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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인연 속에서

 
 
평생 인생살이, 참으로 여러 가지의 많은 인연 가운데 삶을 영위하고 산다. 어깨를 부딪쳐도 인연이요, 눈길만 마주쳐도 인연이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고도 신비롭고 대단한 인연으로 엮여진 것, 우리의 인생살이들이다.


전혀 알지 못한 너와 나의 관계의 형성, 태곳적부터 이미 예비된 어떤 조물주의 배려였을까? 지긋이 눈을 감고 두 손 모아 소원하며 갈구했던 기도의 응답일까?


주관하여 간섭하고 다스리며 허락해주시는 어떤 신의 배려일까? 유일신인줄 믿고 성경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는 하나님의 각별한 배려일까?


지고지순하다는 부처님의 뜻일까? 알라신이나 모하멧의 역사일까? 아무도 정답을 제제시할 자 없다. 있다면, 믿음이라는 신앙의 바탕 위에 철저하고도 확실함이라 스스로의 고백 속에 각자의 신앙으로 정체성의 향방을 각인시켰을 뿐이다.


아빠 엄마가 만남으로 내가 이 세상을 보고 삶을 터득한 인연, 함께한 핏줄로 태어난 형제들, 학교에서 사회에서 온갖 여러 이웃들 친구들과의 이런저런 인연들, 그러다가 잊혀가고 헤어져야 했던 악연까지도 겪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잘잘못을 타박할 특별한 이유랄까? 뭐 그리 까다롭게 손가락질 할 일도 아니었건만, 보이지 않게 허락된 인연을 소홀히 해버리는 인간적 습성임을 부인할 사람 누가 있을까?


장작불이 타오르듯 유별나게 열정을 다해 좋아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땅콩 반쪽이라도 함께 나누어 먹을 정도로 애틋하고 정겹게 서로를 챙겨주던 친구도 있었다.


세월의 변화에 적응했던 우리네 삶 속에 인간생활의 여러가지 색깔들, 어찌 변화가 없을까만 단조롭기 그지없는 인간적 품성들의 조직적 뇌의 변화야말로 무엇이 통제를 유도하고 있을까?


어느 날 그 순간에 스스로의 옳고 그름의 판단에, 잘 나가는 그 관계에 찬물을 씌워버린 일들 주위에 많이도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 그런대로 지난 일들에 여유롭지 못했음을 스스로 가려낼 수도 있으련만, 그마저도 성찰하고 고백하며,


나를 한편으로 내려놓고 배려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꼬여가던 상황을 원상태로 복원할 수 있었을 것을, 이마저도 고약하게 얄미운 마귀라는 농간에 끼어든 얄밉게도 저주스런 영역에 속한 것일까?


신념이나 지식의 노하우로 수준에 버금가는 살신성인의 경지, 대체 어디까지가 자아성찰의 과정이며, 확고한 정서적 내면의 깊이라 말할 수 있을까?


미숙해서 성숙하지 못했고, 완벽할 수 없었기에 평생 완성을 향해 근접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언제나 함량미달이라는 인간적 속성을, 과연 우리는 평생을 끌어안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걸까?


70이 넘어서야 내가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알았다고 토로한 김수환 추기경의 고백이야말로 살아도 또 살아도 미완성의 삶에 허우적거려야 함이 정의임을 깨우쳐야 하겠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먼저 내려놓아야 할 위치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각성하고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 길만이 나의 소관이요, 나를 위한 성찰의 결과임을 정의할 때,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친구가 아니다. 인연에 충실치 못한 나의 빈자리를 채워 줄 사람은 이웃도 친구도 아닌 바로 나 스스로의 책임임과 동시에 의무였음을 깨달아야 할 상식이다.


누가 누굴 비난하며 잘못이라고 비아냥거리나 그건 아니다. 비평과 불만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을 것인가? 보이는 상대의 흠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깊이가 아직도 비워진 상태로 상대편의 의중을 포용할 그 자리를 먼저 채워야 할 빚진 자의 책무가 먼저일 것이다. 평생을 어느 누구와도 반목하고 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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