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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이비드의 여자로 남고 싶어요”

 
 
"나는 데이비드의 여자로 남고 싶어요. 그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했고, 나 다왔어요. 물론 톰을 보고서 그와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치 굶주렸을 때 가지는 욕구 같은 거였어요. 그뿐입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언제나 데이비드였습니다." 


심리상담가 지나(60)가 말했다. 지나에게 자기동일시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다른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데이비드와 함께 한 그 순간 속의 자아와 지금 혼자 있는 자아를 구분해서 표현한다. 


데카르트식으로 본다면 자기동일시는 타자가 보이지 않는 독방에서 발견된다. 발견된 자아는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동일하다. 지속성은 환경이 변화해도 그대로 변함이 없다. 개별성, 사적인 생활이 극도로 보장되고, 타인과 최소한의 교류로만 살 수 있고 사회가 단순하다면 이런 독방 속의 개인이라는 자아동일시는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런 사회 속에서 살지 않는다. 현대인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타자들과 이합집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라는 개인은 내가 누구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독방 속의 나, 회사에서 나, 친구 속에서 나, 가족 속에서 나가 서로 다르게 존재하기를 강요 받는다. 나는 개인으로 존재하면서도 전제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마치 손가락은 하나지만 몸의 한 부분인 것처럼, 내가 누구이고 싶은가는 누구와 어떤 관계 속에서 '지금'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우울한 여자가 있었다.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남자, 여자가 주변에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어떤 인간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를 너무 잘 알아주었고, 레고의 빠진 조각을 맞추듯이 그가 가진 것은 내가 결여한 것을 채워주었다. 여자는 그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 회사를 옮겼고, 이제 그와 공동의 일을 하고 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자기발견의 과정이었다. 


그녀는 변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를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착각에 빠진 것일까?


그녀는 그와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 중에 그는 바람도 피웠고 속도 썩였다. 하지만, 50을 넘기면서 병에 걸려서 일찍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우리는 이 사연을 들으면서 하나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몸은 하나지만, 마음은 새벽안개처럼 있는 듯하고 없어지고, 다시 돌아온다. 몸은 하나로 존재했지만, 자의식은 여러 개로 변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를 만나기 전에 자아, 같이 살 때의 자아, 사별 후의 자아가 다르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할 수 있으므로 과거의 자아는 자신이 기억하는 만큼만, 무의식이 기억하고 재생시키는 만큼만 영향을 미친다. 미래의 자아는 모른다. 기대하고 믿는 만큼만 미래의 자아를 그릴 수 있다. 


현대인은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하루를 두고 사회적 정신분열, 다중인격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내가 누구인가를 심각하게 알고 싶다면, 내 주변에 누가 있을 것인지, 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지를 결단해야 한다. 내가 누구이고 싶은가는 단지 화장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 장식들도 바꾸어야 한다. 


토니는 매우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인 사람이다. 입만 열면 남을 비난하고, 사회를 욕한다. 토니를 내 주변에 두면 마치 상한 생선을 화분에 뿌린 것처럼 집안에 비린내가 진동할 것이다. 


토니와 나는 사적인 관계이므로, 연락을 하지 않으면 안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강요된 관계도 있다. 영화 <실험 Experiment>를 보면 실험참가자를 죄수집단, 간수집단으로 나누어서 독립교도소에 격리시키고 3주 동안 심리실험을 하는 상황이 나온다. 참가자들은 간수와 죄수관계로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수당이 나오는 조건에 합의했다. 


실험 전에 친구였던 두 사람이 실험 후 죄수와 간수로 나뉘어서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나 이전에 죄수로서, 간수로서의 자아를 강요 받으면, 각자 그 역할에 맞는 행위를 하게 된다. 내가 누구인가의 문제는 나 하나만 산속에 들어가서 깨달을 문제가 아니다. 한적한 사회에서는 가능했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려면,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듣고, 좋은 것을 먹으면 된다. 내가 보고, 만나고, 듣고, 먹고,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그 순간의 내가 된다. 내가 누구인지를, 무얼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모른다면, 자문해야 한다. 나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는가? 내 인생의 등장인물을 바꿀 수 있고, 대사를 바꿀 수 있고, 무대를 바꿀 권한이 나에게 있는가?


자아를 찾기 위해서 외부와 교류를 차단하고 독방에 처박혀서 수학문제 풀듯이 매달려 보았자, 답은 없다. 공허함이 없어지지 않는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인 관계에서 자아가 거칠게 분리된 사람들이다. 내가 존재하려면 나만 살아있어서는 안되고 관계가 건강해야 한다. 내가 주위사람들과 관계를 건전하게 맺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분노가 일거나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내가 누구여야 한다는 것, 과거의 나에 얽매이는 것은 인간이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나'라는 하나의 관점만을 과장하고 있다. '타자'의 관점을 잘 읽지 못하고, 타자와 자신의 동적인 역학관계를 깨닫지 못해서 갈등이 지속된다. 


내가 존재한다는 말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다는 가정하에서 완결이 된다. 사회 속에서 존재하면서 극단적으로 개인 내면의 자아에만 집착하는 것이 우울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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