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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남의 기획 연재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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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러시아에 가다(24)

 

 

 

(지난 호에 이어)
그는 빼뽀네와 돈 까밀로가 차례로 시가를 권했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는 호주머니에서 신문지 조각과 마코르카를 꺼내어 교묘하게 잎담배를 말아 피웠다. 


그들은 밀 말리는 곳을 방문한 다음 비료와 살수기, 작은 농기구 등을 보관해 두는 창고를 방문했다. 모든 것이 일목요연했고 질서가 있었다. 창고 한 구석에 이상한 모양을 한 새 상표가 붙은 기계가 있어서 빼뽀네가 그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 기계인가 물었다.


“목화씨를 빼는 기계입니다.” 보도니가 대답했다. “목화솜을요?”


돈 까밀로가 소리쳤다.


“이런 기온 속에서 목화 재배가 된단 말인가요?”


“아닙니다.” 보도니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면 이 기계로 무얼 하는 건가요?”


“그 기계는 이리로 잘못 온 것입니다. 우린 밀 탈곡기를 주문했었거든요?”


빼뽀네는 돈 까밀로를 무섭게 흘겨 보았다. 돈 까밀로는 이렇게 좋은 말꼬리를 잡았는데 그것을 그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기계를 탈곡하는 데 쓸 생각이군요?” 돈 까밀로가 물었다. 


“아니오.”


안내자가 냉담하게 잘라 말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기계를 조립해 놓았지요.”


“그러면 저 기계를 씨 빼는 기계로 주문한 사람들은 어떻게 솜을 다루지요?”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이런 혼란이 허용되어선 안되지요.”


돈 까밀로도 보도니처럼 무뚝뚝하게 말했다.


“동무의 나라는 면적이 15만 평방 마일이지만 우리나라는 1,100만 평방 마일입니다.” 안내자가 대답했다.


이 말에 빼뽀네는 자기도 모르게 돈 까밀로의 발을 밟으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소비에트 시민 보도니, 동무는 이 작업에 개인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지요?”


그가 물었다. 


“아니오, 난 다만 제한된 책임만 가지고 있습니다.” 


“난 좀 더 큰 기계를 보고 싶은데요.” 빼뽀네가 말했다.


제일 큰 기계를 두는 창고는 겉보기엔 별로 볼 게 없었다. 그 창고는 물결 모양을 한 녹슨 양철 지붕을 얹은 큰 목조 창고였다. 그러나 내부는 아주 인상적인 데가 있었다. 밟아서 다져진 맨 흙 바닥은 아주 깨끗하고 기계도 잘 닦아놓아 박람회 전시장에 내놓은 것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시민 보도니는 그 기계들의 구매 날짜와 기름, 가솔린 등의 소비량과 마력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건물 맨 끝에는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업장이 있었다. 도구가 빠진 것 없이 다 있는데다 너무나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빼뽀네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트랙터 한 대가 수리 중이었고 모터의 각 부분이 작업대 위에 진열되어 있었다. 빼뽀네는 더 자세히 들여다 보려고 부품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누가 이걸 수리하고 있지요?” 그가 물었다.


“제가 하고 있습니다.” 보도니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 선반을 가지고 말이오?”


빼뽀네가 놀란 듯이 어딘가 선반 같은 것이 달린 도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니오, 이 막대기로 하지요.” 안내자가 대답했다.


굵은 노끈으로 비틀어 맨 연접봉이 벽에 박힌 큰 고리에 걸려 있었다. 보도니는 막대기 같은 나사 돌리 개로 그 연접봉을 두드려 보았다. 종소리 같은 게 울렸다.


“균형이 맞질 않았군.” 그가 말했다.


“나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지요. 숙련된 귀가 그것을 알아내니까요.”


빼뽀네는 모자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안다구요?”


그가 소리쳤다.


“그런 기구를 사용한 사람은 내가 알기엔 이 세상에 딱 한 사람 밖에 없소. 그리고 우리의 모국인 러시아 한복판에 또 한 사람이 있구요 !”


“그게 누군데?”


돈 까밀로가 물었다.


“토리첼라에 있는 어떤 기능공이오.” 빼뽀네가 말했다.


“완벽한 마법사, 그는 경주용 자동차를 조종하는 전문가였소.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평범해 보이는 친구였지. 하지만 경주자들은 유럽 전 지역에서 그에게 자기의 경주용차를 보냈습니다. 전쟁이 나고 2 년쯤 되었을 때, 그의 기계 공장은 스티븐 강의 다리를 폭파하려고 겨냥했던 폭탄에 맞았지요. 그 사람과 부인과 두 아이가 현장에서 죽었어요.”


“다행히도 그의 아들 중에 한 명은 군대에 가 있었습니다.” 보도니가 말했다. 다음 말을 덧붙일 때 그의 음성은 달라졌다. “저는 제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는 분을 알게 되어 행복합니다.”

 

그들은 말없이 그 건물을 떠났다. 밖에 나와보니 하늘은 금방 폭풍우라도 몰아칠 것처럼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


“저는 저편에 있는 저 집에 살고 있습니다.” 보도니가 말했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저쪽으로 가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다리실 동안 질문이 더 있으시면 제가 대답해 드릴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 집에 도착하자 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집은 간소하게 지었으나 아늑하고 따뜻했다. 부엌 천정에 매달린 대들보엔 검정 그을음이 덮여 있었다. 빼뽀네는 그들이 긴 식탁에 앉을 때까지도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자네 아버지의 공장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것이 1939년 이었네.” 그는 꿈속에서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내 중고차에 고장이 났었는데, 어디가 고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네.”


“연접봉 이었지요.” 보도니가 말했다.


“그걸 고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조수로 쓰셨지요. 그 후에 차가 잘 달리게 되었는지요?”


“그 차는 아직도 잘 달리고 있는데. 이마 위에 검은 머리칼이 흘러 내리던 그 어린 소년이.”


“열아홉 살이었으니까요.” 보도니가 말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너그럽게 생각하고 잊어버린 일들을 다시 끄집어 내서 무얼 하시겠습니까?” 


그는 다시금 차가운 음성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빼뽀네는 주정꾼이며 질서 파괴범으로 옥에 갇혔을 때 그 수염을 길렀다네.  물론 그의 진짜 죄목은 반파시스트를 선동한 것이었소. 결국 그것이 그에겐 잘된 일이 되었소. 전쟁이 끝난 다음 그는 정치범의 명분과 순교자의 지위를 얻었으니까 말일세. 그렇게 해서 이 사람은 우리 마을의 첫 번째 읍장이 되었고, 상원의원까지 된 것이라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그 당시에 아저씨는 턱수염이 없었지요.”


 “없었지.”


“그게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네!” 


돈 까밀로가 말했다.


보도니는 돈 까밀로를 바라보았다.


“낯선 얼굴이 아닌데요. 같은 고향 출신이신가요?”


“아닐세, 아니야”


빼뽀네가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이 분은 같은 고향에 살긴 하네만, 다른 지방 출신일세. 자네는 이 사람을 알 수가 없다네. 그런데 자낸 어떻게 해서 예까지 오게 되었나?”


보도니는 어깨를 풀썩 해 보였다.


 “여러분께서 콜호즈에 관해 좀 더 설명해 주기를 원하신다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만.”


그러나 돈 까밀로는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었다.


“여보게, 이 사람이 공산당 상원의원이라는 사실 때문에 방해가 되진 않도록 합시다. 우린 정치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젊은이는 인간 대 인간으로 우리와 이야기할 수 있어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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