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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경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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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으로 성경을 읽다-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9)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은 누구나 이(理)에 들어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물을 마시고 공기로 숨을 쉬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이(理)에 들어가 있음을 증명한다. 사람은 이(理)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理)로서 태어났고, 이(理) 안에서 살다가 또한 이(理)로 돌아간다. 


이입이란 이(理)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이(理) 안에 있고 이(理)로 숨을 쉬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理)가 물질의 본질인 동시에 사람의 본질이다. 이(理)는 창조주의 “말씀”이다. “말씀”에 의하지 않고 지은 바 된 것은 없다. 


이(理)에는 난다는 관념도 없고, 죽는다는 관념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理)로부터 와서 이(理)에 의지하여 살다가 이(理)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태어남과 죽음 역시 다르지 않다. 


이것을 알게 되면 태어남이 두려운 것이 아님과 같이 죽음 또한 두려움이 될 수 없다. 사람의 본질로서의 이(理)에는 산다고 하는 것이나 죽는다고 하는 것이 한 치의 다름도 없다. 이입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입이란 인간 자신의 본심에 따라 사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억지로 애씀이 없으므로 건강하고 즐겁게 오래 살게 한다. 사람들은 이제야 자연친화적 삶이 장수하는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이입이란 또한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와 지체 간의 관계에 있어서 처럼 이심전심이란 소통과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게 한다. 


또한 이입은 서로 한 몸을 이루는 부분과 부분의 관계로 “모든 것을 서로 알게 하는 일체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잘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입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된다. 


아담과 이브를 낙원으로부터 쫓겨나게 만든, 바로 그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에 의지하여 보면 모든 것은 인간이 임의로 붙인 명칭에 의하여 분리된다. 그러나 진리에서 보면 명칭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에 불과하다. 


이입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유대인도 없고 사마리아인도 없는, 오직 진리만이 남는다. 진리에 들어가면 자신을 “기독교인”이니 “기독교인이 아니니”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예수님이 착한 사마리아 인을 칭찬하신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이입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입은 지금-여기서 누구나 성취해야 할 화급한 과제다. 이입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고, 이웃과 하나가 되게 하는 방법이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달인이 되게 하는 방법이다.

 

22. 이입과 치유


사람의 몸은 이미 이(理)와 일치된 형태로 이(理)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있다. 그것이 누구나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자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몸이 따르게 되어 있는 자연 또는 우주의 법칙을 무시하고 자기 나름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몸은 피곤해서 쉬어야 하지만 마음은 욕심으로 몸의 요구를 거부하게 된다. 여기서 자기의 몸과 마음 간에 갈등이 생기고, 의욕저지가 생기고, 무력감이 생긴다. 


이입은 사대(四大),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구성된 사람의 몸이 본래부터 자연의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것을 자신의 마음이 방해하지 않도록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이 선(禪)의 목적이라 하고 그것을 “평상심의 도”라 한다. 반야심경에서, “물질이 곧 공이며, 공이 곧 물질이다. 인간의 마음, 수상행식(受像行識)도 이와 같다”고 설하는 것이 곧 사람의 육체와 마음이 동일한 법칙, 이(理)를 따르게 되어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 욕심, 즉 갈애(渴愛)가 몸과 마음이 동일하게 따라야 할 그 이(理)를 따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 결과를 우린 번뇌망상이라 하고 스트레스라 부른다. 


욕심이 늘어날수록, 분노가 강력해질수록, 무지가 두꺼울수록 마음이 육체가 가진 자연적 지혜를 더욱 방해하게 된다. 그것은 곧 “시장해도 헛된 생각으로 먹지 못하게 하고, 피곤해도 걱정근심으로 자지 못하게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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