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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경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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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39)-“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0)

 

 (지난 호에 이어)
 그것이 곧 금강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은, 보살은 자신이 보살이면서도 보살이라는 관념이 없고, 보살은 보시하면서도 보시한다는 관념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성도이면서도 성도란 관념이 없고,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면서도 희생한다는 관념이 없어야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무조건 사랑과 무조건 용서를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로서 그가 어떤 모양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얻게 될 것이다. 


선에서 열반적정이라 할 때, 적정(寂靜)이란 마치 거울이나 명경지수와 같이, 이웃이 기뻐서 춤을 추면 함께 춤을 추고, 이웃이 슬픔으로 애통해 하면 함께 애통해 할 수 있는 공감을 뜻한다.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되는 방법도 적정에 있고, 자신이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는 방법도 적정에 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 역시 그것을 의미할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라고 하는 아상(我相)이나 아만(我慢)이나 아집(我執)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성령이 본심으로 나타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다. 아담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다. 사람이 본심으로서의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본심이 욕심이나 분노나 어리석음으로 엉기거나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름 위에 빛나는 태양이 있는 것처럼 누구나 스스로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성령이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란 것을 성서는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도(道) 역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데 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무념으로, 무념의 지혜를 나타낸다. 그 지혜는 풍성한 포도 열매로 결실을 맺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 아낌없이 나누어 줄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이신 모든 행적과 기적이 한 몸에 속한 지체로서의 기능과 책임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제3장: 견성(見性), 본심의 회복

 


20. 탈학습, 습(習)의 결과인 마음의 문제 


‘거듭 남’이란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 행동 경험의 쌓임, 즉 학습된 행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탈학습을 의미한다. 마약에 중독되었던 사람은 마약으로부터 풀려나고 놀음에 중독되었던 사람은 놀음으로부터 풀려나고 해상화재와 같은 외상적 스트레스를 당했던 사람은 그 끔찍했던 악몽의 흔적으로부터 풀려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아담과 이브의 경우에는 뱀을 만나 유혹에 빠지게 되고,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알게 되었고 또한 에덴으로부터 쫓겨나 고통을 당하게 된, 일련의 이전 행동 경험의 흔적들이 쌓여 형성된 마음과 행동, 즉 후회라든가, 불안감이라든가, 죄악감이라든가, 분노라든가, 원망스러움이라든가 또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라는 걱정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학습된 것으로서 마치 “김치!”라는 말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이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감각기관들을 통하여 들어오는 자극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모두 이전 경험으로 오염되어 있어서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보거나 판단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의 경우라면 그들의 눈이나 마음은 온통 선악이라는 관념으로 채색되어 있어서 선이나 악이라는 관념 없이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나쁜 버릇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 지금 우리의 눈이 모두 그렇게 빨강이나 파랑으로 채색되어 있다. 


탈학습의 방법은 무엇인가? ‘거듭 남’의 방법은 무엇인가? 간음한 죄로 끌려 나온 여인을 끌고 나와 돌로 쳐 죽이려는 군중과 예수님의 행동 차이에서 죄로부터 거듭나게 하는 참다운 방법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돌로 여인을 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 중, 죄가 없는 사람은 돌로 쳐라”는 글을 땅에 쓰심으로 그 여인을 구하시면서 예수님 자신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행동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조건부 사랑도 아니고, 조건부 용서도 아니다. 공감이다. 예수님은 땅에 글을 씀으로써 돌을 들어 여인을 죽이려는 군중이나 여인에게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를 주신 것이다. 그들의 본심을 자극한 것이다. 예수님의 모습은 정(고요함)과 혜(지혜)로 대표된다. 
정혜는 심리학적 치료에서도 학습된 부적응 감정이나 행동을 소거하는 방법으로 적용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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