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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암아, 평암아

 


 평암(平岩)은 내가 대학에서 4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던 이계학(李啓鶴) 군의 호다. 아마 자기 스스로 붙인 호이지 싶다. 그는 1937년 1월 10일 경기도 평택 포승에서 태어나서 2005년 1월 29일에 유명을 달리 했으니 그가 이 세상에 머무른 햇수는 꼭 68년 19일이다.


 이 세상을 다녀감에 서럽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랴마는 평암은 매일 강의하랴 책 쓰랴 조용한 시간 한 번 가져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서럽다. 그는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지난 2004년 8월에 은퇴하여 이제 막 그 바쁜 일에서 손을 떼고 청춘부사직/백수와/강호(靑春扶社稷 白首臥江戶: 젊어서는 열심히 일하고, 늙어서는 시골 초막에 한가로이 드러눕다)의 한가로운 시간을 가져 보려던 참에 몹쓸 병마가 그를 뺏어갔다. 은퇴하고는 나와 어딜 놀러 가자는 얘기만 했지 서울 근처도 같이 못 가봤다. 이것도 후회된다.


 대학에 막 들어간 1958년 4월인가 5월이었다. 개구쟁이 친구 몇명이서 평택군 포승에 있는 그이 집에 가서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며 놀다온 적이 있다. 어허, 무정한 세월, 그게 바로 어제 같은 47년 전이네.


 평암은 대학교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같은 반 김정회(金姃會)라는 아리따운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온 학교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다. 누가 먼저 사랑에 빠졌는지는 지금까지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김정회를 따르면 평암이 먼저, 평암을 따르면 김정회가) 평암은 기어코 그녀를 붙잡아 가정을 이루고 그들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충범이고 딸은 낭(娘)이다.


 평암은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여자대학교에 있다가 판교에 있는 정신문화연구원(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소라 이름을 바꾸었다)으로 옮겨 거기서 그는 은퇴할 때까지 21년을 재직하였다. 


 나는 그의 주선으로 한국에 초청을 받은 적이 있고, 또 1997년에는 그의 도움으로 안식년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보냈다. 그때 혼자 기숙사에 있는 나를 대접한다고 세종대왕릉으로, 양평으로 데리고 다니며 안 가본데 없이 다 구경시켜 주었다.


 한 번은 심상석 군과 평암,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서 강원도 정선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가는 길 오는 길 운전은 평암이 했다. 주위 산들이 안개와 구름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었다 하는 것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아름다운 경치였다. 


 평암, 그는 저 어느 산허리에 머물던 아침 안개였던가,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어느 사이에 우리 곁을 훌쩍 떠나가고 말았다. 산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는 것(生也一片浮雲起, 死浮雲滅)이라더니 살고 죽는 것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이야!


 평암은 안팎으로 무척 온건, 조용한 사람이다. 좀처럼 흥분을 하지 않으니 나처럼 좋다고 길길이 뛰거나 화가 나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일도 없다. 그저 무덤덤하다. 그의 곁에 있으면 별 재미가 없어도 잔잔한 여운이 있어 좋다.


 그의 인품을 말해 주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다. 경북 안동에 있는 이육사 기념관에 육사의 대표시 [광야]를 내가 붓글씨로 써서 비석으로 만들었다. 남편이 쓴 육사의 시비를 아직 못 본 아내는 비석 보러 가자고 자동차도 없는 나에게 몇 번이나 제안하였다. 그래서 나는 평암한테 이육사 기념관, 도산서원으로 해서 하회마을로 한 바퀴 돌자고 했더니 그는 두말 없이 그러자고 승낙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그는 몹쓸 병을 얻어 경남 하동으로 요양을 간 것이다. 


 이것도 우리 부부가 평암을 문병하러 하동에 갔을 때 그의 제자 한 사람으로부터 우연히 우리가 평암과 함께 이육사 기념관에 가기로 했을 때 자기가 운전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 "선생님이 힘드시다고 안동 갈 때 저에게 운전을 부탁했는데 가기 전에 병이 나셨어요." 그러나 평암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렇듯 평암은 은은한 사람이다.


 이제 평암은 이 세상 인연을 끊고 저 세상으로 갔다. 오늘은 그의 생각이 간절하여 3연으로 된 시조 한 수를 적어 본다.  (2005, 02)

 

 

 

하동에서 손들어 작별하던 어제인데
갈 길이 바쁘기로서니 그렇게도 바쁘던가
세상 인연 끊고 간 그대 어찌 그리 매정한가

 

평암 이 사람아 강원도 길 생각나나?
저 산에 걸린 것이 안개인가 구름인가
그대만 그랬는가 나도 상기되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는 너무하다
한 조각 구름이라면 다시 올 수 있지 않나
오늘도 자네 생각이 좀처럼 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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