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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경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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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34)-“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15)


17.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


선에는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듣기에 섬뜩한 화두가 있다. 또한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외쳤다는 석가모니에 대하여,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를 죽여 개에게나 던져 주었을 것이다“고 하는 화두도 있다. 


평생을 두고 자신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기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이러한 말이 분노를 일으킬 만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도들에게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바울을 만나면 바울을 죽여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시면서,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또한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고 하셨다.


누가 이 세상에서 형제나 자매에게 성을 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음욕을 품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데서 가능하게 된다. ‘살인’이라든가 ‘분노’라는 생각이나 ‘여자’라든가 ‘음욕’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지 않을, 즉 무념일 때 그것이 가능하게 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라는 말도 ‘부처’라는 생각이 마음에 있는 한 ‘부처와 부처 아님’이나 ‘조사나 조사 아님’이라는 관념도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생각 위에 다시 생각이 일어나게 되면 결국 번뇌 망상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율법을 완성하기 위한 것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살인’이라는 관념이 인간의 마음 속에 머무는 한, 살인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간음이라는 생각이 없어지지 않는 한 간음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란, 역설적으로 율법에 기록된 일점 일획까지 깨끗이 지워버림으로써 오히려 율법의 일자 일획까지도 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율법의 완성이 가능하게 된다. 


기독교는 어느 다른 종교보다 선악이라는 관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과는 반대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는 것에서 인간의 죄악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을 창세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악이라는 관념이 들어갈 수 없는 무조건의 사랑과 용서에 있다. 선악이란 관념으로 평화를 이룰 수는 없다. 선악이라는 관념으로는 사람이 안식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그대로 보다 더 선하고 완전한 인간은 없다. 선악이라는 관념이 아담과 이브에게 들어오게 된 것은 오히려 뱀, 마귀에 의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쫓겨나게 된 신세가 되었다.


거듭 난다는 것,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곧 착하다든가 악하다든가 하는 생각조차 일으키지 않음을 뜻한다. 선악이라는 관념을 얻게 된 사람이란 ‘그런 척’ 함이란 가식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 선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견성에 있다. 


견성이란 자신의 이전 행동 경험의 결과인 마음, 즉 오온연기로부터 해탈한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부처가 되고 말겠다”고 하던 이전의 분심도 없어졌다. 그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에게 아직 부처라는 생각이나 조사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견성하지 못한 탓이다. 


수행자는 견성의 마지막 단계로서 ‘부처’라는 생각, ‘조사’라는 생각조차 죽여 버려야 한다. 그는 이제 소를 잃어버렸던 사람이 소를 찾은 후 소도 잊고 사람도 잊어버리게 된 단계에 들어온 것이다. 


선에서 수행의 과정을 심우도(尋牛圖)로 묘사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신약성서에서는 탕자가 집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탕자는 집을 떠났다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남의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어 돼지죽으로 연명을 하다가 어느 날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자기를 종으로라도 부리며 먹을 것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마침내 두려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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