘두르며 유엔군을 공격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북간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북한은 만일에 일어날 전쟁에 대처하여 주민정리에 착수했다. 무엇보다 북한 수뇌부가 자리 잡고 있는 평양시에서 성분 불량자들을 축출하여 지방에 추방시키는 작업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체제 반대쪽에 설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 즉 6?25전쟁 시기 행방불명자, 월남자 가족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행방불명자들은 잠재적 월남자로 낙인찍혀 있다. 북한에서는 이들을 ‘출신성분이 나쁘다’, 혹은 ‘토대가 나쁜 집안’이라고 표현한다.

 북한은 1976~78년까지 몇 차례에 걸쳐 평양시에서부터 분계연선지역, 군수공장 일대에서 성분 불량자들과 그 가족들을 농촌 지역으로 추방하였다. 평양시에서만도 4만 가구, 인구수로 20만여 명이 축출되었다. 그 속에 우리 가족도 포함되었다. 둘째 삼촌이 1951년 흥남 철수작전 때 그곳에서 행방불명되었던 것이다.

 1976년 10월 우리 가족은 추방 가족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편성한 열차에 올랐다. 우리가 소개되어 간 곳은 함경남도 영흥군(현재 금야군) 00리 조선 시조왕 이성계의 고향과 솔밭을 사이에 둔 이웃 마을이었다. 우리는 관리위원회의 안내로 중년 부부와 시어머니가 사는 집의 사랑채에 임시로 짐을 풀게 되었다. 창호지를 바른 사각문양의 문, 온돌, 부뚜막, 조선시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집을 받을 때까지만 임시로 산다고 하는데 끝내 집을 배정받지 못해 우리는 그곳에서 5년을 살아야 했다.

 마을사람들은 평양에서 추방된 우리를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았으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아버지는 집에서 시오리 떨어진 읍내 쌀가공공장(양정사업소) 설계기사로 일하셨고 엄마는 졸지에 농민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주말에 한 번씩 집에 오곤 하였는데, 연기 나는 원인이 뭔지, 부뚜막 손질도 전혀 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책상물림이었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연기가 고스란히 아궁 밖으로 쓸어 나와 눈썹을 태울 때도 있었고 불이 잘 들지 않아 그곳에서 사는 내내 엄마는 밥 지을 때마다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야 했다. 추운 겨울에도 밥 짓는 동안은 연기 때문에 문을 모두 활짝 열어놓아야 했다. 게다가 방풍이 되지 않아 겨울이면 바람에 문풍지 우는 소리가 귀를 후볐고, 물독의 물은 얼음으로 변했다.

 작은 방 한 칸에 조그마한 부엌이 달린 사랑채는 사용한지 오래 되어 습하고 냄새가 많이 났다. 또 장마철이 되면 부엌 바닥에서 물이 차올라 바가지로 물을 퍼내기도 했다. 우리 식구 6명이 방 한 칸에 누우면 방안이 꽉 찼다. 원래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엄마는 적응을 빨리했을 뿐 아니라 열성분자로 모든 일에 앞장서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세포 비서로 선출되었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합숙 생활을 하셨고 주말에 한번씩 집에 오셨다. 평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혁명적 열정과 충성심은 여전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은 북한 사람이라면 응당 갖춰야 하는 사회적 미덕이었다.

 엄마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농작물에 농약을 뿌리는 일을 솔선수범하였다. 농약 뿌리는 일은 늘 엄마의 몫이었고, 농약 중독으로 엄마는 평생 두통에 시달리셨다. 협동농장에서는 가을에 계획량만큼 식량을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로 농민들에게 분배를 해주는데 그 식량으로 일 년 동안 먹기에는 빠듯했다. 그래서 항상 쌀을 절약해야 했다. 누룽지가 붙으면 그만큼 밥량이 적어지므로 어머니는 무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쌀을 안쳤다. 무밥이 먹기 싫어도 억지로 먹어야 했다. 간식이라고는 밥 외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배고팠고 어쩌다 배불리 먹는 날은 곧 명절날이었다. 부식물이라고는 채소가 전부였고, 물고기와 육류는 먹어볼 수 있는 날이 일 년에 기껏해야 서너 번에 불과했다. 기름 한 병이 생기면 약처럼 식장 안에 넣어두고 명절 음식에 한두 방울씩 아껴 넣어야 했다.

 북한은 개인 소유가 없으므로 쌀과 고기, 술, 신발, 작업복, 된장, 간장, 과일, 채소 등 일체 기초식품은 국가에서 공급한다. 술은 설날과 추석,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만 한 가정당 1병씩 줬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풍족하진 못해도 기초식품과 생활용품들은 국가가 골고루 공급해주었다.

 한번은 1979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기념일이었다. 그날은 공휴일이었는데 조합에서 명절용으로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가정당 1kg씩 나눠줬다. 일 년에 명절이나 되야 돼지고기 맛을 볼 수 있었는데 돈은 가을 분배 때 공제한다. 그리고 돼지고기 1kg 값은 정말 비쌌다. 당시 가격으로 10원이었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던 나는 어른들이 돼지고기를 줄에 꿰고 들고 가는 것을 보게 되었고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날아갈 듯이 집에 와 보니 썰렁한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돼지고기는 고사하고 그림자도 안보였다. 실망에 가득 찬 나는 혼자 생각했다. “엄마는 분명 일하느라 바쁘고 언니들은 집에 늦게 돌아올 테니 내가 고기를 타 와야지.” 나는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에 으쓱해서 관리 사무소까지 뛰어갔다. 벌써 모든 고기들은 다 가져가고 달랑 남은 두 몫은 살코기보다 비곗덩어리가 더 많았다.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흰 비계를 먹지를 않는데 7살이었던 나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거라도 타가야 명절 쇨 맛이 날 것 같아서 엄마 이름을 대고 고기를 받아왔다. 그 돼지고기가 나를 며칠 동안 구박에 몰아넣은 골칫덩어리가 될 줄이야. 그날 저녁 나는 엄마한테는 물론, 언니들한테서 별의별 구박을 다 받았다. 비곗덩어리를 비싼 돈을 주고 사 왔다고 말이다. 그리고 네가 사왔으니 버리지 말고 네가 다 먹어야 한다고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잘하려고 한 것이 오히려 식구들한테서 구박을 받게 되어 너무 억울했고 그 며칠 동안 흰 비곗덩어리를 혼자서 꾸역꾸역 다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느끼하다 못해 울컥 토해버릴 것 같았지만 못 먹겠다고 버티면 또 머리를 쥐어박으며 온갖 구박을 받을 생각에 끝내 다 먹어버렸다. 그 후부터는 돼지 비계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떠오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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