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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숙 코너

    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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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도

 

이럴 수가. 온 몸에서 열이 부쩍 솟구쳤다. 부글거리는 심사덩어리가 터져 버릴 것 같은데 그저 멍하니 뒤틀며 기어 올라간 나무덩굴만 맥없이 바라보았다. 빈 가지들만 대롱거리는 텅 빈 포도넝쿨. 바로 어제아침에도 송알송알 박혀있던 까만 포도알들이 눈에 선하다.

 

집 뜰에서 직접 향긋한 포도송이를 따려던 희망은 올해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열도 식힐 겸 차를 몰고 들로 나갔다.

원예전문가 허 선생님이 이사를 가면서 포도나무 한 구루를 옮겨주었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물만 잘 주면 된다며 헛간 벽에 얼개나무받침대를 세우고 친히 심어주었다. 알맹이가 머루보다 조금 큰 아이스와인용으로 2, 3년간은 뿌리박기를 하는지 열매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초여름 꽃 필 무렵이면 싱그러운 꽃 향기가 온 집안에 넘실대며 코를 간질여서 새벽잠을 깨우곤 하였다.

 

포도는 익어가면서 더욱 달 큰 하고 상긋한 향기를 발한다는 것은 3년 전에야 알게 되었다. 매일 이다시피 지켜보며 즐겼는데, 숨은 열성팬이 있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토끼는 아닐 테고, 뻔질나게 나무타기를 하는 다람쥐 떼들은 꽃대를 뎅겅뎅겅 꺾어놓은 미움동이긴 하지만 포도송이까지는 모를 일이다. 짚어보니 아무래도 새떼들 소행 같다. 판자 담에 집까지 짓고 살던 종달새, 아무 때나 구~ 구~ 탁한 소리로 울어대는 산비둘기, 사납고 공격적인 불루 제이가 꼽힌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그것도 내일쯤 따자고 의론한 전날 밤에 마치 우리말을 엿듣기라도 한 듯이 다 따갈 수 있을까. 더더구나 그 많은 알맹이들을 짧은 시간에 자취도 없이 따간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포도송이에 일일이 종이봉투를 씌워주었다. 나중에 보니 봉투 속의 포도알맹이만 다 따갔다. 바닥에 흘린 알맹이나 씨앗을 뱉어버린 흔적도 없었다. 한 둘의 소행은 아닐 것이라 짐작되니 더욱 오리무중이다. 새떼들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 가속페달을 밟는다.

 

간밤엔 비바람에 천둥번개로 번쩍번쩍 요란하더니 아침햇살 따라 맑게 갠 하늘이 새파랗게 높이 올라가 있다. 촉촉하고 청순한 기운이 들판 가득 넘실거린다. 이미 가을걷이가 끝난 밀밭엔 베고 난 노란 밑 둥이 꽃 뭉치처럼 소복소복 솟아있고,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에선 마른 옥수수 대들이 미풍에도 바스락대며 시끄럽다. 마른 풀을 둘둘 말아 하얀 비닐봉지로 씌운 건초더미들이 빈 들판에 줄지어 늘어선 옆에 갈색털이 반들반들 윤이 나는 적토마들이 느릿느릿 풀을 씹고 있을 뿐 지나친 계절의 뒷자락은 한가롭기만 하다.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풍요로운 가을인데 나는 무엇을 수확하였는지 잠시 뒤 돌아보게 한다. 올 일 년도 나름대로의 이상을 찾아 희망을 걸고 열심히 살아왔다. 과연 그 결실이 내 손에 이루어졌을까.

 

 윌리엄할아버지의 과수원에 들렸다. 주차장에까지 쌓여있는 커다란 오렌지색 호박들이 금년에도 풍년이었음을 알려준다. 여름내 사과밭에서 일한 윌리엄의 얼굴은 레드델리샤스처럼 새 빨갛게 그을었다. 둥글둥글하고 새빨간 그의 함박웃음을 보니 마음속에서 끓던 열기가 슬며시 사그라진다. 편안한 마음, 과일을 쓰다듬어 주던 따뜻한 마음이 온 몸에서 번져온다.

 

내가 왜 이렇게 속이 상했는지 조조히 고해바치고 싶은 정다움이 슬금 거린다. 맛 수, 레드 델리셔스, 골든 델리셔스, 허니 크리습, 후 지, 암브로시아, 맥킨토시, 그레니, 10여종의 사과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폐 속 깊이 단내로 채워주는 넓은 가게 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허니 크리습을 반 부셀 사가지고 나오다 매장건물 옆 사과나무에 빨간 사과들이 아직 매달려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아이스사과 만들 거냐고 농담처럼 물었다. 그건 새떼들을 위한 거라며 껄껄 웃는다. 순간 까치밥으로 매달아 둔 새빨간 홍시가 떠올랐다. 아무리 가난한 농가더라도 감을 끝까지 다 따지 않고 남겨두어 새들이 겨울양식으로 먹게 한 우리조상들의 넉넉한 마음씨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포도 알 몇 송이에 그처럼 울화를 돋우었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하였다.

 

 비록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 날마다 물을 주고 봉지를 씌워주고 정성을 다해 보살피긴 했지만 나의 즐거움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까. 꽃의 향기와 익어가는 달콤한 포도냄새를 누리고 ‘청포도 익는 계절’을 읊조리며 한껏 겉멋이라도 낼 수 있었음은 지난 시간의 작은 보상이 될 수 있으리라.

 

누가 먹었으면 어떠랴. 스스로 나는 모든 것을 자연모두와 나누며 산다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을 듯하다. 이상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다는 자각이 나의 삶은 향기로운 시간이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포도를 따 먹으려 몇 번이나 높이뛰기를 하다 실패하고 ‘저건 신포도야’ 돌아서던 이솝우화의 여우생각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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